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야기] 북한의 역대급 도발과 우리의 시선

in #kr7 years ago


연일 뉴스 전반부를 장식하는 두가지 키워드가 있다.

‘평창 올림픽’ 그리고 ‘북한’


북한의 올림픽 참가로 수많은 이슈들이 생겨났다. 오늘 주된 이야기는 아니니 키워드만 보자면 ‘미국’, ‘단일팀’, ‘평화’ 등
나의 대학생활에 키워드들이 여러 개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북한’이다. 전공은 경제학이었지만 북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들을 수 있는 북한 관련 교양은 다 들은 것 같다. 지금도 탈북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즐겨 본다.
그래서 오늘은 평창올림픽 참가로 잠잠한 북한의 도발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무뎌진 사람들


북측의 무력도발, 혹은 무단도발이 1953년 휴전협정 이후 6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발생해 왔다. 예전에는 도발이 하나 하나 터질 때 마다 걱정을 하면서 지켜봤는데, 이제는 그냥 무뎌진 것 같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북한의 도발에 관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줄어들었다.
군생활 시절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몇 달간 비상 체제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울면서 부대로 전화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이제는 북한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채널을 돌리신다.
관심이 식었다기 보다는 이제 무뎌진 것 같다.
"또 쐈구나~~ 또 짖는구나~"

도발을 하는 이유


한반도의 분쟁은 약 60여년 이상을 이어왔다. ‘5년 이상’을 지속적인 분쟁의 시간 기준점으로 볼 때 한반도의 분단 상황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휴전 협정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남북의 대치와 경쟁, 간헐적인 상호 폭력 행위 등은 지속적인 분쟁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 행위가 ‘군사도발’이라는 다소 격화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은 한반도 위기 상황에 대한 예측을 간과할 수 없도록 해준다. 실제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북한의 대남 도발은 단순 공작으로부터 매우 폭력적인 방식의 ‘군사도발’로 이어지고 있어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 후자의 방식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계속된 무력도발의 원인은 무엇일까? 남북한의 갈등은 대부분 안보이익 갈등(conflict of security interest)에 연유한다. 예컨대 갈등을 해소하려는 남북의 첫 화해시도인 ‘7.4공동성명’은 이행되지 못했는데 이러한 화해실패(accommodation failure)의 주요 요인은 전한반도에 배타적, 독점적 관할권을 행사하려는 쌍방이 자신의 안보이익을 수호하려는 강한 의지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주한 미군철수를 요구했고 남한과 미국의 고위정책결정자들은 북한의 재차 남침을 우려하여 대북 핵공격 시나리오를 상정한 한 미 대규모 3군 합동 ‘팀 스피리트’군사훈련을 결정 실시하였으며 이는 북한 안보이익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나아가 화해와 불가침 그리고 교류 협력에 역점을 둔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실패도 쌍방의 안보이익갈등에 그 이유가 있다. 즉 분단 이후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의 과도한 상충이 남북한 장기갈등의 원인이 되어 왔다. 정면으로 대치된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7.4공동성명 이행실패의 원인이었다. 따라서 남북한의 장기적 갈등은 안보이익갈등과 이데올로기적 체제갈등이 상호 포개져 경쟁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전개된 제로섬 게임의 결과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의 대남 군사도발은 정권의 취약성을 극복하여 정권의 안정적 생존을 담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그래서 북한의 대남군사도발은 수령절대주의와 선군독재를 통한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국가목표를 내건 북한의 취약한 정권 정통성을 극복하는데 있어 그 효과가 부합된다. 실제로 북한의 대남군사도발은 북한 내부적으로 지배엘리트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정권에 이완되어 있거나 제거하기 어려운 지배 엘리트들을 제거할 기회를 마련해준다는 측면에서 정권의 취약성을 완화하는데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그리고 북한주민들의 경제상황 악화로 인한 극도의 궁핍한 생활에서 나오는 불만을 외부 위협으로 분산시킴으로써 사회적 결속을 도모하는데도 지대한 효과를 미친다. 결국 이런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계속된 북한의 대남도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변수의 수준에 따른 북한의 대남 군사도발 가능성>

역대급 군사 도발

지금도 계속 해서 도발을 하고 있는 북한. 역대급 북한의 도발들을 모아봤다.

1. 창랑호 납북사건 (1958년 2월 16일)


-배경
북한이 이와 같은 납치극을 연출한 이유는 때마침 중공수상 주은래(周恩來)가 평양을 방문하기로 되어있어 이 기회를 이용, KNA기가 의거 월북한 것처럼 꾸며 대대적인 선전을 하기 위해서였다. 즉 북한은 주은래가 평양을 방문키로 결정한 후 치밀하게 납치극을 꾸며온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북한은 KNA기를 납북한 뒤 곧 의거 월북했다고 그들의 보도기관을 통해 선전하였던 것이다.

