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사랑과 전쟁 1

in #kr4 years ago

톨스토이의 사랑과 전쟁 1

저의 문학적 자산의 기본 베이스는,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태반을 차지하는 건 뭐니뭐니해도 초등학교 시절 ‘국민서관’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던 60권짜리 세계 문학 전집이 아닐까 합니다. 그 60권째를 완독하던 날의 뿌듯함은 생생히 추억의 장 한쪽을 빛내고 있지요. 이사를 가고 살림이 들고 나면서 수십 년도 더 전에 폐품 더미 속으로 사라졌을 테지만 그때 그 책들 모두에는 제 어린 날의 손때와 감흥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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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집이 소개한 작가 가운데 레프 톨스토이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세계 명작이니 불륜과 격정이 난무하는 <안나 카레니나> 류는 아니었고 <톨스토이 동화>라는 제목으로 ‘바보 이반’이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류의 동화들을 수록하고 있었지요. 톨스토이가 중년 이후 빠져들었던 기독교적 세계관이 흠뻑 배어든 이야기들이었는데 그 깊은 내용은 잘 모르는 동심의 입장에서도 참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는 후일 머리가 굵어진 뒤에는 <전쟁과 평화>니 <안나 카레니나>니 <부활>이니 하는 그의 작품들을 기꺼이 읽는 계기가 됐지요. 톨스토이의 문학 세계를 논하자는 건 아니니 그의 소설들에 대한 감상은 늘어놓지 않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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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1월 7일 톨스토이는 휘황한 대저택의 침실에서가 아니라 우랄 철도의 작은 역, 아스타포보 역장 관사의 침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객사(客死)였죠. 놀랍게도 세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가출 중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나를 찾지 말라”는 편지를 쓰고 집을 빠져나온 그는 아내가 자신을 찾아내는 것을 피하려 3등 완행열차를 타고 다니는 등 일종의 밀행을 거듭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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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러시아가 좀 드넓은 땅덩이입니까. 의사가 동반하긴 했으나 여든 두 살 귀족 노인이 감당하기에 여행은 길었고 3등칸의 불결한 환경은 건강을 해쳤지요. 톨스토이 상태가 심각해지자 일행은 가장 가까운 역이었던 아스타포보에서 하차합니다. 역장 이반 오졸린은 고열에 시달리는 노인을 보고 기절초풍을 했지요.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톨스토이 백작님 아니십니까.” 그는 자신의 관사로 톨스토이를 모시게 됩니다.

