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민관의 두 사람

in #kr8 years ago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의 두 사람

지금의 서울시 의회로 쓰이고 있는 시청앞의 오래된 건물은 그 나이만큼의 사연도 많다. 원래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다목적 회관으로 1800석 규모의 예술 극장 ‘부민관’이었고, 미군이 접수했다가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되었으며 다시 시민회관이 되어 세종문화회관 별관이 되었다가 지방자치제 선거 이후 서울시 의회로 쓰이고 있다. 1945년 7월 24일 이 건물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듯한 폭음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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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부민관에서는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조선, 일본, 만주, 중국 등지에서 집결한 친일파들이 모여 ‘백인들의 제국주의에 대항한 아시아 민족의 분격’을 열띠게 떠들고 있는데 공사장 발파용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사제폭탄 두 방이 터진 것이다.

1945년 즈음 “일본이 그리 쉽게 항복할 줄은 몰랐다. 일제 통치가 수백년은 더 갈 줄 알았다.” 고 생각한 것은 시인 서정주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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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이다 정신대다 조선어 말살이다 일제의 광분은 극에 달해 있었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숨죽여 지하로 스며든지 오래였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광복절 노래 중) 들 태반은 일찌감치 징용 나가라고 피를 토하거나 조선인 지원병들에게 무운장구를 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본의 패망이 분명해가던 무렵 조선의 어둠은 극에 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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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의거는 그 암담함에 대고 “조선은 살아 있다.”고 횃불을 쳐든 격이었다. 일제 또한 충격이 컸다. 일제는 이 사건에 대해 일체의 보도관제를 시행했고 지금도 의거의 결과와 막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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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후세의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게 됐고, 이 사건은 일제 시대를 다룬 많은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단골로 등장한다. 전설적인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도 이 사건이 나오고, 박용우 주연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이 부민관 의거를 영화의 축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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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이 의거자들에게 폭탄을 건네는 매우 창조적인 허구가 출몰하기도 한다. 의거자들의 폭탄이 김두한이 이끌던 ‘근로보국대’ 공사장에서 흘러나온 것이긴 했다지만 김두한이 이 의거에 개입한 증거나 증언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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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민관 의거의 최대 목표물 중의 하나는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 친일파 박춘금이었다. 하지만 원통하게도 폭탄 세례는 그를 비껴가고 말았다. 박춘금은 원래 일본 내 조선 사회를 누비고 다니던 깡패였다.

‘상애회’를 결성하여 조선인 노동자들의 ‘공존공영’을 표방했으나 그 정체란 사측에 서서 조선인들을 압박하고 폭력을 휘둘렀던 일종의 ‘구사대’였다. 관동 대지진의 태풍이 지나간 후 박춘금은 조선인 노동자 3백명으로 구성된 노동봉사대를 결성한다.

그들은 일본인들의 광기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시체를 처리하고 생존한 조선인들의 동요를 위압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 일로 일제의 환심을 산 박춘금은 상애회 지부를 조선에까지 설치하고 조선과 일본 양쪽에 양다리를 걸친 폭력 조직의 대부가 된다.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동아일보 김성수 사장을 불러 폭행한 것도 그였고,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이었던 하의도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소작쟁의에 투입됐던 그 시대의 ‘용역’도 그 패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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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성은 일제의 환심을 샀고 그는 자신의 폭력 조직과 그를 통해 벌어들인 재산을 배경으로 일본 중의원에 출마, 당선된다. 아마도 식민지 조선인으로서는 애초 나라를 팔아먹었던 고관대작과 왕족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큰 출세를 한 조선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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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내내 “미영격멸”과 “내선단결”을 악쓰고 다녔던 그는 ‘대의당’을 조직했는데 이 단체가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 개최된 “아세아 민족 분격 대회”의 주체였다. 폭탄을 피해 살아남은 그는 해방 뒤 반민특위의 공적 1호로 지목되었지만 용케도 일본으로 도피했고 그 이후에는 되레 재일거류민단 중앙지부 고문과 일한문화교류협회 상임고문 명함을 달고 그럴듯한 삶을 살다가 편안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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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부민관에서 박춘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주먹을 쥐었을 한 사람이 있다. 조문기.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됐을 때 조문기는 보통학교 4학년생이었다. 출정하는 일본군을 열렬히 환영한 뒤 일장기를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대한제국의 옛 관료였던 할아버지에게서 벼락을 맞는다. “지금 네가 뭘 들고 있는지 아느냐?” 그날 밤 그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임을 깨닫는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는 열 여덟의 나이로 평생의 동지가 된 유만수 등과 조선인 노동자 파업을 주도했고 그 후 암약을 거듭하다가 1945년 박춘금 이하 친일파들의 심장을 노리고 폭탄을 터뜨리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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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해방은 그가 원하던 해방이 아니었다. “친일파의 해방이요 친일파의 독립”일 뿐이었다. 일제도 체포하지 못했던 그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인민청년군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것은 물론 전쟁 후 유랑극단의 배우로 고단한 삶을 꾸려가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1959년 이승만 암살 음모에 턱없이 연루되어 체포, 일제 경찰의 충실한 계승자 한국 경찰의 고문에 허리가 상하는 고통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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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친일파들이 우글거리는 단상을 단하의 독립운동가들이 올려다보는” 정부의 각종 기념 행사에 대한 참석을 평생 동안 거부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생의 불꽃을 하얗게 태운 일은 ‘친일파 인명사전’ 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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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제 2의 독립운동이며, 민족사의 당면과제다......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만의 역사가 아니다.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그러기에 나는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멈출 수 없다. 그러다 죽으면 선배열사들에게 가서 보고할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고 왔노라고.” 라는 그의 말은 그 일생을 돌이켜볼 때 그지없이 애달프고 아프도록 비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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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는 또 하나의 ‘해방’과도 같았을 친일인명사전 발간 직전 유명을 달리한다.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 조우한 두 사람은 그렇게 살다가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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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후손들도 이 멱사를 잊지 않길 바랍니다.

또한 잊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아픈 역사에 대해 한가지 배워가네요

감사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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