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연애 상담, 자크 라캉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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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가장 일반적인 형식, 즉 공식 ‘$◇a’로 정의된다.” 자크 라캉 「에크리」

“그/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연애를 시작하게 될 때, 혹은 시작하고 싶을 때 우리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건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더라도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냥 아는 사이로 혹은 친구 사이로 지내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연애관계로 돌입하게 되면 마치 그 사람이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느껴지곤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연애는 참 마법 같은 일이다. 애초에 몰랐던 사람에게 불과 몇 주, 몇 달 만에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싶다고 느끼고, 평소 잘 알고 지냈던 사람도 마치 낯선 사람처럼 느끼게 만드니까.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를 알고 싶다. 몰랐던 사람을 알고 싶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연애는 기본적으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행동 아닌가? 그런데 상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것들을 해줘야 한다. 바로 이것이 끊임없이 연애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이유다. 하지만 가끔 연애를 시작하면서 심지어 한 참 연애 중에도 가끔 당황하게 된다. 이제 조금 안다고 생각했던 상대를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 그렇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가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질문, “그/그녀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에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은 이리 답할지도 모르겠다.

“환상은 가장 일반적인 형식, 즉 공식 ‘$◇a’로 정의된다. (중략) ◇는 ‘~욕망한다’라고 읽어야 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도 동일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라캉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단연 먼저 드는 생각은 ‘뭔 소리야?’다. 라캉의 이 난해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 ‘◇’, ‘a’라는 세 개의 암호를 풀어야 한다. 우선 ‘$’라는 암호부터 풀어보자. 일단 ‘$’은 주체(자아 혹은 자신이라고 생각하자)를 의미하는 ‘S’(subject)에 분열을 의미하는 ‘/’를 합친 것이다. 그러니까 라캉의 ‘$’는 분열된 주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라캉에게 주체는 기본적으로 분열된 주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아이는 어린 시절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성기를 만지면서 쾌락을 느끼는 시기가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성기기’) 하지만 이는 얼마 가지 못한다. 부모가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성기를 만지며 느꼈던 쾌락을 포기하게 된다. 성기를 만지면서 느꼈던 쾌락은 금지되고 이로써 아이는 욕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설명이다. 즉, 주체라는 것은 금지를 수용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금지된 것을 욕망하면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주체는 분열된 주체(‘$’)인 것이다.

다음으로 ‘a’라는 암호를 풀어보자. ‘a’는 정확히는 ‘대상 a’(object a)이다. 이는 금지된 욕망의 대상이다. ‘대상 a’은 금지되었기에 주체가 욕망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자기 성기를 만지면서 느꼈던 쾌락이 아이의 '대상 a'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대상 a’는 주체가 잃어버렸기에(금지당했기에) 주체가 끊임없이 회복하려는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라는 암호는 쉽다. 라캉이 직접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욕망한다’라는 의미다.

이제 ‘$◇a’라는 암호를 풀 수 있다. ‘분열된 주체($)는 금지된 대상(대상 a)를 욕망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보자. ‘케익(대상 a)을 먹지 말라’는 금지를 부여받은 아이는 케익이 금지되었기에 결국 그것을 더 욕망할 수밖에 없는 분열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 설명할 수도 있다. 주체가 케익을 욕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케익이 주체를 욕망하는 것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진열장 속에 있는 케익이 나를 부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캉은 “◇는 ‘~욕망한다’라고 읽어야 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도 동일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라캉의 말이 옳다면, 주체(그/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분명하다. 금지되었기에 욕망의 대상이 된 ‘대상 a'를 통해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주체는 결국 '대상 a'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대상(주체)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그녀에게 금지되었기에 욕망할 수밖에 없는 '대상 a'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때 그/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이 말은 만약 우리가 그/그녀의 ’대상 a‘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 결코 그/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나의 연애사, 연애가 내게 남긴 것들

나는 한때 그저 즐겁고 가벼운 연애가 좋았다. 여자 친구를 만나 심각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었다. 1년을 조금 넘게 만났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양쪽 팔목에는 무엇인가에 긁힌 다섯줄의 꽤 심한 상흔이 있었다. 짐작키에 양손 손톱으로 팔목의 살점이 뜯겨져 나갈 정도로 자해한 흔적 같았다. 짐작만 했을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여자 친구의 아픈 상처를 다시 끄집어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 질문을 하는 순간, 한 없이 심각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나올게 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연애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건, 그녀가 감자탕 보다 파스타를 좋아한다는 것, 바지보다 치마를 좋아한다는 것, 커피는 항상 라떼를 마신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 일상의 취향이나 기호를 아는 것도 분명 그녀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녀를 진정으로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라캉의 이야기처럼 누군가를 안다는 건 그 사람의 ‘대상 a'를 안다는 것이니까.

