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7] 오만한 착각... '사랑할 수 있는 나이'

in #kr7 years ago

출근 준비로 바쁜 와중에 엄마가 쓰윽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제 친목 모임을 다녀온 엄마는 자신의 소소한 후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화장을 하며 엄마의 말을 흘려 듣고 있는데 갑자기 질문이 훅 들어온다.

"그때 말했던 선생님 기억나? 사별하고 다른 학교 교감이랑 소개팅했다던 그 선생님 있잖아"

궁금증을 자극하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려 긍정의 눈빛을 보냈다.

"결국 헤어졌나봐. 가뜩이나 마른 사람이 아주 살이 쏙 빠져서는 해골이 됐더라"

때는 바야흐로 작년 여름 정도였겠다. 한 선생님이 엄마에게 고민상담을 요청했단다. 몇 해 전 남편과 사별을 했는데 요즘 들어 부쩍 밤마다 너무 외롭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이 나이에 다른 남자랑 만나는 게 괜찮을까? 남들 눈도 있는데... 그래도 나 아직 이렇게 건강하고 조금 있으면 연금도 나오고 능력도 되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 혼자 살아갈 생각하니까 너무 서러운 거 있지? 근데 딸 눈치도 보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그닥 친한 사이도 아닌데 굉장히 사적인 고민을 듣게 된 엄마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고 했다. 대화 말미 "너무 힘드시면 소개팅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라고 넌지시 말을 건넨 엄마.

그 선생님은 그럴까말까 한참을 망설인 뒤 자리로 돌아갔고 그렇게 끝나는 듯 싶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선생님은 엄마에게 다시 찾아와 자신이 소개팅을 했으며, 생각보다 꽤 잘 되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학교 선 생님인데 곧 정년이고 그 쪽도 사별했단다.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 다 출가를 했고 외모도 반듯하고, 가치관도 올드하지 않고, 여 자를 배려할 줄 알고 등등 자랑을 잔뜩 늘어놨다고 했다. 겨울에 같이 하와이 여행을 가기로 했으며 슬쩍 '이 남자와 재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는 덕담을 건네며 두 사람의 만남을 축복해주었다. 그렇게 그 선생님은 매번 자신의 데이트 후기를 엄마에게 들려주었고 본 의 아니게 엄마는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게 돼버렸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은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그 남자... 요새 애들이 말하는 나쁜남자인 것 같아"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엄마에게 그 선생님은 좀더 자세한 속사정을 털어놨다.

"며칠 전에 너무 보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더니 자기 위스키 모임이 있다고 안 된다는 거야. 내가 조금 삐진 투로 빠지고 나랑 만 나면 안 되냐고 하니까 딱 잘라서 안 된다는 거 있지?"

엄마가 "정말 좋아하고 중요한 모임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라고 위로하자 그 선생님은 "사실 이런 게 한 두 번이 아니야. 매번 내가 후순위인 느낌이 들어"라고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데이트 약속을 잡을 때마다 개인적 일정으로 항상 미루는 남자, 전화하면 잘 받지 않고 밤늦게 바빠서 못 들었다고 변명하는 남 자, 하지만 만났을 때만큼은 세상 따뜻한 남자, 뭐 이런 얘기들이었다.

요지는 '자신은 상대방을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데, 상대는 자신을 소위 말하는 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것.

그 선생님은 꽤나 답답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큰 연애경험 없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남편과 결혼해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사별을 하게 됐고, 쉰 살이 넘어서야 이런 복잡한 연애 감정에 시달리게 됐으니 말이다.

여전히 말을 아끼는 엄마에게 그 선생님은 최후의 진술, 사실은 아까부터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인 게 분명한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딸이 그러는데 그 남자가 내 능력을 보고 만난 거 같대.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해?"

