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팔 참사

in #kr6 years ago

1984년 12월 3일 보팔 참사

1984년 12월 3일이 된지 얼마 안 된 한밤중이었다. 곤한 잠을 자던 사람들은 갑자기 뭔가가 눈과 코를 찌르는 느낌을 받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배가 부풀어 올랐고 사지가 뒤틀린 채 픽픽 쓰러져 갔다. 안간힘을 다해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거리에 널부러진 사람들과 짐승들의 시신을 보고 경악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치뜨고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 밤 안으로 무려 3500명 (인도 정부 발표이지만 더 높게 잡는 통계도 있다)이 그렇게 죽었다.

이 떼죽음을 몰고 온 저승사자는 인도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주의 보팔 시 외곽에 있던 미국 화학기업 유니언 카바이드의 농약 공장의 원료저장 탱크에서 새어나온 맹독성 물질인 메틸 이소시안염(MIC)이었다. “화학 물질의 히로시마” 보팔 참사가 터진 것이다. 그날 죽어간 3500명이 다가 아니었다.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1만 5천 여명으로 발표됐지만 (인도 정부 공식 발표) 환경운동가들은 사망자가 3만 3천여명에 달한다고 보고했고 (YTN 2004.12.8 보도) 약 50만 명의 인구가 가스에 노출됐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결핵이나 실명, 피부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누출 사고의 원인은 저장탱크 속의 압력이 높아지면서 밸브가 파열되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다국적 기업인 유니언 카바이드 사가 펴낸 보고서는 운전원의 실수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밸브 파열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고, 안전관리가 소홀하였던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은 외면했다. 공장은 한 마디로 엉망이었다.

참사로부터 2년 전 내부 가스 누출 사고로 사람이 죽었고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하여 안전한 작업을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는 안전 장치 설치는 커녕, 해고의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맞섰고 비용 절감을 내세우며 노동자의 수를 반으로 줄여 버렸다. 안전교육은 6개월 과정에서 달랑 15일로 바뀌었다. 소량의 가스가 상시적으로 새어나오는 통에 경보기가 수시로 삑삑거리자 아예 무음으로 바꿔 버렸다는 얘기에 이르면 문제의 독가스가 지금 이 순간 내 코로 스며드는 느낌마저 든다.

사건은 어차피 터진 것이고 남은 문제는 피해자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책임자의 규명과 처벌알 것이다. 그런데 수만 명이 죽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영구 장애를 입고 사건 발발 20년이 넘도록 지하수에서는 유독물질들이 철철 넘쳐나는 이 끔찍한 사태의 법적 판결은 사건 발발 이후 26년만에야 내려졌다. 2010년 보팔 지방 법원이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회장이었던 워랜 앤더슨과 인도 지사 경영진에게 ‘과실치사’를 적용하여 징역 2년을 선고한 것이다. 사건을 질질 끌기로 세계적인 악명이 있는 인도 법원이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시간 끌기와 그보다 더 자심한 판결이었다. 피고인들은 그 처벌도 받지 못하겠다며 항소했고 인도 대법원에서 판결이 나고 처벌을 받을 때쯤이면 아마도 그들이 늙어 죽은 뒤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런 미증유의 화학 물질 참사를 낸 기업 유니언 카바이드는 어느 정도의 보상을 했는가. 일단 유니언 카바이드는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거부했고 공장 노동자를 죄다 해고한 뒤 수천 톤의 유독 물질을 방치한 채 떠나 버렸다. 지금도 이사 갈 여력조차 없는 빈민들은 그 죽음의 공장 주변에서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86년 인도 정부는 유니언 카바이드와의 협상에서 보상금으로 4억 7천만 달러로 모든 것을 ‘퉁치고’ 더 이상 어떤 책임도 묻지 않기로 합의하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다. 이는 피해자들이 직접 소송을 제기하면 3백억 달러에 달할 수 있는 보상금(인디펜던트 지 보도)을 껌값으로 막아 버린 처사였다.

인도 정부는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과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고, 부상자들에게 2만5천루피(60만원), 사망자 가족들은 10만루피(240만원)씩을 지급했으며, 그나마 꽤 많은 돈이 “지급대상자 불명”으로 처리돼 중앙은행 금고에서 잠자고 있다.

더 끔찍한 일은 유니언 카바이드사가 훌쩍 떠나버린 뒤에도 보팔시에는 수천 명의 죽음을 낳은 공장과 그 찌꺼기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양은 자그마치 약 8천톤. 그 근처에서 사람들은 먹고 자고 숨쉬며 살아갔다. 아이들은 커서 기형아를 낳았고 그 모습 그대로 자신들의 터전을 떠나지 못했다. 이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것은 2012년에야 가능했다 인도 정부가 독일 독극물 폐기업체와 폐기물 처리 협정을 맺은 것이다. 독일인들은 보팔시의 해묵은 독극물들을 독일로 가져가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보팔의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을 것이다

보팔 참사는 여러 의미로 참사였다. 가스 누출과 그 희생자의 규모에서도 대참사였지만 하나의 산업재해를 두고 한 기업과 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탐욕과 안전불감증과 무능과 우유부단함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보팔을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날 유독 심하게 불었던 북서풍에 실려온 죽음의 사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유니언 카바이드 공장은 보팔 시의 북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가끔 불어올 그 북서풍을 맞으며 보팔에는 2백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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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참혹한데요.두번다시는 이런일이 발생해서는 안되죠...

그래야죠.... 그러나 참...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맞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돈 앞에 무력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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