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역사 한 조각 단성사- 2

in #kr7 years ago

단성사의 과거 2

1932년 단성사의 오랜 동안 이끌어 온 박승필이 죽었다. 나운규를 일본인이 만든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독립시켜 ‘나운규 프로덕션’을 만들도록 후원했으나 일제의 검열이나 기타 이유로 흥행에서 참패를 거듭한 데다 단성사 소유 문제를 놓고 벌어진 복잡한 송사의 뒤끝에 몸과 마음이 쇠잔해진 탓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성사장(葬)으로 치러졌다. 영화계의 거목이라 할 윤백남의 조사는 애잔하고 비장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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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해 피 흘리다가 화살이 다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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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들의 공연장이었던 단성사를 버젓한 극장으로 탈바꿈시킨 사람, 한일합방 소식에 퍼질러 앉아 통곡했으며 일본인이 만든 춘향전에 부아를 터뜨리고 조선인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고 그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던 인물의 이른 (향년 57세) 퇴장이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오랫 동안 단성사 지배인으로서 박승필을 보좌해 온 박정현이었다.

그러나 단성사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고 있었다. 영화 자체의 조류가 변했다. 변사가 사설을 읊어대고 가수가 무대 아래에서 가녀리게 노래 부르는 무성 영화의 시대가 가고 토키 영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불멸의 명화로 이름 높은 <사랑은 비를 타고>가 바로 이 전환기를 소재로 잡고 있거니와, 단성사는 토키 시설을 갖추고 쾌적한 객석을 갖춘 일본인들의 극장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힘들여 토키 시설을 완비한대도 1920년 이전에 지어진 낡은 건물로는 도무지 경쟁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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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단성사는 1934년 대공사에 들어간다. 봄에 시작한 공사는 그 해가 다 가서야 완공됐지만 그것도 뾰족한 수는 못 됐다. 적자는 쌓이고 빚은 늘어만 갔다. 박정현은 동분서주하면서 단성사를 지키려 했지만 일본인 형사와 변호사, 깡패들까지 끼어든 고약한 경영권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1939년의 어느 날, 단성사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대륙극장’으로 그 이름마저 바뀐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한국 영화사에서 잊을 수 없는 영화인이면서 또 하나의 ‘단성사맨’이라 할 박정현도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몇 년간은 우리 민족사와 영화사와 그리고 단성사의 암흑기였다. 아시아 전역을 뒤덮은 전쟁판 속에서는 상영할 만한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못했고 영화를 수입할 루트도 막혀 버렸다. 그 암흑의 터널을 벗어나 단성사가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6년 초,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소위 ‘적산’(敵産) 관리인과 종업원들은 ‘대륙극장’이라는 일본인들의 대륙 침략 야욕을 상징하는 이름을 버리고 원래의 이름 ‘단성사’를 되찾는다. 단성사의 굴곡 많은 역사에서 또 한 번 새 출발을 기약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시내 종로 3정목 대륙극장은 일본 제정 때 강제로 단성사를 매수하야 대륙극장으로 고쳤는데 오는 구정부터 다시 단성사로 개칭, 부활하게 되었다.”

해방의 감격 속에 단성사의 이름은 되찾았다. 그러나 그 영화(榮華)를 되찾게 해 줄 영화(映畵)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유만세>니 <윤봉길 의사>니 해방 분위기에 걸맞는 영화가 몇 제작되기는 했지만 일제 때부터 이어져온 극장들의 간판을 장식하기에는 양적 질적으로 부족했다. 단성사는 영화보다는 악극단의 공연장으로 즐겨 쓰였고 또 해방 공간의 특징으로 기억되는 좌우의 격렬한 대립 와중에 양측의 집회장 노릇도 했다. 그 치열한 대결도 일단락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선 지 2년이 되던 어느 초여름 날, 일요일 오전 영화를 즐기러 단성사에 온 관객들은 갑자기 영화가 중단되고 흘러나온 장내방송에 기겁을 하고 일어서게 된다. “휴가 중인 장병들은 즉시 부대에 복귀해 주십시오. 북괴군들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해 왔습니다.”

