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를 만든 남녀 - 김희숙 여사의 명복을 빌며

in #kr6 years ago

사상계를 만든 부부 - 김희숙 여사의 명복을 빌며....
다시 가져다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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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아직 전쟁의 포화가 계속되던 즈음, 임시수도 부산에서 역사적이라 불러도 무방한 한 잡지가 탄생했어. <사상계>지. <사상계>가 어떤 잡지인지는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짧게 설명한다면 장준하 선생이 직접 관여하여 발행하던 문교부 기관지 <사상>을 인수해서 새롭게 발간한 잡지였지. 문교부 장관 백낙준의 도움 아래 발행하고 있었는데 백낙준을 자기 남편의 잠재적 라이벌로 봤던 박마리아(이기붕의 부인)가 장난을 친 결과 문교부 기관지 <사상>의 수명이 다했거든. 여기에 계(界)자를 더 붙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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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은 이 잡지를 어떻게든 발간하기 위해 애를 썼어. 필자들도 도움을 주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을 만드는 회사 사장도 지원을 약속하는 등 어찌어찌 모양을 갖춰 갔는데 문제가 하나 생기게 돼. 원고, 조판, 인쇄 모두 외상으로 하기로 했는데 사진 등의 동판대(銅版代)만은 외상이 안 된다는 거였지. 통사정하는 거야 장 선생의 장기였지만 이건 사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어. 그때 장 선생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하나 있었어, 아내의 겨울 외투와 그런대로 값나가는 옷가지 몇 벌. 장준하 선생은 그걸 몽땅 팔아치워 동판대를 마련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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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면 말도 안 해. 장 선생은 아내의 옷가지와 패물을 팔아치웠을 뿐 아니라 아내를 아주 혹독하게 부려(?) 먹어. "아내를 시켜 교정을 보게 했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러 빠져 일의 템포가 늦고 그나마 가르쳐 준 대로도 못 할 때면 슬며시 울화도 났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보는 남들의 사무실에서 핀잔을 주어 부부싸움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장준하가 <브니엘>에 쓴 글) 아내에게 생판 해 보지 않은 일을 억지로 떠맡겨 놓고도 미안해하는 기색은커녕 그 서툼을 고발(?)하면서 자신의 인내력(?)을 자랑하고 있는 이 간 큰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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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홉 살 아래의 아내 김희숙 여사는 별 군소리 없이 남편의 일을 도왔어.

사상계부부.jpg

그건 둘의 범상치 않은 결혼 과정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원래 둘은 사제지간이었지. 이병헌하고 전도연 나왔던 영화 <내 마음의 풍금> 기억나? 시골 초등학교에서 아기 들처업고 수업 듣던 전도연과 "~~하고 있느냐?" 하면서 위엄을 세우던 초보 선생 이병헌. 그 그림이 원래 이 부부의 원판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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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이 일본 유학을 할 때 제자와 편지를 자주 교환하긴 했지만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저 '사제지간의 두터운 정' 정도였다고 해. 그런데 편지 한장이 청년 장준하의 마음을 흔들어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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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여사의 부친은 항일운동을 위해 망명을 떠난 사람이고 어머니가 하숙을 치면서 학비를 대 왔는데 그게 끊기면서 학업도 그만둬야 한다는 거였어. 거기다가 미혼 처녀들을 정신대로 끌고가는 일이 잦았던지라 두려움은 더욱 컸겠지. 일본군 학병 입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장준하는 어느 날 친구에게 이렇게 말을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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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김희숙 여사의 세례명)를 안정시켜 놓고 입대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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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본도 결혼한 유부녀만큼은 건드리지 않으니 자기가 전 제자 김희숙의 신랑이 돼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거였지. 거기서 친구는 "장한 일이야 장형!"했다는데 나 같으면 이랬을 거야. "아니 자네 아니어도 남자는 많을 텐데. 왜 자넨가.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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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고가는 편지 속에 남다른 정이 싹텄을 테고 그렇지 않았다면 생판 사제지간 이상이 아닌데 내가 안정을 시켜놓고 뭘 한다는 둥 하는 얘기가 나올 리도 없고 김희숙 여사가 거기에 응했을 리도 없지. 그래도 그때 나이 김희숙 여사 열일곱. 장준하 선생 스물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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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결혼하고 2주일 뒤 남편은 일본군에 입대했고 탈출하고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대장정을 펼쳤고 열일곱 아내는 시부모 봉양하며 고향을 지켰지. 그러다 해방이 된 후, 임정 요원들과 함께 서울에 온 남편을 찾아 "김활란의 어머니와 함께 소를 타고" 남으로 내려왔어. 이제나 남편 얼굴 보고 알콩달콩 사나 싶었겠지만 앞에서 나왔지만 장준하나 그 아내나 그럴 팔자가 못됐지. 다음의 인터뷰를 보면 불을 보듯 그 이유가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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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저도 가계부라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하니, 얼마 후 생활비라며 봉투를 줬어요. 너무 좋아서 가계부를 만들었는데 이튿날 남편이 돈을 꿔달라는 거예요. 없다고 했더니 '어제 준 것 있잖아요' 해요. 남편은 그 돈을 친구 아들의 등록금으로 줬어요. 결혼식 주례를 서고 받은 양복지도 어느 날 찾아보면 사라지고 없어요. 남편이 저 모르게 형무소에서 나온 제자나 어려운 이웃에게 준 거예요. 제가 바느질집에 가서 일하고 외상도 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터라 서운해하면, 남편은 '내가 밥은 굶기지 않을게. 미안해요'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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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편이었으니 장준하 선생이 뜻밖의 죽음을 당한 후 어린 자식들하고 어떻게 사냐며 우는 이태영 변호사에게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 하는 푸념이 흘러나왔겠지. 그러나 미워할 수도 없었겠지. "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던, 정신대 끌려갈지 모르는 제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던 그 옛날의 총각 선생님, 그렇게 자기 안 된 일은 생각 안 해도 남 안 된 일에는 발벗고 나서던 남자를 말이야.

