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개봉, 그리고 단성사의 역사 1

in #kr7 years ago

1993년 4월 10일 서편제 개봉과 단성사의 역사 1

1990년을 전후하여 부활의 기지개를 편 한국 영화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생산했는데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등 독재 정권 시절에는 상상도 못하던 소재들이 영 화화되어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즈음 빨치산의 자식으로서 분단과 그로 인한 상처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던 임권택 감독이 주목한 것은 <태백산맥>이었다. 그러나 이 10권짜리 대하 소설을 두어 시간짜리 영화로 녹여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시나리오 작업도 엎치락뒤치락 시간을 한없이 잡아먹었다. 그 와중에 임권택 감독은 또 한 번 ‘쉬어가는 작품’으로 다른 영화에 손을 댄다. 그것이 <서편제>였다. 이 서편제가 1993년 4월 10일 개봉된다.

.
판소리에 미친 판소리꾼과 그가 거느린 두 의붓 남매가 풀어놓는 고름같은 사연들과 그를 휩싸고 도는 그림 같은 풍경, 그리고 그 하늘과 땅 위에 울리는 낭랑한 사설로 기억되는 영화 <서편제>는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야 이놈아, 쌀 나오고 밥 나와야만 소리 하냐. 지 소리에 지가 미쳐서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더 좋은 것이 이 소리 속판이야.”라고 을러내는 아버지는 득음(得音)을 위해 그 딸의 눈을 멀게 하고 일찍 아버지를 떠나 버린 아들은 수십 년 세월을 돌아 눈먼 누이와 마주하는 기구한 스토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의 소문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
장기상영되는 와중에 간판의 그림 색채가 햇빛에 바래자 급히 화공을 불러 간판을 덧칠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서편제>는 오래도록 단성사 간판을 장악했고 급기야 단성사 단관에서만 113만 4천여명이라는 그야말로 기록적인 기록을 세워 버리고 말았다. 한국영화 90년 이래 최대의 이변이자 경사였다.

.
1300만 관객 운운하는 요즘 시대에 비춰 보면 우스울지 모르나 곰곰 .생각해 보자. 단성사는 만원사례를 이뤄야 수백 명 정도의 극장이었고 하루 6회 상영이 고작이었다. 그런 시스템에서 100만을 넘긴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매회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삼켰다가 눈물범벅이 된 사람들을 토해내면서 극장 단성사는 대한제국 시절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웠던 동대문 시장 상인들부터 지배인 박승필, 영화감독 나운규, 깡패 김두한 등등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서편제 개봉일을 맞아 단성사의 기나긴 역사를 한 번돌아다보자.
.

우리는 개국의 시기를 놓쳐 근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끝내 외국의 식민지가 된 불행한 근대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종 황제는 요즘 한국인들 못지 않게 커피를 즐겼고 전깃불을 본 조선 사신들은 미국 전기 회사에 찾아가 조선에 전깃불을 켜게 도와 달라고 졸랐다. 20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괄목할만큼 성장한 영화도 다르지 않았다. 1903년께에는 벌써 ‘활동사진’들이 서울 곳곳에서 상영되면서 사람들의 넋을 빼앗고 있었으니 말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게 1895년이었는데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을 지나 조선에 상륙해 있었던 것이다.
.

1907년 6월 얼마 전만 해도 좌포도청의 서슬이 시퍼렇게 좌정하고 있던 종로 3가에 번듯한 2층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동대문시장의 거상이었던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이 합심하여 세운 이 건물의 이름은 ‘단성사’(團成社 ). “단결하여 뜻을 이루자.”는 뜻으로 이 이름은 한국 영화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된다. 하지만 단성사 그 자체의 설립 목적은 일단 영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단성사는 퇴물 기생 (그래봐야 나이 스물 갓 넘은 이들이었지만)들의 공연장으로 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판소리부터 서양 노래, 만담부터 모창 등 일종의 개인기까지, 단성사 무대에 선 사연 많은 기생들의 공연은 뭇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끌어모았다. 어쩌면 그들은 최초의 근대적 ‘연예인’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러던 단성사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설립 이후로 10년이 넘어 지나서였다. 여기서 우리는 박승필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꽤 뛰어난 수완의 기획, 연출가였다. 일찍이 광무대라는 극장을 열고 전국의 명창들을 불러 모으는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던 그는 1917년, 단성사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으로부터 단성사를 인수하고 이를 신극(新劇)과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키워 나간다.