‘대상 a’는 욕망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금지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금지된 것은 상처라는 사실이다. 나의 '대상 a'는 ‘게으름’이다. 나는 ‘게으름’을 욕망한다. 그건 왜 나의 욕망이 되었을까? 어머니의 금지 때문이었다. 돈벌이가 신통치 않은 남편을 두었기에 생활의 궁핍을 피할 수 없었던 그녀는 항상 짜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아들이 남편을 닮아서였을까? 아들이 조금이라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면, 어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돈 안 되는 만화 보지 말고 공부해!” “자빠져 잘 시간 있으며 나가서 일을 해!” “시키면 뭐든 재깍재깍 바로 해!”

어린 시절 어머니의 ‘게으름’ 금지들은 나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왜 안 그랬을까?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로부터 짜증과 폭언을 들어야 하는 것보다 큰 상처도 많지 않을 테니까. 20대에는 연애를 하면서 어머니의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우울해지고 무거워지는 분위기가 싫어서였다.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무거움과 우울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때도 알았던 것 같다. 나의 '대상 a'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알 것도 같다. 왜 20대 때의 연애가 내 심연의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했는지.

나는 여자 친구의 '대상 a'를 몰랐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 알고 싶지 않았다. 금지된 ‘대상 a'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의 가장 내밀한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우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대상 a'가 남긴 상처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으니까. 돌아보면 그녀에게 미안하고 후회스럽기도 하다. 왜 그녀 팔목의 상흔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텐데.

그녀가 헤어지며 했던 마지막 이야기가 가끔 생각난다. “너랑 함께 있어도 외로워”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고 싶어 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나에게 내보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는 화제를 돌리거나 농담으로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다. 사랑한다는 건, 상대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보이고 싶다는, 그리고 상대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는 욕망이다. 진짜 자신을 내보이고, 상대의 진짜 모습을 아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밀한 상처를 이야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건 분명 사랑이라는 기적적인 감정이 없다면 언감생심 넘볼 수도 없는 일이다.

고백하자.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대상 a'를 알고 싶어 했다. 나의 상처를 알고 싶어 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대상 a'를 내보이고 싶어 했다. 그녀의 상처를 내보이고 싶어 했다. 지금에서야 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말이다. 내가 가볍고 즐겁기만 한 연애를 원했던 건 겁이 많아서였다. 진짜 사랑을 할 용기가 없어서였다. 나의 상처를 내보일 용기도, 상대의 상처를 감당할 용기도 없었다. 그래,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다.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는 아프지만 정확했다. 그녀를 떠나보낸 후에야 다짐한 게 있다. ‘이제 다시는 함께 있어도 외로운 연애는 하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 기꺼이 상대의 ‘대상 a’에 대해 알려고 하고, 나의 '대상 a'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와 이별 뒤, 우연히 그녀가 가진 열 줄의 상흔에 관해 전해 들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다락방에 며칠을 가둬놓고 그녀에게 피아노를 치게 했단다. 어린 그래서 여린 소녀는 어두컴컴한 다락방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두려움과 외로움에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아니 미치고 싶지 않아서 손톱으로 팔목의 살점을 뜯어낼 수밖에 없었던 걸게다.

그 상처가 아마 그녀의 '대상 a'였을 테다. 그녀의 '대상 a'를 알았다면, 나는 그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게다. 그랬다면, 최소한 나와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후회스러운 일은 모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와의 연애가 내게 남긴 것은 진짜 연애는 가볍고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짜 연애는 때로는 한 없이 우울해지고 무거워지는 아픈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가능해진다. 혹여 그녀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미안하다는 이야기와 고맙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싶다. 이제는 마음속에 새겨진 열 줄의 상흔이 잘 치유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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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관심인가요?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 된다는데...
자크 라캉에겐 @sindorimspinoza이 계시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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