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in #kr6 years ago

1915년 11월 4일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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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독립기념관에 갔을 때 큼직한 돌판에 쓰인 구호(?)를 보았습니다. “나라는 망해도 의병은 죽지 않는다.”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고 한 나철 선생의 말을 조금 바꾼 것인지 다른 의병장이 내지른 한 맺힌 절규를 따 온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구호 앞에서 저는 꽤 오랫 동안 못 박혀 있었습니다. 의병.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선 병사들. 아니 병사가 아니었으나 병사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희미한 얼굴들이 눈 앞에 둥둥 떠왔기 때문입니다.

1907년 초가을 영국 데일리메일의 특파원 맥켄지 (F.A. McKenzie)는 일본 통치에 저항하고 있다는 무장 집단 의병을 취재하기 위해 충청북도 제천, 강원도 원주 일대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맥켄지 앞에 의병들이 나타난 것은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군복을 입은 지휘관격의 훤칠한 젊은이는 맥켄지의 질문에 선선히 대답합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싸움은 슬픈 싸움입니다. 그러나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는 이에게 기다리는 것은 노예의 삶일 뿐이지요. 제국주의 시대를 살던 맥켄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문득 숙연해졌을 맥켄지에게 군복 입은 의병은 너무나 절절하게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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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의병들은 용감하지만 무기가 없습니다. 총은 낡아서 쓸 수가 없고 화약도 떨어졌소. 외국인인 당신은 일본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아무 곳이나 갈 수 있을 테니 우리에게 무기를 사 주십시오. 사례는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맥켄지는 기자 신분 때문에 이 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낡아서 쓸 수조차 없고 화약도 떨어진 처지로 ‘앞에 총’을 하고서 결의에 찬 눈빛을 뿜어내는 의병들의 모습을 영원히 역사에 남깁니다. 그리고 그의 책에서 맥켄지는 이렇게 기억을 재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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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매우 측은하게 보였다. 전혀 희망이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몇몇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엾게만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아마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여주는 표현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맥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1920)

맥켄지의 사진 속에 남은 이들의 운명은 그렇게 길지 못했을 겁니다. 이미 맥켄지는 충북 제천의 몇몇 마을이 일본군의 만행에 쑥대밭이 된 것을 보았거니와 대한제국을 통으로 집어삼키기 위해서 일본군들은 그 몸뚱이 곳곳에서 돋아난 의병이라는 가시를 철저하게 발라 내려고 했으니까요. 1909년 일본군이 호남 일대의 의병들을 전멸시킨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의병들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사방을 그물 치듯 해 놓고 마을을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나그네들의 발길이 끊기고 이웃과의 연락이 두절됐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데가 없어 힘 있는 이들은 싸우다가 죽었고 힘없는 이들은 도망가다가 칼을 맞았다.” (매천 황현의 기록)

이 참극이 마무리된 후,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내용이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공표됩니다. 불과 5년 전 을사늑약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자결로 항거하고 시위에 나서고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으며 울분을 터뜨렸으나 경술국치 이후는 싸늘할 만큼 조용했습니다. 합병 조약 공표를 1주일 미루면서까지 조선인들의 저항의 기미를 살피던 일본이 머쓱할 정도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포기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싸웠으나 희생만 늘어날 뿐이었고, 외교권도 군대도 경찰도 사법권도 이미 다 빼앗겼으니 새삼스레 일본의 일부가 된다고 한들 큰 차이가 있겠느냐 체념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항일의지를 다지며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도 있었고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기회를 엿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노예의 삶’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운 소수의 의병들도 있었습니다. 나라는 망했어도 의병은 죽지 않았던 겁니다. 최소한 1915년 11월 4일까지는 말입니다. 이 날은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장군이 사형당한 날입니다.

채응언은 평안도 성천 출신의 가난한 농민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군인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따르면 그는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여 무뢰한의 두목이 되었고.... 빈민을 이용하여 부자를 협박하는 등 폭행이 무수한 자”였습니다. 즉 바꾸어 말하면 그 용력이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지주나 부자들의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소작농들을 조직하여 부자들의 멱살을 잡아 흔들거나 때로는 패대기도 질 줄 알았던 사내 중의 사내였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고향을 떠나 황해도 곡산 쪽으로 이사해서 화전을 일궈 살기도 했으나 ‘남보다 건강한 기운’이 출중한 채응언은 농민으로 지낼 팔자가 아니었습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됩니다. 즉 일본이 한국이라는 생선을 단숨에 집어삼키기 위한 마지막 가시를 제거한 것이었죠. 그래봐야 친위대 진위대 다 합쳐 수천 명의 병력이었지만 일본은 한 치의 껄끄러움을 원치 않았습니다. 순종 황제의 해산 조칙은 서글펐습니다. “짐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다....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은금을 나누어 주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각기 업무에 허물이 없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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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이 아니라 역적들이 위조한 것이라고 절규하던 1·대대장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하자 한국군 친위대 병사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일본군에게 저항합니다. 1907년 8월 2일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벌어진 일대 격전은 대한제국을 배알 하나 없는 무골충 쯤으로 치부하던 일본과 서울 주재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치열했습니다. 그리고 이 반란은 지방의 진위대로 번졌고 현역 군인이 가세한 의병들은 한층 더 우수한 전투력으로 일본과 맞서게 됩니다. 힘 세고 용감한 농민 채응언도 그 일원이었습니다.

