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인 척]트럼프 "北 완전히 파괴" 조간신문 제목 모아 보기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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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을 따라 UN에 간 청와대 출입기자가 어젯밤 늦게 "트럼프가 또다시 말폭탄을 터뜨렸다"고 보고했다. 내용을 들어보니 조간 1면에 갈 것 같았다. 오늘 조간 1면들을 보니 거의 모든 종합일간지가 트럼프의 말을 다루긴 했는데 제목이 각자 미묘하게 달랐다. 오늘은 이와 관련 9개 일간지의 제목들을 살펴보려 한다.

먼저 트럼프의 워딩을 보면,

"The United States has great strength and patience, But if it is forced to defend itself or its allies, we will have no choice but to totally destroy North Korea. Rocket Man is on a suicide mission for himself and for his regime."

안 되는 영어로 직역을 하자면 "미국에겐 대단한 힘과 참을성이 있지만, 만약 미국 자신이나 그 동맹을 방어해야 하게 된다면 우리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다. 로켓맨(김정은)과 그의 정권은 자살미션(상대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스스로를 전멸시키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정도가 되겠다.

정치부 기자로서 워딩을 조금 분석하자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이 엄청나게 자극적이고 기사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앞에 붙은 조건에 의미를 둬야 한다. 미국이나 동맹국을 방어해야 할 경우엔 그렇다는 것이다. 무조건 북한을 완파시키겠다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

그럼 각 종합일간지의 1면을 보자.(가나다순)


경향신문_트럼프 미국 지켜야 한다면 북한 파괴할 수밖에 없다_20170920.png

편집기자 경력자로서, 오늘 가장 정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제목을 달았다고 판단한다. 역시 편집 강자 경향신문. '방어해야 한다면' '방위해야 한다면'이라고 제목을 달 수도 있었는데 쉽게 풀어서 '지켜야 한다면'으로 썼다. 제목은 '짧고 구체적으로' 다는 것이 원칙. 구체적이지만 조금 길다.


국민일보_“북한이 계속 위협하면 완전히 파괴시킬 것”_20170920.png

물론 트럼프의 말 속에 저런 의미가 담겨 있긴 하지만, 국민일보의 제목은 좀 더 자극적이고 과장된 제목이라고 판단한다. 북한의 위협이 계속돼서 미국과 동맹국을 지켜야 한다는 판단이 들면, 그 땐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내용에 비약이 조금 있다.


동아일보_트럼프 “핵위협 계속땐 北 멸망시킬 것”_20170920.png

동아일보는 좀 너무 나갔다. 국민일보는 양반. 제목만 보면 트럼프가 북한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한 것 같다. '완전히 파괴할 것'과 '멸망시킬 것'은 어감이 완전히 다르다. 분노의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고 금방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


서울신문_트럼프 “美 방어해야 한다면 北 완전 파괴”_20170920.png

역시 우리 공장의 제목은 팩트에 충실하다. 편집자 누군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짧으면서 트럼프 워딩의 뉘앙스를 빠뜨리지 않고 담았다. 우리공장이지만 1등 준다.(방금 어젯밤 1면 편집자 확인해 봤는데 의외다)


세계일보_“서울에 중대 위험 없는 대북 군사 옵션 있다”_20170920.png

안타깝다 세계일보. 늦은 밤에 나온 내용을 지면에 담지 못했다. 이게 종이신문의 한계. 특히 우리 공장이나 세계와 같은 마이너 신문은 판매망이 좋지 못해서 메이저들보다 종판 마감시간이 빠르다.


조선일보_美 위협받으면 北 완전 파괴할 수밖에 없다_20170920.png

조선도 나름대로 의역을 해서 제목을 달았다. 이해하기 쉽고 정확하지만 '위협받으면'은 '방어해야 한다면'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상황을 뜻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조금은 과장됐다고 본다. 정확한 제목을 달기 위해 '파괴할 수밖에 없다'를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다 담았다. 이 점은 훌륭하다.


중앙일보_“로켓맨 김정은 미·동맹 위협땐 완전 파멸시킬 것”_20170920.png

의역을 세게 했다. 목적어를 김정은으로 바꿨고 앞에 로켓맨을 붙였다. 또 여기선 파괴가 아니라 파멸이다. 오늘 조간 중 가장 자극적인 제목. 많은 국민이 안보 상황을 걱정하고 궁금해하는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제목으로 할 때는 최대한 발언 취지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배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중앙일보의 제목을 꼴찌에 두겠다. 상품성을 위해서 내용을 무시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유일하게 '동맹'을 넣었다. 다른 모든 종합지가 생략했지만 트럼프가 '동맹'을 함께 언급한 것에도 의미를 둘 수 있다.


