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상순 형사(?) 를 추억하며

in #kr6 years ago

며칠 전 8월 25일이 그의 기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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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좋은 것이다. 인생이란 술자리에서 추억이라는 안주가 없으면 얼마나 밋밋할 것인가. 세월이 가면서 그렇게 기름진 추억의 대상이 될 사람이 문득 세상을 떠나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지 않다는 현실은 어쩔 수 없으나 씁쓸하며 피할 수 없으나 안타깝다. 어제 들려온 탤런트 김상순씨의 부음을 들으며 마음이 헛헛해 온 것도 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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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또 적잖은 것을 앗아갔다. ‘보는 스포츠’ 매니아였던 나에게 “전두환의 우민 정책 3S 정책! (근데 이거 맞는 얘긴가?)”을 윽박지르며 프로야구와 축구와 농구의 즐거움을 잊게 했고 만만찮은 테돌이, 즉 텔레비전돌이였던 나를 술자리에 빠뜨리면서 브라운관과도 멀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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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탤런트 김상순씨가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타이틀 롤을 맡은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황놀부’라는 캐릭터는 들었으나 그 에피소드나 출연자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나에게 김상순씨는 그저 <수사반장>의 김형사였다. 내 뇌가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어린 시절 기억의 벼랑 끝 나뭇가지는 바로 <수사반장>의 흑백 화면이었다. 김상순씨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어린 처지에 반장 역할을 맡아 염색에 주름살까지 그려야 했다는 박 반장 (최불암) 아저씨와 딱 봐도 무서운 떡대 아저씨 조경환 형사, 미남 남성훈 형사 등의 모습은 내 유년 시절을 추억하는 길머리의 평상처럼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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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반장김형사.jpg

최불암 아저씨가 연기한 박 반장이야 새삼 길게 말할 것이 없고 드라마 <수사반장>의 캐릭터들은 리얼리티가 넘쳐났다. 결정적으로 잘생긴 형사와 미녀 기자가 나와서 결국 ‘경찰이 연애하는 드라마’가 되는 요즘 형사물이 아니라 정말 경찰서에서 특별 지원 나온 것 같은 탤런트들이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런 연기를 펼쳤다. ‘형사’가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직종으로 떠올랐던 것도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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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김상순 형사의 캐릭터는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조경환 형사가 그 덩치로 범죄자들을 일거에 제압하고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분위기를 다잡는 식이었다면 김상순 형사는 그렇게 바짝 쫄은 범죄자 어깨 두드리면서 “야 야 설렁탕 식어. 먹고 하자 먹고 해.” 하면서 자기가 먼저 설렁탕 사리 후루룩거릴 듯한 배역이었다고 할까. 입을 다문 범인에 대한 인간적인 호소는 항상 그의 몫이었던 기억이 난다. “야 일은 같이 저질러 놓고 너만 잡혀 왔잖아. 억울하지 않냐? 나 같으면 미쳐 버리겠다. 야.” 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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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왕년의 수사반장 동료들과 함께 출연한 토크쇼에서 그는 유독 말이 많았다. 수사반장 한 회의 스토리를 좔좔 읊은 뒤 “그때 내가 말이야!”라고 덧붙이는 식으로. 그래서 조경환 형사에게 면박도 듣고 그 장구한 이야기가 편집되기도 했지만 나는 그 모습에서 왕년의 김상순 형사의 모습을 봤다. 수사반장 형사 가운데 가장 말이 많았던. 냉철과 정확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고 범인 앞에서도 무서운 형사보다는 진심으로 그 처지에 애석해 하는 동네 아저씨 같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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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만년 주임이었다. 수사반장은 언제나 최불암이었기에 ‘상병 말호봉’으로 수사반장 20년을 보냈다고나 할까.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는 ‘반장’ 타이틀 한 번을 그렇게 감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도 그를 배려했는지 수사반장 마지막 회에서 최불암을 다른 서로 전근시키면서 김주임에게 반장 자리를 맡긴다. 박반장은 짐을 싸면서 도열해 서 있는 부하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김 주임에게 이제 이 자리는 당신 자리라면서 한 번 앉아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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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 형사는 “무슨 말씀을!” 하면서 그 자리에 앉지 못한다. 대본을 본 김상순 형사 “야 작가 너무한다! 감독님. 나 불 꺼진 사무실에 응? 돌아와서 응? 한 번 자리에 앉아서 천정 보는 걸 응? 엔딩으루 가면 안될까 응?” 하면서 투덜거렸을 것도 같다.