“을사5적과 정미7적같은 역신들의 살점을 2천만 동포가 씹어먹으리라.”고 격문에서 분노를 터뜨리던 채응언은 다른 의병집단이 일본군에 격파되거나 만주로 이동하는 동안, 그리고 끝내 나라가 없어지고 일본의 일부가 된 뒤로도 한참 후까지, 장장 8년 동안 일본군을 괴롭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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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수안의 헌병 주재소가 습격당하는가 하면 함경남도 안변의 주재소가 털렸고 황해도 동쪽을 두들긴 의병대가 강원도 북쪽에 불쑥 나타나 일본군을 어지럽게 했습니다. ‘출몰이 지극히 교묘하여 수비대 및 헌병의 엄밀한 수색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일본군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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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명의 목숨을 잃은 일본군 역시 독이 올랐습니다. 또 “일진회원을 보지 않고 죽이지 않는 자는 참한다.”는 것이 채응언 의병대의 군령이었으니만큼 친일파들에게 채응언 의병대장은 저승사자 같은 존재였고 어떻게든 없애야 할 공포였습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80원을 내걸고 채응언을 잡으려 듭니다.

결국 채응언은 군자금을 얻으러 가다가 현상금에 탐난 동포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하필이면 그의 고향 평안도 성천에서였습니다. 체포되는 와중에 격투가 벌어져 채응언과 파출소장 다나까 모두 부상을 입었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사진 속에는 붕대를 칭칭 감은 다나까가 마치 맹수를 포획한 듯 쇠사슬로 묶어 놓은 채응언과 나란히 선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황해도 곡산에 위치한) 백년산 호랑이’라 불리던 채응언은 일제의 포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으로만 보아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풀 죽은 기색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나까 쪽이 더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채응언은 재판 과정에서 줄곧 태연했습니다. 당연하다 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그는 상고합니다. 이유는 살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살인 강도’의 죄목으로 사형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자신은 의병이고 차라리 ‘의적’이라면 모르겠으되 살인 강도의 혐의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결연히 선언을 했다고나 할까요. “내 나라를 위해 싸운 내가 왜 강도란 말인가. 강도는 오히려 너희들이 아닌가.”

채응언 장군은 끝까지 살인 강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일본군과 친일 부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지요. 아니 오늘날 “독립군은 만주에서 궤멸됐으니 1930년대 이후 독립군은 만주에 없었고 박정희나 백선엽이 토벌한 것은 그냥 비적 따위였다.”고 감히 주장하는 일부 한국인들 보기에도 채응언은 ‘의병’이 아니라 강도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정규군의 풍채도 갖추지 못했고 무기 또한 빼앗은 것으로 싸웠으며 전투라고 해 봐야 헌병 기십 명 죽인 것이 다였는데 그걸 무슨 의병이라 부르며 그걸 어찌 전쟁이라 하겠느냐며 코웃음을 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채응언이라고 해서 그것을 몰랐을까요. 이미 나라가 넘어간 마당에 헌병 나부랑이 몇 명 죽이고 친일파 몇 명 처단한다고 대세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채응언은 그 험준한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의 칼바람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일본군의 매서운 추격을 피해 가며 악착같이 그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보였습니다. 맥켄지의 카메라 앞에 서서 “어차피 우리는 이기지 못할 것이고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무기를 사 줄 수 있느냐. 돈은 달라는대로 주겠다.”고 손 모아 호소하던 의병장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들이치는 바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바보들은 역사에 몸을 기대고 싶었을 겁니다. 언젠가는 일본 놈들이 물러가고 내 나라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내 한 조각 핏빛 소원을 기억해 주리라 하는 마음으로 “위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슬플 뿐 여한이 없노라.”(채응언),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겠다.”(이름 모를 의병장)고 당당하게 외치며 죽어갔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날 그들이 지상의 소리를 듣는 귀가 있어서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은 독립군이 아니라 비적을 토벌한 것’ 따위의 말을 듣는다면, 또 후손들을 살피는 눈이 있어서 ‘김구는 중국인, 안창호는 미국인’ 따위의 잡소리를 지껄이며 1948년에야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며 그 이전의 피어린 역사를 외면하려 드는 이들의 발호를 목도하게 된다면 대관절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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