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고 예민했던 풀, 김수영

in #kr8 years ago

1968년 6월 16일 김수영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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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6월 16일 팍팍하고 메마른 땅에 돋아났던 유달리 섬세하고 예민했던 풀 하나가 영원히 몸을 누였다. 전날 교통사고를 당하고 의식을 잃은 시인 김수영이 끝내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마른 얼굴, 그리고 퀭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깊게 팬 눈. 그리고 정면 사진보다는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남아 있는 시인 김수영이 죽기 며칠 전 완성했던 시가 바로 '풀'이다.

김수영.jpg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그는 전쟁 당시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처럼 이승만의 "안심하라" 방송에 속아 피난도 못가고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어영부영 '작가 동맹'의 일원이 되어 북한에 의해 문화 선전대에 편입당한다. 밀었다가 밀려가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풀잎이 되어 평안북도 개천까지 북상했다가 놓여나서 남쪽으로 왔지만 이번에는 인민군 패잔병으로 몰려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흘러간다. 그러나 그곳은 또 하나의 지옥이었다. 전쟁이 지긋지긋하기로는 누구에 뒤지지 않았을 포로들이었지만 포로수용소에는 투명하게 날이 선 38선이 그어졌고, 포로들은 마치 전선에서처럼 죽고 죽이고를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친공포로가 장악한 포로수용소에서 나는 의용군에 끌려왔을 뿐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했다가는 소리소문없이 저승사자의 포로가 되기 일쑤였고, 반대로 반공포로가 주도권을 잡은 수용소에서 김일성 장군 운운했다가는 당일로 목 없는 귀신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 어이없는 포로들간의 전쟁에서 발생한 희생자의 시신처리는 주로 똥통이 맡았다. 종종 드럼통째로 분뇨를 내다 버린 거제도 앞바다에는 토막난 임자없는 팔다리가 항시 둥둥 떠다녔다고 할 정도. 천만다행히도 김수영은 미군 외과병원장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극단적인 대립의 구도에서는 한 발 벗어나 있었지만 거제도의 기억은 평생 동안 그를 떠나지 않았다.

병약한 체질에 영어 하나는 잘했던 문학 청년에게 전쟁이란 칼끝으로 맨살에 그림을 그린 듯한 상처를 남긴다. 포로수용소의 기억도 기억이거니와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또 한 번 망연한 현실에 암담해져야 했다. 남편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김수영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던 문학 소녀이자 문학 동료였던 아내는 남편의 생존 사실을 알고 되돌아오지만 김수영의 마음에 맺힌 칼집이 쉽게 아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수영의 동료 문인 박연희의 표현은 실로 절묘해서 가슴 아프다. “6.25는 한국 민주주의를 타살하고 국민을 짐승적인 존재로 떨어뜨렸으며, 김수영을 처용아비로 만들고 말았다.” 셔블 발근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집에 돌아오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네 해인데 둘은 뉘 해인가.

그러나 아내는 그의 천생 배필이었다. 하루는 김수영이 싸구려 잡지가 후한 원고료를 준다며 아내에게 단편 소설 하나를 쓰라고 했다. 익명으로 주는 원고고 잡지가 잡지인지라 하룻밤 뚝딱 써서 내밀었는데, 원고료를 받으러 간 김수영이 술에 취해서는 들어와서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더러운 년! 나쁜 년!” 다음 날 김수영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고료 기다리면서 소설을 읽었는데 네가 미워 죽겠더라. 우리 그런 거 써서 밥 먹고 살지 말자. 굶는 게 낫겠더라.” 이런 무력한 가장의 만용과 적반하장의 다짐이라니. 하지만 아내 김현경은 그 말을 들으면서 “맞았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니 이런 천생배필도 드물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김수영의 가정폭력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김수영부부.jpg
뒷줄이 김수영 부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난과 배고픔 앞에 한없이 비루해지던 시절, 그 노곤함의 졸음에 스르르 눈꺼풀이 감기다가도 화들짝 일어서서 스스로를 채근하고 아내를 두들겨 패는 만용을 부리기도 하면서 그 눈 감시를 거부했던 시인 김수영. 그가 써내린 많은 시 가운데 한 시에서 나는 자주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치 그 시는 얼음판 같았다. 미끄러운 줄 알면서도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자빠지는 얼음판처럼 이 시는 뻔히 그리고 외울 지경으로 친숙하면서도 읽을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얼굴이 달아오르게 만드는 신묘한 기운이 있다. 시의 제목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자명하고 뻔한 유행가에 오래도록 마음을 내어 놓고 싶을 때가 있다.

바람아, 먼지야, 풀아, 그리고 모래야,


어쩌면 이렇게 시대를 뛰어넘과 세월을 가로질러서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살기 바쁜 소시민들이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아수라 백작’의 두 얼굴을 콕콕 찔러댈 수 있을까. 드러낼 수 밖에 없는 비겁함과 버리기 싫은 자존심이 빚어내는 환상의 불협화음을 이렇게도 명징하게 몇 개의 단어의 나열로 묘사할 수 있을까. ‘50원짜리 갈비’의 가격이 수백 배 이상 오를 정도로 지나버린 시간이지만 그만큼의 세월이 더 지난다 해도, 이 시는 마치 의자 위에 튀어나온 못처럼 우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시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오늘, 대놓고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이들에게는 신문 보며 욕 한 번으로 끝나지만, AS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상담센터 아가씨를 우락부락하게 윽박질렀던 나같은 인간에게는 더욱.

자유당 시절 어느 날 술집에서 김수영은 이승만에 대한 불같은 비난을 토해낸다. 술자리 동료가 너무 심하다며 만류하자 김수영은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럼 썩어빠진 정부며 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조심 조심’ 때문이야!” 분개할 일에 분개하고 화낼 일에 화내며, 그놈의 조심조심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묻던 시인 김수영.

4.19 혁명의 벅참과 혁명의 좌절의 무상함 앞에서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으며 혁명은 왜 고독한가”를 되뇌던 시인 김수영은 각박한 20세기를 살아내린 그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모습을 풀어낸 것 같은 시 ‘풀’을 쓴 지 며칠 뒤 집으로 돌아오다가 버스에 치어 죽는다. 1968년 6월 16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유고시 ‘풀’은 지금도 그의 육필로 액자에 넣어져서 여든 아내의 방에 걸려 있다고 한다.

김수영부인김현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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