-경위
이 사건은 1958년 2월 16일 대한민국 국민항공공사 소속 DC-3여객기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사건으로 건국 후 최초로 벌어진 항공기 납치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민항기에 애칭을 붙였다. 납치기의 애칭인 창랑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씨의 호였다. KNA는 당시 3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는데, 나머지 2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호, 이기붕 부통령의 호를 딴 만성호 였다고 한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가는 대한민국 국민항공공사 소속 창랑호 여객기는 30명의 승객과 승무원3명, 미군 군사고문단 중령 1명, 총 34명의 인원이 탑승해 있었다. 11시 30분 부산 수영비행장을 이륙, 서울 여의도 비행장을 향해 비행하던 도중, 12시 40분경 평택 상공에서 납치되었다. 창랑호는 평양 순안공항에 착륙했으며 납치범들은 북한 공작원 김택선 등 총 7명으로 추정되었다. 범인들은 승객 중 군인 2명을 둔기로 가격해 실신시키고, 조종사를 협박, 평양으로 끌고 갔다. 피랍기의 조종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인 윌리스라는 인물이었고, 부조종사는 미 공군의 맥 중령이었다.

북한은 한국 민항기가 자의로 월북해 왔다고 발표했고, 우리 정부는 2월 22일 북괴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였고,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에 대해 협력을 호소했다. 악화된 세계여론에 굴복한 북한은 3월 6일에 납치범 6명과 그들 가족 2명을 제외한 26명을 남측으로 송환했다. 승객 중 미 중령은 납치범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송환하지 않은 8명은 망명했다고 발표했으며, 승객과 승무원은 돌려보냈으나, 기체는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다.

-결과
이 사건으로 인해 3기만을 운행하던 한국항공공사는 1기를 잃고 이에 대한 적자를 극복하지 못해, 사장인 신용욱 대표가 한강으로 투신자살하고 1961년 11월 13일 폐업처리 되었다.

2.당포함 침몰사건 (1967년 1월 19일)


-경위
당포함 침몰사건은 우리 해군 역사상 최초로 북한군의 공격에 한국 해군 함정이 침몰한 사건이다. 당포함은 동해 어로보호임무를 위해 1966년 12월 28일, 진해기지를 출항하였으며, 다음 날인 29일에 작전수역에 도착하여 어로보호임무를 수행하였다.

1월 19일, 동해 휴전선 인근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200여척의 어선들이 조업을 하고 있었다. 명태는 한류성 어종이기 때문에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명태를 잡을 수 있어서 어민들은 자꾸만 북쪽으로 올라가려 했다. 특히 휴전선 이북해역에서 잠시만 작업을 해도 많은 명태를 잡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어민들은 필사적으로 월경을 하려 했다. 이 경우 자칫하면 북한 해군에 나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선들의 단속에 여념이 없었다. 어선들이 조업 중인 곳은 북한군 해안포대 사정거리에 있었다. 당포함 장교들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가가서 경고를 하고 있을 때 북한군에서 불을 뿜었다. 당포함 한척으로는 해안 포대를 모두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함장은 전원 퇴함 명령을 내렸다. 결국 추운 바다에서 상당수가 바다에 빠져 심장마비 등을 일으켜 사망하였다. 결국 79명의 인원중 장병 28명이 실종되고 4명이 구조직후 사망하였으며 7명이 치료도중 사망하여 총 39명이 전사하게 된다.

-결과
당포함 피격에 격노한 해군참모총장은 북한에 대해 공격할 것을 주장했고, 박정희 대통령도 희망하였으나 독자적으로 공격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보복은 하지 못했고 기존의 어로저지선보다 남쪽인 북위 38도 30분 수역에 어로 한계선이 그어졌다.

3.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경위
이 사건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 당하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 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결과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하였다.또한 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나, 이 사건 이후에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하여, 박정희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향토 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남-북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무산되었다.

4.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배경
196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한국에서 혁명을 조장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강요하기 위해 조직적인 도발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위기를 증폭시켰다. 하지만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기존의 긴장조성과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한 비무장지대 침투나 요인암살과는 다른 형태의 군사도발이었다.
당시 대북 억제의 능력과 의지 전달측면에서 주한 미군의 존재는 억제전략의 핵심요소였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한국 방위 의지 시험과 아울러 자신들의 전투의지를 과시하고, 주한미군의 철수 압력을 위해 국제적 관심을 갖고자 도발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경위
이 사건은 8월 18일 오전 10시경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국제 연합군 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 ·경호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수십 명의 사병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국측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서 도끼와 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는 중 ·경상을 입힌 뒤 사라졌다.

