기억 속 이야기 1-3

in #kr7 years ago

다음날 일어나보니 그녀는 이불을 고이 개어놓고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는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이 갑자기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성에 대한 감정이어서 그럴 수 있는 걸까.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잘 들어갔는지 걱정되고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삐삐(참 오래된 물건이다. 혹시 용도를 모르시는 분은 따로 검색해주시길...)에 잘 들어갔냐는 메시지를 남겨놓고 학교 수업도 빼먹은 채 그녀에게서 응답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다.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났던 것 같다. 솔직히 그날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밥을 먹었는지 차를 마셨는지, 정확히 무슨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날 평소의 나와는 달리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있어서 기억을 관장하는 영역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론만 말하면 나와 그녀의 관계는 더 진전되지 않았다.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날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그녀의 나에 대한 감정이 바뀌었거나. 우리는 그냥 가끔 만나는 선후배 사이로 돌아갔다.
그녀와 연인 비슷한 관계가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였다. 둘 다 졸업하고 우연한 기회에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난 날, 그때서야 학창시절 서로에 대한 감정이 같은 것이었음을 확인하고 만남을 이어갔다. 그런데 ‘연인 비슷한’이란 표현을 쓴 걸 보면 눈치 챌 수 있겠지만 그때의 만남 역시 제대로 된 연애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그때도 연애를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녀가 한번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빠는 너무 뻔해. 조카랑 장난감 칼싸움을 하는 것 같아서 재미가 없어.”
그때는 그 말조차도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제대로 같이 놀러간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당시 구리에 있었고 그녀는 안산 오빠 집에 있어서 워낙 거리도 멀었던 데다가 내가 학원 강사를 하느라 저녁에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띄엄띄엄 관계를 유지하다가 내가 갑자기 농사를 지으러 간다고 시골에 내려가면서 더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서울에서 만나 무슨 일로 다퉜고 그 후로 연락이 끊어졌다. 나중에 그녀가 독일에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그로부터 또 몇 년이 지나 그녀가 독일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또 잠깐의 만남을 이어간 적이 있다. 너무 긴 시간에 걸친 간헐적인 추억이어서 자세히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다. 또 결론만 말하면 그녀는 지금 내 아내도 아니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

내가 그녀를 떠올릴 때면 꼭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그때 그녀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언젠가 서울 종로 거리를 함께 걷고 있었는데 옆에서 걷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그녀가 어떤 가게 옆에 놓여있는 탁자에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내가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높은 곳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자세히 보려고 그런다고 했다. 내가 얼른 내려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나서야 천천히 내려왔다. 당시는 다른 사람들 시선에 너무 창피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지니지 못한 면을 지닌 사람에 끌린다는 말을 비로소 체감했다. 그녀를 만난 이후로 비록 내가 그러지는 못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인정하고 심지어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나에게 남겨준 소중한 선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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