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에 기억해야 할 것

in #kr6 years ago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
4월이구나.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었지. 하지만 엘리엇의 시가 한국으로 건너오면 이건 시(詩)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 되어버린다. 한국 역사에서 4월은 정말로 잔인한 일투성이였거든. 지난해 4월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역사 속 4월의 잔인함을 다섯 배는 크게 만들어놓은 것 같아. 저 끔찍하고 암담했던 4월16일 이후 오래도록 우리 망막을 할퀴고 간 잔혹한 장면들이 어디 하나둘이었을까. 그 가운데 아빠가 끝까지 바라보기조차 힘들었던 모습이 하나 있어.
.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한 아이들 몇 명이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을 명랑하게 부르면서 활기차게 걷는 동영상이었지. 진달래처럼 흐드러진 웃음과 벚꽃처럼 화사한 표정으로, 개나리처럼 밝은 몸놀림으로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지.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 우… 둘이 걸어요.” 저 꽃 같은 아이들이 끝내 하얀 국화송이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사실이 어찌나 가슴을 후비던지. 이 글을 쓰면서도 아빠는 눈물이 난다.

언젠가 아빠 친구 한 명이 그러더라. 자기는 세월호 관련 뉴스나 동영상, 기사들을 일절 보지 않겠대. 볼수록 우울해지고 가슴 내려앉는데 그런다고 아이들이 돌아올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말이야. 그래. 슬퍼하고만 있으면 안 되겠지. 하지만 그 말이 맞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할 것 같아. 슬픔을 거두는 게 “이제 그만 잊기” 위해서는 절대로 아니어야 한다는 거야. 사건의 전모를 소상히 밝혀 이런 일의 재발을 막고 기억할 것들을 분명히 가려 남기는 냉철함을 위해서 슬픔을 보류한다면 몰라도. 오늘 아빠는 작년 4월16일을 돌아보면서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를 얘기해보려고 해.

1852년 남아프리카 희망봉 근처에서 침몰한 영국 수송선 버큰헤드호. 영화 <타이타닉>을 떠올려보렴. 그리고 침몰해가는 배 위에서 터져나오던 “여자와 아이들부터!”라는 외침도. 물론 1, 2등실 어린이 승객 사망자는 1명인 데 비해 3등실 어린이는 3분의 2나 죽었던 만큼 ‘여자와 아이들부터’ 원칙이 완벽히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 선장과 선원들은 최대한 그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어. 이건 타이타닉 침몰로부터 꼭 60년 전인 1852년 남아프리카 희망봉 근처에서 침몰한 영국 수송선 버큰헤드호의 기억에서 비롯된 일이야. 그 배에는 군인과 군인 가족 630명이 타고 있었는데 구명정의 정원은 180명 정도였지. 함장은 횃불을 밝혀 여자와 아이들을 구명정에 태운 뒤 기울어져가는 뱃전에 병사들을 늘어세웠어. 구명정에 탄 가족들이 몇 명은 여유가 있다고 외쳤지만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어. “질서가 무너지면 모두 죽는다. 전원 차렷. 경례.” 그들은 그 모습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갔어.

아마 구명정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평생 나쁜 짓은 못하고 살았을 거야. 자신의 생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경례를 받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사악한 마음을 먹을 수 있겠으며 “명령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두가 잘 알면서도 마치 승선 명령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준수”(생존자 증언)한 이들을 어떻게 뇌리에서 지울 수 있었겠어. 그 덕으로 살아남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말이지. 영국인들은 이 사건을 철저하게 기억했어. 빅토리아 여왕은 왕립 첼시 병원에 기념물을 세웠고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고 영국인들은 “버큰헤드호처럼!”을 되뇌며 스스로를 가다듬었지. 타이타닉의 외침, “여자와 아이들 먼저!”는 바로 그 기억의 소산이었던 거야.

하나 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려보자. 마침내 다가오는 절망적인 순간, 아수라장이 된 배 위에서도 태연하게 음악을 연주하던 악단의 모습을. 그 악단의 리더는 월리스 하틀리라는 젊은 음악가였지. 목격자들에 따르면 악단 단원들은 “그들의 다리가 중심을 잡을 수 없을 때까지” 연주했다고 해. 선원도 회사 직원도 아니었지만 공포가 난무하고 혼란이 장악한 배 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는 음악을 최후 순간까지 베풀어주었던 거지.

