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출장 파토 난 이야기

in #kr6 years ago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출장을 가는 걸 상당히 귀찮아 하며 꼭 필요한 출장이 아니면 갈 필요가 없다는 주의임을 분명히 밝힌다. 언론사 출장 중엔 굳이 가는 것보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쓰는 편이 더 나은 기사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아침일찍 일어나 서둘러 강원 춘천시 출장을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던 중 길 위에서 갑작스레 일정이 취소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출장 자체도 싫은데, 그것도 국내 출장이며, 소수의 언론사만 참가하는 불공평한 출장이라 더욱더 싫었다. 싫었던 판에 잘 됐다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출장이 생기게 된 배경과 주최한 회사의 일 진행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 15일 오후 5시에 한 회사가 해외출장 신청을 안내하는 메일을 보냈다. 비용은 출장자 부담이며, 선착순 3명만 데려간단다. 나는 그 메일을 다음날인 16일 오전 8시 30분쯤 확인했다. 대부분의 신문사 마감 직전 혹은 직후인 이 시간에 문자나 휴대전화로 알려 주지 않는 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기자는 별로 없다. 그래서 기업들은 보통 기자들이 주로 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에도 보도자료를 보내면 문자로 알림을 준다.

물론, 15일 오후 5시에 문자나 전화로 알려줬어도 나는 신청할 수 없었을 거다. 신청 마감이 출장비 입금 시점 기준 오전 중이었기 때문이다. 오후 5시에 이메일로 처음 공지를 받고 회사 결제라인을 거쳐 다음날 오전 중으로 출장비를 입금할 수 있는 회사가 언론사 여부를 떠나 한국에 몇 군데나 될까.

물론, 우리 회사가 이렇게 신속하게 의사를 결정해 비용을 입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졌다 해도 나는 출장을 갈 수 없었을 거다. 출장지와 취재 내용이 누가 봐도 관광지에 놀러 가는 코스였기 때문이다. 장소는 괌이요, 기간은 2박 3일, 취재 내용은 현지에서 이 회사가 하는 서비스를 체험하는 거다. 현지에서 이 서비스를 체험할 곳은 "관광지, 쇼핑몰, 식당 등"이란다. 적어도 우리 회사는 이런 휴가일정 같은 출장일정에 120만원을 지급하지 않는다.

기자질 5년만 해 봐도 이런 일 처리 방식과 내용을 보면 이 출장 '견적'이 나온다. 이건 최소한 '내정'이며, 어쩌면 '모의'일 수 있다. 기업이 미리 언론사 3곳을 정해 놓고 출장을 짰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일부 구악 기자들이 기업을 찔러서 출장을 만들어냈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출장 가고 싶은 마음은 1도 없다. 하지만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짰으면 지들끼리 조용히 다녀올 것이지 굳이 형식적인 공지를 했다는 것이다. 다녀와서 출장기사가 나가면 다른 언론사들이 공평성을 두고 문제삼을 게 뻔한 데다 김영란법에도 어긋나니, 겉으로 공평한 모양새를 취했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

이런 경우 개인적으론 침을 뱉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언론사 입장에선 산업부 기자가 출입처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별 쓸 데 없는 물을 먹고 다니는 걸로 보이기 쉽다. 가뜩이나 편집국에서 괄시 받는 산업부인데, 그런 불편한 시선까지 받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엄청난 신청 난도를 뚫고 선정된 3곳을 제외한 모두가 이 출장에 불만을 가졌을 터, 굳이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 기업에서 우리 회사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딱히 상쾌한 상황은 아니라는 점만 정말 젠틀하게 이야기하고 치웠다.

그러나 해당업계 기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논란은, 이 기업 입장에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순 없게 됐다. 그래서 마련한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게 오늘로 예정됐던 강원 춘천 출장. 달래기용이라기보다는 분열용인 것 같다.

내용을 보니 이야기는 안 되지만 그나마 기사 한 줄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비공개 일부만 내정해서 데려가는 불공평한 출장이었다. 신문, 인터넷, 방송 한 곳씩만 데려간다는 것 같은데 하필 우리를 골랐나 보다. 권한이 있었다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팀장이 이미 수락하고 출장자는 나로 결정이 돼 있었다. 그래서 가기 싫었다.

결과적으로 출장은 31일로 미뤄지는 형식을 취해 출장자에게 취소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것도 마음에 안들긴 했지만, 가기 싫은 참에 잘 됐다. 어차피 그날 다른 일정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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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정 후 공지는 뭐하러 하는지 ㅋㅋㅋㅋㅋㅋ 강원랜드 내정자 뽑는것도 아니고...

앵란법에 걸려부니께 ㅋㅋ 공평한 척

언론계도 정말 힘든 곳이군요.

언론계의 출장? 이런것도 있었군요. 흥미롭게 보고 갑니다!ㅎ

출장 많죠. ㅋㅋ 목숨거는 기자도 많습니다.

많이 구리네요~ ㅎㅎㅎ
시호님은 나중에 더 정당하게 잘~~ 대접받는 곳으로 꼭 가세요^^

ㅋㅋㅋ 글 사이사이에 불만이 잔뜩 묻어있는 걸 보셨군요

보이죠~~. 제 삼자인 저도 빈정이 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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