서울 전역을 잿더미로 만든 전쟁을 거치면서도 단성사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한때 종로의 라이벌이던 극장 우미관은 전쟁통에 잿더미가 됐고 조선극장은 이미 일제 때 불타 버렸으니 종로의 터줏대감은 단연 단성사였다. 전쟁 후의 팍팍한 세상에서 영화는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서울의 개봉관은 종로 3가에 터잡은 단성사와 맞은편 피카디리를 꼭지점으로 퇴계로의 대한극장이 또 다른 편의 꼭지점을 이루며 남북을 연결하는 ‘극장 벨트’를 형성한다. 그 사이에 스카라, 명보, 국도, 세기극장이 간판을 올렸고 국제극장, 아카데미극장, 중앙극장 등이 광화문과 을지로, 명동 주변에 좌정하고 있었다. (“극장 - 한국영화의 또 다른 역사” - 조희문” 에서 인용)

넘치도록 흘러들어오는 미국 영화들과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던 한국 영화들은 이 극장들에서 연인 상영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런데 극장마다 조금씩 특징이 있었다. “70밀리 시네마스코우프”를 자랑하던 대한극장은 우람한 화면과 생생한 사운드로 <아라비아의 로렌스>같은 스케일 거대한 작품들을 주로 취급했고 광화문의 아카데미 극장은 정동길을 걷는 연인들을 겨냥한 로맨틱한 영화들을 주로 틀었다. 그럼 단성사는 무엇으로 유명했을까?

주로 액션물과 서부극을 주로 상영한 영화관이었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들, 홍콩 무협 영화들, 각종 액션 활극들이 주로 단성사를 무대로 하여 상영됐던 것이다. 그 이유는 종로의 지역적 특성을 들 수 있다.

“단성사 뒷골목은 소위 기생들이 많은 홍등가였다. 종로 일대가 유흥가였다. 그리고 그 일대는 깡패들이 많았던 우범지대였다. 그래서인지 주로 액션영화가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럽게 액션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그 때문에 당시 영화계에서 ‘액션영화’ 하면 단성사로 통했던 것 같다. 또 액션물은 학생들도 좋아했는데 인근에 경기고, 덕성여고, 창덕여고 등 학교가 많아 학생들도 극장을 많이 찾았다.” (단성사 전 상무 이용희의 인터뷰 중 - 한국영상자료원 웹진)

50년대 종로 3가 인근에는 ‘종삼’으로 유명한 사창가가 형성돼 있었고 이 ‘종삼’의 사창가가 정리되면서 ‘588’과 ‘미아리’가 생겨났으리만큼 그 역사는 뿌리가 깊었다. 그 ‘업소’ 종사자들, 그리고 인근의 학생들이 손쉽게 즐겨 볼 수 있는 영화를 주로 틀자면 화끈하고 시간 때우기 좋은 액션 영화가 제격이었으리라.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1955년 일어난 ‘단성사 앞 저격 사건’을 읽어 보자.

1955년 1월 29일 김동진이라는 남자가 놀라운 사실을 폭로한다. 동대문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정치깡패 이정재가 자신에게 조봉암, 신익희 등 40여 명에 인물들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지시에 기가 질린 김동진은 이 명단을 폭로하고 시경에 신고했다. 이후 김동진은 잠적했는데 이에 분노한 이정재와 역시 정치 깡패로서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던 임화수는 김동진이 영화광이라는 사실을 알고 단성사에 그가 좋아하는 서부 영화를 연일 상영한다. 마침내 김동진이 단성사 앞에 나타났을 때 이정재의 부하이자 조카뻘이었던 이석재는 김동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죽지는 않았으나 중상이었다. 이정재는 살인교사죄로 체포됐다가 자유당 정권의 방해로 검사가 교체되는 촌극 끝에 풀려났고 이석재만 구속된다. 이것이 ‘단성사 앞 저격 사건’이다. 극장 안에서는 서부극의 건맨들이 스크린 속에서 속사 연기를 펼치고 있었지만 극장 밖에서는 진짜 악당들의 총질이 백주 대낮의 서울 대로를 울렸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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