우선 박승필이 주목한 것은 ‘연쇄극’이었다. 연쇄극이란 극 와중에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무대에서 실현하기 불가능한 장면을 필름으로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즉 연극의 자료 화면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항상 외국 풍경 일색이던 활동사진의 영상 속에 오늘 아침에도 지나갔던 요릿집 명월관이나 장충단 공원이 등장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실로 새롭고도 신기한 체험이었다.
.
그 대표적인 것이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의리적 구토>였다. 비록 연극과 뒤섞인 활동사진이었을망정 조선인이 찍은 영상이 조선인의 극장에서 구현된 최초의 사례였다. 1962년 공보처는 이 역사적인 날을 ‘영화의 날’로 삼았고 이후로도 이 날은 영화인의 축제 대종상이 열리는 날로 두고두고 기억된다.
.
<의리적 구토> 등으로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고 기세등등한 박승필이었지만 곧 부아가 치미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 고전 <춘향전>이 일본인 감독 하야가와 마쓰지로의 손으로 영화화되어 상영된 것이다(1923). 일찍이 광문사 시절에 전국 순회 공연을 하던 중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단원들과 땅을 치고 울었던 기억이 선연한 그로서는 보통 떨떠름한 일이 아니었다.

왜 춘향전을 왜놈의 자식이 감독하고 난리란 말인가. 거기다 입장료는 다른 공연의 몇 배인 1원을 받아도 조선 사람들은 꾸역꾸역 줄을 서는 것이 아닌가. 줄을 서는 정도가 아니라 단 8일만에 1만명을 돌파하는 대 흥행기록을 세우는 지경에 이르자 박승필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씩씩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배알도 없는 사람들아. <춘향전>은 조선 총독부가 개최한 부업공진회 (박람회 격의 행사) 에 때맞춰 만든 거란 말이다!” 그는 당장 단성사에 ‘영화 제작부’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
하지만 박승필은 사업가일 뿐, 프로듀서나 촬영 감독이 아니었다. 여기서 당시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이 등장한다. 그는 극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설랑 일본에 가서 촬영 기사로 일하다가 관동 대지진을 만나 조선으로 돌아와 있던 촬영 기사 이필우를 염두에 두었다. 이필우는 오케이를 했지만 박승필은 역시 사업가, 검증 안된 찰영 기사에게 투자할 생각이 없었고 그는 일단 이필우에게 동아일보 주최 정구 대회를 한 번 촬영해 와 보라고 한다. 이필우가 촬영해 온 필름을 보고서야 박승필은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본격 영화가 크랭크인된 것이다. 무슨 내용의 영화였을까? 애들이 보기에는 좀 내용이 잔인하고 슬픈 동화임에도 예나 지금이나 끈질기게 요즘 애들에게도 보여지는 ‘전래동화’ <장화홍련전>이었다.

단성사 전속 성우 최병룡과 우정식이 장쇠 역과 사또 역을 맡았고 장화와 홍련 역에는 광무대에서 활동하던 김옥희와 김설자, 그 외 배역 역시 단성사 직원들이 각각 담당했다. 로케이션 장소는 지금도 고려대 앞에 있는 개운사 (당시는 영도사)였다. 그때만 해도 한적한 교외(?)였을 이 절에서 배우들은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촬영을 했다. 최종 완성된 필름은 총 8권 분량으로 영사시간만 2시간가량이었다. 이 영화는 당연히 단성사에서 1924년 9월 5일 개봉된다. "평소 10전하던 관람료를 50전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관객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평일 주야로 2회 상영에 9일간 장기 상영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2932


.
그러나 이 <장화홍련>의 성공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2년 후인 1926년 10월 1일이 왔다. 이 날은 경복궁 앞에 떡 하니 괴물처럼 버티고 선 조선 총독부 건물이 준공식을 가지는 날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해방된 한국의 중앙청과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그 우람한 건물이 들어서고 성장(盛裝)을 한 일본인들이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면서 조선 총독부의 새 보금자리를 경하하고 있었을 무렵, 그곳으로부터 걸어서 20분인 단성사에서는 또 다른 인파가 몰리고 있었다.