김상순.jpg

앞서 말한 토크쇼에서 김상순 형사는 이대근의 출세기(?)를 밝힌 바 있다. 이대근이 수사반장에서 일종의 ‘의적’으로 등장한 바 있는데 다음날 고 신상옥 감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한다. “야 걔 데리고 와 봐.” 그게 이대근의 영화 데뷔의 계기가 됐고 덩달아 김상순 형사도 신상옥 감독 영화에 시리즈로 출연했다고 한다. 그것도 5편씩이나. 신상옥 감독의 호출을 받고 찾아가던 이대근과 김상순의 버디 무비같은 장면을 상상하면 슬몃 웃음이 난다.
“형님. 와 떨리는데요., 신상옥 감독님이라니. 이거 참..... ”
“야 뭐 신상옥 감독이 무슨 신이냐. 떨리기는.... 괜찮아 괜찮아. 근데 담배 있냐?” 그리고는 잠바떼기 걸치고 까치머리를 하고설랑 휘적휘적 앞장서 걷고 이대근이 쭈뼛쭈볏 그 뒤를 따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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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반장>에서 그는 참 빛나는 조연이었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조경환 형사나 남성훈 형사도 그랬지만 박 반장의 바바리 코트는 그들이 있었기에 더 기억 속에 찬란할 수 있었고 추억 속의 별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 약방의 감초같은 명 조연들도 훌륭하지만 그렇게 드러나지도 않으면서 구성의 곳곳에 틀어박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빛내고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가던 조연들이 과거에는 참 많았다. 스타는 못되었지만 훌륭한 배우는 됐고 연기를 통해 인생을 가르쳐 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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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반장의 기억 중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장면은 한 살인범을 체포한 뒤의 모습이었다. 살인범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데이트하던 남녀가 불량배들의 습격을 받는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도망갔던지, 빌었던지 하여간 혼자 무사했고 여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이에 한맺힌 남자는 깡패들을 기어이 찾아내 그들을 죽인다. 남자를 체포하는 수사반장. 그때 남자의 표정과 박 반장의 얼굴. 말없이 남자의 등을 떠미는 조경환 형사와 씁쓸하게 고개를 돌리는 김상순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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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그 순간 나에게 그들은 탤런트가 아니었다. “씨바 이 새끼를 잡아넣는 게 맞는 거야?” 하면서 자기들끼리 투덜거리면서 퇴근해서는 자기들 같아도 그랬을 거네 그러면 안되네 하면서 말싸움할 법한 형사 아저씨들이었다.
그때 그 형사들 가운데에는 이제 최불암 아저씨만 남았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떠난다. 하지만 추억은 남아 세월을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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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詩처럼,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

그렇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늙어가겠죠 죽어가고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서 "이런~ 얼어죽을" 하던 게 기억나네요. 수사반장 때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납니다. 다시 볼 수 없을까요.

MBC에 부탁해 보시면 ^^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김상순씨가 최불암씨보다 연배가 높았군요. 몰랐던 사실입니다. 나이 어린 후배들은 다 운명을 달리하고...

수사반장 홀로남은 셈입니다... 여경은 다수가 출연했지만 그 중의 하나인 김영애씨도 세상을.... ㅠㅠ

수사반장
시그널이 울리면 조무래기들은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지요.
그리고 다음날 골목엔 꼬맹이 수사반장이 펼쳐지고

삐바바바바바 빠바바바바 띠리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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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보믄 얼어죽을 이단어만 생가나네요 ㅎㅎ

ㅋㅋㅋ 입버릇처럼 썼죠 대추나무에서

이 아저씨 돌아가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잊고살았네요....
참 구수하신 분인데 TT

오랫만에추억하고 갑니다.

네 아는 새 모르는 새 많은 분듶이 세상을 뜨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청년은 늙고 아이들은 커 가는 거겠죠. 그렇게 역사가 엮어지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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