한겨레신문_트럼프 “로켓맨 김정은 자살행위…미 위협받으면 북 완전히 파괴할 것”_20170920.png

중앙일보 편집자는 자신의 의도를 살리고 싶으면 이런 제목을 달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한겨레의 제목은 로켓맨 김정은도 들어갔고, 나름 내용도 정확하게 담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선보다 덜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파괴할 것'은 '파괴할 수밖에 없다'보다 훨씬 적극적인 의사를 담고 있다. 제목 글자수를 줄이기 위해 정확성을 떨어뜨렸다고 본다.


한국일보_트럼프 “ 美 방어할 상황 되면 北 파괴할 것”_20170920.png

한국일보 제목도 길이와 내용 면에서 훌륭하다. 서울신문과 비슷한 글자수에 비슷한 정확도를 가졌지만 '파괴할 것'보다 '완전파괴'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파괴할 것이라고 하면 '완전'이 빠졌을 뿐더러 트럼프가 표시하지 않은 적극적인 의사를 담은 게 된다.


제목은 기사보다 많이 읽힌다. 기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지만, 기왕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기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목은 시와 같아서 '시적 허용'과 같이 길이나 리듬감을 위해 약간 정확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런 생략과 변형 과정에서 신문사나 편집자의 의도가 슬쩍 드러난다. 우리가 오늘 같은 내용을 다룬 여러개의 제목들을 보며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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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많은 사람들이 이 포스팅에 관심을 갖고 있나봐요!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여러 개를 비교해서 보니 재미있네요. 대학 강의 듣는 거 같아요. ㅎㅎ

헑 대학 강의처럼 재미없었다면 죄송합니다 ㅡㅜ

ㅎㅎㅎㅎ 아니에요. 재미있었어요.
실은 제 전공이 신방과라 예전 전공수업 생각난다는 뜻이었어요. :)

아이고 저도... 복수전공 신방... 이해합니다

정말 좋은 포스팅입니다.
이런게 소위이야기하는 편집자의 의도인가요?
재미있습니다.

ㅋㅋ 고맙습니다. 사실상 1면 제목은 1면 편집기자가 단다기보단 편집국장(=편집인)과 편집부장이 머리를 맞대고 단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편집자의 의도 맞죠.

제목 하나만으로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그래서 제목이 중요하죠. 기사의 모든 것을 한줄로 담아야 하니까요.

각 신문별 비교 잘 보았습니다.
역시나 자극적인 제목을 다는 신문도 보이고.. ㅎㅎ

트럼프가 중국이 있는 자리(유엔총회)에서 저런 연설을 했다는 것은 선전포고로 비춰질 수도 있을텐데요.
북한 입장에서는 머리가 복잡할 것 같습니다.

정은이는 지금까지 하던대로 마이웨이 할 것 같아요. 빨리 완성해서 핵보유국 선언해야 미국이 "자 앉아봐. 얘기 좀 하자" 하겠죠?

정말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가오는 정도가 많이 다르군요.
앞으로 큰 이슈가 있을때마다 언론사별로 찾아볼것 같아요ㅎㅎ

ㅋㅋㅋ 그거 재밌어요. 물론 저 편집 때처럼 일이라면 다른 문제지만.

메인뉴스야 거기서 거기지하며 눈에 잡히는대로 뉴스를 받아들이던 저같은 사람에겐 꽤 신선한 분석글이네요.
언론사마다의 미묘한 어감 차이를 짚어가며 읽는 재미를 알아가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

고맙습니다. 가끔 이런 글도 괜찮은 것 같네요. 종종 써 보겠습니다.

시호기자님 안녕하세요
오늘 덕분에 각 신문사의 성격을 들여다볼 수 있었네요
감사한 포스팅입니다 :D

안녕하세요. ㅋㅋ 아침에 출근하면서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해봤는데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지요.
문제아들의 말폭탄입니다만 위험이 실존한다는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위험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죠.

평소 신문을 한 부도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으로서 몇종류의 신문의 기사 제목을 비교해보는 것이 참 신선하네요 :) 조선일보가 조금 의외...군요 ㅋㅋㅋㅋ 역시 뛰어난 기자들이 많아서 일까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저도 한부를 제대로 읽진 않습니다.) ㅋㅋ 조선일보는 뛰어난 기자들이 많죠. 각 사의 뛰어난 사람들을 스카웃하기도 잘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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