함경북도 회령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도 했고 독립군 부대를 찾아나섰으나 “학생들은 총 들고 싸울 게 아니라 공부로 애국하시오.”라는 나이 든 독립군의 충고를 듣고 발걸음을 돌렸던 한 청년이 바야흐로 영화 하나를 만들어 막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이 “불순한 내용이 있다.” 하여 이 영화의 전단지를 죄다 압수해 버린 사건은 훌륭한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서울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청년이 영화 감독과 주연과 각본을 도맡아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까지 쳐 버린 이 영화는 이후 한국 영화사, 아니 남과 북을 통틀어 표현한다면 ‘민족 영화사’에서 일종의 시조(始祖)로서 떠받들어지는 존재가 된다. 청년의 이름은 나운규, 영화의 제목은 <아리랑>이었다.
.

영화의 시작은 ‘아리랑’ 주제가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스크린에는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이 깔리고 그 위로 유장한 변사의 나레이션이 흘렀다. “경성에서 철학공부를 하다 만세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이 있었으니…” 왜 그 청년이 미쳐 버린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조선 사람은 없었다. 7년 전의 기미독립선언 이후 전국을 휩쓴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정신줄 놓아 버린 이웃들의 사연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된 종기처럼 돋아 있었고, 그들은 삽시간에 영화에 몰입했다.

광인 청년과 그의 여동생, 여동생을 탐내는 부잣집 마름, 그리고 광인의 친구 등이 엮어 내는 사연은 영화이면서 현실이었고 허구이면서 진실이었다. 광인 청년은 여동생에게 달려드는 마름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는데 그제야 실성에 벗어나 본 모습을 되찾는다. 자신이 한 일을 깨달은 청년의 비장한 한 마디. “여러분 울지들 마십시오. 이 몸은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인 것이올시다.” 순사에 끌려 고개를 넘어가는 그에게 마을 주민들은 구슬프게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배웅한다. 이 영화로 단성사에서는 대폭발이 일어난다.

개봉 직후보다는 점차 입소문 덕에 흥행몰이를 한 <아리랑>은 급기야 기마경찰이 동원되어 아우성치는 관객들을 통제해야 할 만큼의 인파에 직면했다. 극장 유리창이 깨져 나갔고 영화를 한 번 본 사람들도 또 다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나운규 자신의 말에서 그 이유를 캐 볼 수 있다. “.... 이 한편에는 자랑할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가득 담아놓는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었다’ 민족성이라 할까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나운규, 한길사) - 나운규 ‘아리랑과 사회와 나’ - 삼천리 (1930.7)


.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윤도현의 시원스런 목소리로 울려 퍼졌던 ‘아리랑’, 남북 단일팀이 결성되면 으레 ‘국가’(國歌)로도 불리워지는 노래 ‘아리랑’이 한국인들의 귀를 파고들기 시작한 곳도 단성사였다. 사실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불러온 민요라기보다는 아이 영화의 주제가격으로 ‘창조’된 노래였다. 하지만 없는 아리랑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다. 역시 나운규의 회고를 들어보자.
.
“내가 지었습니다. 나는 국경 회령이 고향으로 내가 어린 소학교 때에 청진에서 회령까지 철도를 놓기 시작했는데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러다가 서울 올라와서 나는 이 아리랑 노래를 찾았지요. 그때는 민요로는 겨우 ‘강원도 아리랑’이 간혹 들릴 뿐으로 도무지 찾아 들을 길 없더군요. 기생들도 아는 이 없고 명창들도 즐겨 부르지 않고.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
나운규 작사 작곡이라 할 만한 이 아리랑을 단성사 음악대가 끄적인 악보를 들고 불렀던 이는 단성사 소속 가수였던 이정숙이다. 한국 영화사 최초의 영화 음악 주제가라 할 ‘낙화유수’를 영화가 상영되는 무대 아래에서 불렀던 그녀는 ‘아리랑’이 상영될 때에도 무대 아래에서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영화 ‘아리랑’ 주연 여배우였던 신일선의 회고) “문전옥답은 어디를 가고 쪽박 살림살이가 웬말인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구슬프게 목을 꺾으며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관중들은 엉엉 울기 일쑤였고 드물게는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는 목청도 있어 임석경관 (당시 극장에는 경찰관 전용석이 있었다)을 바쁘게 만들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금자탑이 서고 그 후로 한국인 모두의 노래가 되어 버린 노래의 산실이 된 곳. 그곳이 단성사였던 것이다.

(이후 계속)

Sort:  

한국영화 초창기의 필름들이 소실되어 없다니 참 아쉽네요. 미시사부터 거시사까지 역사 시리즈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리즈 2,3도 재밌게 읽으셨길 ^^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3
JST 0.078
BTC 62741.70
ETH 1659.93
USDT 1.00
SBD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