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예술품이 될 수 있는가? (2/3: 역사 속 예술가의 저항)

in #kr6 years ago (edited)

예술가의 저항


시계의 미학적 가치를 직접 다루기 전에, 우리는 그에 대응하는 미술사를 이해해야 한다. 발상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접하는 예술은 뜬금없다. 지루할 뿐 아니라 맥락이 없다. 이것은 마치 국어 사전을 'ㄱ' 부터 읽는 것과 같다. 사전은 무언가를 찾아서 쓰기엔 좋은 참고서지만, 순서대로 읽기에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계를 직접 이야기하는 순서 대신, 초기 예술 형태와 당대에 유행하던 사상이 어떻게 흘렀는지 먼저 이야기하면서 시계 미감까지 차근차근 접근할 것이다.

1920px-Rembrandt_-_De_Staalmeesters-_het_college_van_staalmeesters_(waardijns)_van_het_Amsterdamse_lakenbereidersgilde_-_Google_Art_Project 직물길드의 평의원들, 렘브란트, 1662

기계식 시계는 16세기 부터 그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해서 17세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손목 시계의 형태가 된다. 계몽주의는 이 시기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다. 이것은 서구 중심의 이성적 사유체계로, 사람들은 합치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준이 세상 어딘가 반드시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리고 시계는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는 목적과 가장 부합하는 현물(現物)이었다.

계몽주의의 주된 덕목인 정밀함과 합리성의 정신은 시계의 정확도, 계측기능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이 시기 인류는 합의 가능한 보편적 진보를 탐구했다. 인류는 이데아(idea)라는 이름에 갈고리를 걸어 현실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인식 저 편에 두었던 이상, 믿음을 해결 가능한 문제로 정의하고 하나씩 증명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실험을 했고, 실험으로 찾아낸 법칙과 규칙을 통틀어 과학이라 명명했다.

성공에 취한 사상가들은 이제 자연 법칙 뿐 아니라 인식, 정신에도 합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믿게 된다. 이렇게 17세기 부터 20세기 까지 지속되는 경향을 모던이라 부른다. 예술 역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예술가들은 약 300년 이라는 시간을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객관적 요소가 있다고 믿고, 실험했다. 이들은 보물을 찾듯 절대적 미의 기준을 찾아 정진했다. 주류로 인정받은 미술 이론은 사조(-ism)가 됐다. 이렇게 발견한 미의 법칙은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흔히들 예술가는 창조적인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유명한 미술 법칙을 재현하며 보냈다.

그렇지만 역사가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는 법이다. 미술계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기법을 답습하는 행위가 완곡해지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들끼리도 합치할 수 없는 미의 지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선, 신예 화가들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합의로 결정된 이상적 아름다움 앞에 화가는 기예를 실천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계몽주의 이데올로기의 그늘 아래서, 화가는 붓(도구)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불만은 누적되어 터질 곳을 찾아 힘을 비축했다. 마침내 예술은 ‘주관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고인 둑을 터뜨렸다. 인상주의 미술이 등장한다. 이제 예술가들은 이제 자유로운 실험을 시작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찾게 된 것이다.

민중을이끄는 자유의여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

미의 규칙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1789) 부터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예술 뿐 아니라 인간 혁명이었다. 조제프 시에예스(Joseph Sieyes, 1748-1836)는 프랑스 혁명을 두고 "혁명 이전에 귀족을 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표현한 바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모든 개인에게 인권이 생겼고, 인간은 누구의 종속물이 아닌 자립 존재로 우뚝 서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예술가들은 테크네(techne, 기예)과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날 우리가 좋아하는 세잔이나 고흐, 고갱의 것은 당대 평론가들에겐 비판하기 쉬운 마이너 예술세계였다. 그들은 무명으로 살다가 죽거나, 아카데미에서 인격적 모독을 당하거나, 전시에서 쫒겨나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와 달리 당시 잘나갔던 예술가들은 공무원 같은 존재였다. 공무원 예술가들은 주제나 작업세계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 앞에는 주문받은 제단화나 성서화, 초상화 대기열이 넘쳤다. 작업은 공무를 하듯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당대 유명 예술가들이란 후원가들이 선호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들 중 운 좋은 소수만이 오늘날 미술관에 남았지만.

곰브리치(Sir Ernst Hans Josef Gombrich: 1909-2011)에 의하면, '하수인으로서의 예술'은 19세기에 들어서야 거의 무너졌다. 해방과 평등의 이념이 귀족이라는 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후원자의 자금 지원을 받던 예술가들은 자유의식 아래 자기 예술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거리로 나와 초상화를 그렸다. 치욕적이었다. 예술가들은 구겨진 자존감이든 무엇이든 자신의 에고를 그림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쟁취한 자유와 가난이 미술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금전적 풍요가 끊기고, 권태의 씨앗이 바닥에 떨어지자 창조성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성공한 사업가와 미술가는 서로 대척점에 있었다. 전자는 미술가들을 시덥지 않은 작품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붙여 파는 사기꾼이라 여겼다. 반대로 미술가들은 부르조아들이 자본으로 만든 새 계급이 터무늬 없다고 비판하며 그들을 자신들보다 낮은 수준의 안목을 가졌음을 공개적으로 비웃었다. 두 세력이 만나는 곳은 미술이었다.

화가들은 미술로 자본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자본가들은 모자란 감각을 넓히려 들다가 되례 무지한 민낯이 까발려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을 향한 비판이 언제나 성공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풍자는 오직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들에 한해 인정됐다. 결국 오늘날까지 이름이 남은 사람은 에고 센 삼류 예술가 더미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인정받은 소수였다. ‘예술이라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창의적인 질문을 던진 사람들 말이다. 예술가들의 독립적인 성공 길은 이 시기 부터 열린다. 물론 이 시기까지도 뛰어난 기교나 금액이 큰 작업을 수주받아 유명해진 화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조토, 미켈란젤로, 홀바인, 루벤스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예술은 전근대예술이라 불리며 참고 자료로서 교과서에 실려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계는 모사가들의 역사에서 기존의 인습에 저항하고 새로운 미술의 길을 발견하는 반항아들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미술은 이때부터 끊임없이 태동의 굴레를 돌며 발전한다. 기존의 대세 세력을 정(正)이라 하면, 반(反)의 세력은 그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연합이다. 그리하여 정도, 반도 아닌 새로운 어떤 것이 주류 미술계에 편입되는 순간, 미술계의 영역이 확장됐다(合).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합 또한 모순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합의 세력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예술가가 나오는 순간, 그것은 다시 정이 되어 반과 합의 역사를 반복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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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봤습니다. 다음 편도 기다려집니다. 감사합니다.

@spaceguy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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