침몰 후 수습된 시신 가운데에는 월리스 하틀리도 있었어. 그는 바이올린을 넣은 가방을 목에 걸고 있었대. 바로 그 부력 때문에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던 하틀리의 시신이 물 위로 떠올랐다는 추정이었지. 고향 콜른에서 열린 하틀리의 장례식에는 무려 4만명의 시민이 모여들었고 하틀리의 동상도 세워져. 영국인들은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죽음 앞에서 위대했고 다하지 않아도 되는 책임까지 다했던 영웅을 또 한 사람 가지게 된 거야.

세월호의 슬픈 사연들의 더미 속에서, 버큰헤드 정신은커녕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선 자기들만 살겠다고 탈출한 ‘세월호의 악마들’에 대한 분노의 태산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우리에게도 있었어. 세월호에서 월급을 가장 적게 받는 사람 중의 하나였을 비정규직 승무원 고 박지영씨. 그 언니는 물이 차오르는 배 안에서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건네고 입히며 자신의 책무를 다했단다. 자신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서 말이야. “언니는 어떡해요?” 묻는 학생들에게 “승무원은 맨 마지막이야”라고 답하던 나이 스물두 살의 여성은 결코 타이타닉의 하틀리에 뒤지지 않고 버큰헤드호에서 말없이 경례하던 수병들도 넘어서는 영웅이라고 생각해. 그뿐이 아니지. 승무원도 아니면서 죽을힘을 다해 학생 10여 명을 끌어올렸던 김동수씨도 있고,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었으면 생존 가능성이 컸지만 앞뒤 재지 않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던 선생님들도 계셔.

윌리스 하틀리의 경우 4만여 명의 애도 속에 장엄한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타이타닉호 침몰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선장조차 침몰 과정에서 보여준 책임감 있는 모습 덕분에 동상이 세워졌는데, 버큰헤드호 선원들은 지금도 영국인들의 뇌리와 가슴에 살아 있는데, 고 박지영씨는 돈이 모자라 영결식마저 제때 치르지 못할 뻔했었어. 10여 명의 생명을 구했지만 “아저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며 울부짖던 학생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던 영웅 김동수씨는 아무런 보상도, 관심도 받지 못하고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자해를 했어. 왜 우리의 영웅들은 이런 처지가 되어야 할까.

세월호 참사로부터 1년이 좀 안되었을 즈음, 난데없이 미국에서 이런 소식이 들려왔단다.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침몰하는 군함에서 구명조끼를 다른 병사에게 넘기고 순직한 종군 성직자 4명의 희생정신을 기려 설립한 ‘포 채플린스 메모리얼 파운데이션’ 재단이 고 박지영씨와 죽음을 무릅쓰고 아이들에게 달려간 고 최혜정 선생님에게 골드 메달을 수여했다는 거야. “두 사람의 구조 활동은 재단 설립의 계기가 된 성직자들의 희생정신과 다를 바 없다”라면서.

아빠 귀가 어두운 탓인지 세월호 참사 이후 고 박지영씨나 최혜정 선생님에 대한 포상 또는 기념 사업이 행해졌다는 뉴스는 들은 기억이 없구나.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고 희생자들의 아픔이 너무 큰 이유도 있겠지만 그들의 이름은 너무 빨리 엷어진 게 아닐까. 기억의 단절은 곧 역사의 단절이고, 역사의 단절은 곧 배움의 단절이야. 기억부터 지켜야 할 거다. 끊임없이 습격하는 망각의 유혹으로부터. 빨리 잊고 끝내자, 경제가 어렵다고 ‘지껄이는’(아빠의 험한 말을 용서하렴) 사악한 자들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세월(歲月), 즉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세월호의 기억을 지켜야 할 거야. 아빠도, 너도.

Sort:  

울면서 봤습니다. ㅠㅠ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 날의 악몽과
그 다음의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감사합니다.

잊을 수 없지만..... 또 이제는 담담히 바라봐야 할 때도 됐다고 생각합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6
JST 0.030
BTC 67714.75
ETH 2616.81
USDT 1.00
SBD 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