러시아의 시골 역이었던 아스타포보는 일약 세계적 뉴스의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톨스토이 가출 후 여행 중 중태!” “가출 이유는 가정 불화 때문?” ‘썬데이 모스크바’ 쯤 될 선정성 짙은 싸구려 잡지들 기자부터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프랑스 뉴스 영화 촬영팀까지 와글와글 헐레벌떡 아스타포보로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아내 소피아를 비롯한 톨스토이의 가족들도 달려왔지요. 그러나 그녀는 톨스토이를 바로 만나지 못했고 톨스토이가 혼수상태에 빠진 뒤에야 남편 곁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언’이라고 할 추종자들이 그녀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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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톨스토이의 동성애 상대로 의심할 정도로 굳게 맺어져 있었던 체르트코프를 비롯한 ‘톨스토이언’ 즉 톨스토이 신봉자들은 소피아를 거룩한 남편의 뜻을 거부하고 핍박한 끝에 남편으로 하여금 가출을 선택케 한 악처로 규정하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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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세계 몇대 무엇무엇을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세계 역사상 3대 악처로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테페,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와 함께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를 들기도 합니다. 글쎄요. 하지만 저는 이 세 여인 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크산테페는 자신이 신경질을 부리고 물바가지를 퍼부은 건 사실이지만, 결혼 생활 내내 소크라테스가 돈 한 번 제대로 벌어온 적이 있었느냐고, 생계를 고민하며 일해 본 적이 한 번일도 있느냐고 하소연하겠지요.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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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악처지요? 모차르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건 남편을 잃은 슬픔과 병이 겹쳐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모차르트는 나와의 결혼 생활 중에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어요. 재혼했다고 뭐라 하지만 내가 재혼한 건 모차르트가 죽은 뒤 18년이 지나서였다고요. 내 두 번째 남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지요. ‘모차르트의 미망인의 남편’. 무슨 근거로 나더러 악처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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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소피아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모르긴 해도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악처라는 말을 부인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정말 톨스토이라는 거인하고 사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쉽지 않았어요. 그를 사랑했지만 그와의 사랑은 너무 힘겨웠어요. 그러다보니 나 역시 그를 힘겹게 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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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나이 서른 네 살에 18세의 친구였던 독일계 의사 베르스의 딸을 아내로 맞습니다. 베르스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그 맏딸은 톨스토이가 자신에게 청혼해 올 거라고 믿고 있었고, 톨스토이를 매혹시킨 건 막내딸 쪽이어서 그녀는 후일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나타샤의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톨스토이가 청혼한 사람은 둘째 소피아였습니다. 어떤 이는 소피아가 “사교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지만 톨스토이가 갈구하던 성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여인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건 톨스토이는 소피아와 함께 파란 많고 격렬하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결혼 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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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에서야 그럴 수 없이 달콤했겠지요. 아내의 동생을 모델로 한 캐릭터이긴 해도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가 묘사한 나타샤의 무도회 데뷔 풍경은 톨스토이의 신혼 기분을 너끈히 상상하게 해 줍니다. “공단 무도화를 신은 나타샤의 귀여운 발은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민첩하고 경쾌하게 움직였으며 얼굴은 행복의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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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어린 신부에게 톨스토이는 엄청난 문서를 내밉니다. 톨스토이는 평생 일기를 썼는데 그 기록 속에는 톨스토이 자신의 젊은 날의 방황과 유혹과 범죄에 가까운, 아니 솔직히 범죄 이상의 실수들이 장황하고 리얼하게 나열돼 있었으니까요. 톨스토이처럼 육체의 활력을 잘 묘사한 작가도 드물다는 평이니 얼마나 그 농도가 짙고도 노골적이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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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가를 드나든 것은 주요한 얘깃거리도 못됐습니다. 다양한 여성편력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소피아를 공황 상태에 빠뜨린 건 한 농노 여자와의 ‘사랑’이었지요. 톨스토이는 1858년 5월 13일의 일기에서 “사랑에 빠졌다. 이런 사랑은 생전 처음이다.”고 감격에 겨워 부르짖었는데 그 상대는 결혼한 농노 악시냐였고, 악시냐는 소피아 앞에서 걸레질도 하고 짐도 나르면서 범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경악합니다 “저런 여자와 생전 처음 사랑에 빠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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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이렇게 아내에게 깨끗이 고백을 하는 것이 과거에 대한 단절이자 자신의 아내에게 과거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자세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죠. 자신의 속이 후련해질지는 몰라도 남의 가슴이 감자를 씹지도 않고 삼킨 듯 답답하게 되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부인이 “이거 뭐예요?”라며 남편에게 재발방지를 요청했을 때 톨스토이는 실로 대문호다운 절묘한 맹세(?)를 합니다.

“앞으로 내가 스스로 만들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을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영지에 여자를 들이지 않겠소."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아주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바람을 피우지 않겠소.”라는 얘기인데.

2편에 계속

신간 소개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또 조금이라도 덜 외롭게 하기 위해서, 용기를 주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죽음 앞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고 시들지 않는 에너지가 평범한 사람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증좌들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의 탐욕과 무능이 낳은 지옥의 흑막을 뚫는 미세한 빛 구멍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대개 사람이 재앙을 만들지만 사랑은 재앙을 이깁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9945000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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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궁금하게 여긴 이야기네요...
이런 걸 어디서 찾으시는지 신기합니다. 2편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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