사실 이 선생님은 시작부터 '한없이 퍼주는 사랑'을 했단다. 데이트 비용은 물론 하와이 항공권, 소소한 선물 등 전부 자신이 부 담했다. 남녀평등시대에 누가 내는 게 무슨 문제겠느냐만은 '테이크 없는 기브' 뿐이었으니 문제다. 여행 얘기도 남자 쪽이 먼저 꺼냈건만 항공권은 선생님이 결제했다고 한다.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남자 분이 워낙 사교모임이 많아 쓰는 돈이 많고 개인적 사정때문에 모아둔 돈이 별로 없는 듯 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딸은 "엄마, 혹시 그 분하고 결혼하게 되면 이 집 명의는 내 명의로 해놓고 가"라고 선전포고 아닌 선전포고를 했고, 그 선생님은 살짝 기분이 나쁘면서도 "그래. 너 아직 결혼도 안했고 나랑 그 사람은 연금도 나오니까"라며 넘어갔다고 했다.

문제는 그 남자와 얘기 도중 '혹시 우리가 더 진전된 관계가 된다면 집은 딸한테 줄거다'라는 말을 하게 됐는데 그 이후부터 남자의 태도가 왠지 모르게 달라진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나보다. 돌이켜보니 전화를 잘 받지 않게 된 시점도, 만남의 횟수가 줄어든 시점도 다 저 때부터인 것 같다고...

그렇게 겨울방학이 찾아왔고 엄마는 선생님의 연애 상담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다시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은 자신이 그 남자와 헤어졌음을 공개했단다.

"결국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엄마는 그 선생님의 핼쑥해진 얼굴 뒤로 감춰진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고 했다. 그렇게 꿈꾸던 그 남자와의 하와이 여행도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선생님은 남자 대신 자신의 딸과 그토록 가고 싶던 하와이를 다녀왔다며 애써 기쁜 표정을 지어보였다고 했다. 뭐도 좋았고 뭐가 맛있었고, 자동차를 바꿨고 등등 부질없는 자랑질... 그 자리에 없었지만 애처로워보였을 것이다.

남자가 이별을 고한 이유가 집 명의 때문인지 아니면 혼자 너무 앞서나가는 저 선생님의 상상력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제3의 문제인지는 알길이 없다.

사실 내겐 이 부분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내 일이 아니니까.

다만 내가 한방 얻어맞은 부분은 쉰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저런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초조해하고 살이 빠지고 전전긍긍하는, 사랑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세월의 흐름에 전혀 닳지 않았는다는 것이다.

체통과 체신 속에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신이 긴긴밤 얼마나 외로운지 솔직하게 고백하고, 좋아하는 상대와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 누군가에게 연애상담을 신청하는 저 용기. 그저 놀라웠다.

한살 한살 더 먹을수록 사랑이라는 감정에 무감각해지는 내 자신을 투영해본다. 요샌 심장이 정말 마른 오징어를 넘어 쩍쩍 갈라진 쥐포 같다.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감정과 행위에 나이 제한이 있다고 치부해버린, 그래서 더 이상 20대 때의 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버린, 아니,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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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아송님에게 오실 사랑을 응원합니다! 사랑은 삶의 행복중 하나예요 ㅎ

그러게요ㅎ 전 지금 그 행복을 잃어버린 상태인 것 같네요ㅜ

언젠가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가 하셨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엄마도 여자거든?"

그 사실을 자꾸 망각하는 게 문제였네요..

그렇죠. 중요한건 나이가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죽기직전까지도 느낄 수 있다고 믿고있거든요ㅎㅎ 이상주의적이지만요

죽기 전까지 절절한 사랑을 한번쯤은 해보고 싶어요ㅎ

연애 할수 있습니다~ 감정이 더 없어지기 전에
한번의 연애는 깊게 해보실 수 있기를~
사랑은 나이와는 상관 없는 것 같더라구요~^-^팟팅

으쌰으싸 같이 힘내요
즐거운 주말
행복한 스티밋 !

우와~ 싱아송님의 수려한 글솜씨에 빨려들어가게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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