-결과
사건 직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 돌입)를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미군은 F-4 전폭기 1개 대대와 F-111 전폭기 1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항진시켰으며, B-52 폭격기를 출동시키는 등 전쟁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국제 연합군 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해 9월부터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의 분할경비로 되었다.

5.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사건 (1983년 10월 9일)


-배경
이 사건은 북한이 한국 대통령을 시해하기 위해 저지른 사건으로 ‘중심 고리 타격전략’에 따라 국가원수를 시해함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지위 신장에 제동을 걸고 국내 혼란을 가중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남한이 서울올림픽 개최와 경제적으로 북한을 추월하게 됨으로써, 남북한 대결에서 보다 유리한 상황과 환경을 조성하고 남한 사회에 공포심을 조장하여 사회를 혼란시키려는 의도였다. 또한 전두환 정부의 비정통성에 대해 국민이 가지고 있떤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불만과 불안정성을 유도하여 정부에 대한 무능력과 불신감을 고조시키고, 나아가 남한에서의 혁명여건을 성숙시켜서 궁극적으로 한반도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계략이었다고 보여 진다.

-경위
이 사건은 북한이 1983.10.9 당시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테러 사건이다. 1983년 10월 9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 사건으로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건 발생 후 나머지 일정을 중단하고 이튿날 새벽 급거 귀국하였고 우리 정부는 한국정부조사단을 현지에 파견, 버마 측과 합동 조사를 벌였다.

이후 버마 당국은 이 사건이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등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수사결과를 밝혔다. 이들은 미얀마 주재 북한 대사관 정무 담당 참사관 전창휘의 집에 은거한 후,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버마에 도착하기 하루 전 새벽에 아웅산 묘소로 잠입하여 지붕에 2개의 폭탄을 설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사결과를 발표한 직후 버마 정부는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버마 주재 북한 대사관 요원들에 대해서 출국 명령을 내렸다. 당시 버마는 우리 정부는 물론 북한과도 수교국이었다. 그리고 12월 9일 양곤지구 인민법원 제 8특별 재판부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한편, 이 사건으로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하였으며, 미국·일본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하였다.

-결과
서둘러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은 10월10일 귀국성명을 통해 “잔학무도한 폭력은 반드시 응징되어야 할 것임을 밝혀둔다.”라는 취지의 성명을 내고,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비상 국무회의와 국정자문회의를 열었다. 한국군 내부에서도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라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한국의 독자적인 대북 억제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는 미국의 정책 결정과정에 의해 독자적인 군사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는 정부의 의지를 밝혔다.

6.제2차 서해교전 (2002년 6월 29일)


제1차 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2002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북한은 다시 한 번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여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이날 오전 9시 54분부터 북방한계선을 넘기 시작한 북한 경비정들은 10시 25분 근접차단을 실시하던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도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대응사격을 개시하는 한편 인근의 제천·진해함(PCC)과 참수리급 경비정 4척을 투입해 격파사격을 실시하였다. 교전은 오전 10시 56분까지 31분간 진행된 후 북한의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 북으로 퇴각함으로써 종결되었다.

7.천안함 침몰 사건 (2010년 3월 26일)


-배경
2010년 북한은 두 번의 군사도발을 통해 북한이 의도한 권력 승계를 진행시킬 수 있었고, 대한민국을 언제라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북한은 주가지 정치적 목적에 의해 대남 군사도발을 자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북한 내부적 요소로 북한 경제생활의 악화로 인한 주민의 불만 상승 및 누적, 김정은 후계체제의 진행과 주변 인사들에 대한 숙청 및 정리 작업들은 모두 북한 정권으로 하여금 외부로 관심을 전이시킬 필요성을 절감케 했고, 이것이 대남 도발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대외적 요소로서 2009년 장거리 로켓발사와 2차 핵실험 등으로 직면하게 된 국제사회의 대북제제를 해제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에 압박을 가하여 한,미 양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고 새로운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한 내부적 요소로서 김정은의 정권계승과정에서 정당성 확보가 일차적인 이유였다고 하더라도 김정일은 군사도발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다고 볼 수 있다.

-경위
천안함 침몰 사건은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이 피격되어 침몰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표한 이 사건의 공식 명칭은 천안함 피격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에서 전문가 24여 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천안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 발표는 미국과 유럽 연합, 일본 외에 인도 등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으며 안보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조사결과에 비추어 우려를 표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공격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신들과 관련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가 반대하면서 '안보리는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북한의 반응, 그리고 여타 관련 국가들의 반응에 유의 한다'는 형식적으로나마 북한의 입장이 반영됐다는 것이 외교가의 평가다.