장준하2.jpg.

장준하 선생도 본인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를 예감한 것 같다고 해. 윤봉길 의사가 의거 전 맹세했던 태극기, 김구 선생에게 받은 뒤 평생 소중히 간직해 온 그 태극기를 이화여대에 기증하는 한편, 아내의 평생 숙원을 풀어 주거든. 장 선생은 평생 개신교인으로 살았고 아내는 일생을 가톨릭 신자로 보냈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혼배성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군. 이걸 올리지 않으면 가톨릭 차원에서는 결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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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장준하 선생이 죽기 직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혼배성사를 베풀어 준 거야. 돌아가기 열 이틀 전. 1975년 8월 5일. 결혼을 1944년에 했으니 무려 31년만의 혼배성사. 목사의 아들이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골수 개신교인인 그가 신부 앞에 서서 혼배성사를 올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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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미안했소 이제 혼배성사를 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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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쉰에 면사포를 쓰고 신부(神父) 앞에 선 신부(新婦)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리고 열흘 남짓 뒤 시신으로 돌아온 신랑을 보았을 때는. 그 신랑이 그렇게 치를 떨어 했던 박정희의 딸이 찾아와서 "아버지와 장 선생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달랐을 뿐입니다."라는 말을 '사과'라며 읊조리는 걸 들었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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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여사는 박근혜 정권 초 종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대. 대단치는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의사에게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말씀하셨다고 해. 지난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직후에.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에서 고상만 기자에게 김희숙 여사는 이렇게 얘기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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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 내가 죽으면 저 세상 가서 영감을 만날 거 아니요. 그때 영감이 나보고 '그래.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하고 있소?'라고 물으시면 내가 차마 말을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 앞으로 5년만 내가 더 살아서 다시 대통령 선거해서 대통령 뽑을 때까지 살아 있으려고 해요. 그래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대통령되는 것 보고 죽어야 내 영감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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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에서만 가능한 슬프고도 애달프고 답답하고도 암담한 사랑 이야기가 이제 끝났다. 김희숙 여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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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렵고 힘든 얘기들은 왜 이다지도 많은지요. 물론 제 상상이지만 몇 줄 안 되는 님의 글을 읽으며 그분의 살아오신 삶이 눈에 선연합니다. 또 그걸 이리 찾아내서 끄집어내 주시는 능력은 어찌 이리 출중하신지요.

님과 함께 두분께 명복을 삼가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다시금 빕니다.

지금은 함께 지켜보고 계시겠군요...

네 오손도손..... 아마도 김희숙 여사가 살아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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