-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조사 결과에 대해 "특 대형 모략극"이며 천안함은 좌초했다고 주장했다. 천안함의 침몰에서 인양, 조사 발표까지 대한민국 사회와 주변국의 관심을 끌었으며,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 대해 언론과 각계 인사들은 다수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침몰 원인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으로 갈등을 빚었다.

우리의 자세?

도발의 배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정권의 취약성’과‘외부 위협 수준’이 높아지는 상황이 올 때마다 큰 규모의 군사적 도발을 일으켰다. 즉, ‘외부 위협 수준’ + ’정권의 취약성’ = 대남 군사도발이라는 간단한 명제가 세워진다. 이 명제를 현 상황에 대입해 봤을 때 앞으로 ‘정권의 취약성’부분은 낮아지지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김정은 체제가 어느 정도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 위협 수준’이 심각하게 북한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연평도 포격이나 천안함 침몰사건 같은 준 전쟁 급에 해당하는 도발은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핵 개발이나 미사일 발사 같은 빈번한 도발은 꾸준히 시도할 것이다.

앞으로 남한은 북한의 도발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사실 이부분은 수많은 신념과 미래의 상황 등이 얽혀 있는 부분이기에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래서 지난 1.21사태 당시 남파됐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신조의 답변으로 대신한다.

“대북사업에 있어 남한은 감성을 자제하고 좀 더 냉정해져야 한다. 현재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북한의 대남전략은 변한 것이 없다. 그 동안 북한은 보이지 않게 남한 사회를 선동해 왔지만 햇볕정책 이후 북한 응원단 등을 통해 체제를 홍보하는 전술을 펼치고 있으며 금강산,개성, 백두산을 그들의 공산주의 홍보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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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과 전쟁없는
세상을꿈꿔 봅니다~~!!

For 행복한 세상~~

왕정체제에선 국가적 선동만큼 잘먹히는것이 없죠ㅎㅎ

맞습니다ㅎㅎㅎ선동 선동!

이번에도 평창올림픽 전날 대규모 열병식 한다네요 그거도 원래 날짜를 옮겨서 ㅋ

저도 그기사를 봤습니다ㅎㅎ징글징글합니다

북한 건군절이 4월인데 평창 개회식 전날로 이번에 바꿨다는 기사 봤네요..ㅎㅎ 이게 먼지 대체..이놈들만 아니었어도 내 20대의 소중한 몇 년을 날리지 않았을 건데 어휴..

ㅋㅋㅋㅋ군필자들이라면 다 비슷한 마음일것같습니다

군대에 다녀온 입장에서.. 절때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의식이 가장 위험하다는걸 군생활 하면서 느꼈기에 더욱 공감합니다.. 안보의식이 중요하죠.. 화전양면전술이라 하죠. 말은 번지르르하고 남한과 화해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뒤에서는 늘 도발과 남한에 대한 침략을 생각하는 북한.. 정말 암덩어리 같은 존재입니다..

화전양면.. 오랜만에 듣는 단어네요..
분단국가에서 안보의식은 정말 중요한것같습니다!

좋은 컨텐츠가 즐거운 스티밋을 만드는거 아시죠?
짱짱맨이 함께 합니다

짱짱맨 짱~~

평창단잁팀 여자하키선수들도 그 명목으로 인해 눈물흘리고 있지요~
우리정부만 의미를 두고 있는듯 ㅠㅠ
그로인해 출전 못하는 선수들은 ~~

ㅜㅜ 상징적인것을 위해 실효성을 버리는..

저는 이제 북한 안 믿어요 ... 다른정권으로 바끼던지
..이자식들

저도요..휴..

잘읽었습니다 북한의 판문점 도끼사건은 정말 잔인하네요ㅠㅠ

끔찍 of 끔찍이죠ㅜㅜ

전쟁은 피해야할 것이고,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일이지만
위의 사건들만 봐도 얼마나 많은 희생이 이뤄졌습니까.
당사자들은 사과 한마디도 못 받았는데, 북한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면 화가 납니다.
과연 한 쪽이 일방적으로 메달려서 이룩한 평화가 지속가능할까 의문도 들고요.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지금 이순간에도 지켜주시고 계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확고한 신념이 있으시네요 ㅎㅎㅎ 후피님 요즘 너무 잘 성장하시는것 같은데요~

앗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뭣보다 스팀잇이 재미있으니 자꾸자꾸 들어오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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