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유신과 이세규

in #kr6 years ago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과 이세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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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634만 2,828표를 획득,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얻은 539만 5,900표보다 94만 6,928표를 앞섰다. 박정희는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결코 그 승리에 환호할 수 없었다. 야당의 젊은 도전자 김대중에 맞서서 별의 별 짓을 다 해야 했던 것이다. 온갖 관권을 다 동원한 것은 별반 새로울 것도 없었으나 김대중의 일급 참모였던 엄창록을 매수하고 ‘신라 백제’ 지역감정까지 동원하고, 3선 개헌의 장본인인 국회의장 이효상이 “정권이 호남으로 넘어가는 걸 보고 있을 끼가?”라고 소리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저를 찍어 달라고 하는 마지막 선거”라며 직접 읍소하기까지 했으니, 이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자존심 적잖이 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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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임기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인다. 81년 10월 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내리고 캠퍼스에 군 병력을 투입한 것이다. “북괴의 군사적 움직임과 대남공작의 새로운 양상에 비추어 시기적으로 이번 시험기를 이용한 일부 불순학생의 ‘데모’ 선동이 국가안위에 미치는 영향"이 위수령의 이유였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또한 핑계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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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25일 제26차 UN총회에서 죽의 장막 속에 잠자던 ‘중공’이 알바니아의 제안으로 표결 끝에 UN에 가입했다. 중국의 UN가입과 동시에 ‘자유중국’이 국제무대에서 축출되는 상황이 바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였다. 후일 미국 41대 대통령이 되는 당시 주UN 미국 대사 조지 부시는 “대만의 축출은 결의안에서 빼자”고 호소했으나 무위에 그쳤고 청천백일기 즉 중화민국 국기는 그날로 끌어내려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한국과 미국군을 괴롭혔던 군대가 휘두르던 오성홍기가 UN 빌딩 앞에 높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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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한 달여 후인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돌연 ‘비상사태’를 선언한다. 정부 시책은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며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 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모든 국민은 안보상 책무 시행에 자진 성실해야 하며, 안보 위주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가운데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로 그 말미를 장식하는 비상사태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는 10개월여 뒤인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 선포의 불길한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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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에 기록된 1972년 10월 17일 박진환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의 기록을 보면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황망하게 사람들 앞에 그 잔인한 칼날을 들이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침에 우리 특보들은 부름을 받고 대통령의 집무실 안쪽에 있는 방에 모였습니다. 분위기가 팽팽하고 싸늘하더군요. 박 대통령은 그때 양복을 입고 있지 않았읍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상황실에 좌정한 야전 지휘관 같은 옷차림이었읍니다. 커피가 나오고 이어서 소책자 한 권씩을 돌립디다. 표지를 넘기니까 「국회해산」 「비상계엄령 선포」란 글이 눈에 홱 들어오지 않겠읍니까. 저는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처럼 머리가 핑그르하는 기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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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진환의 기록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한 명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 “그 자리에서 누가 반대할 줄 았았는데 아무도 하지 않더군”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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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관들이야 몰랐겠으나 이미 권력 내부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도모하는 계획이 진행 중이었고 유신이라는 괴물의 골격과 피부는 튼튼하게 쌓이고 촘촘하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보좌관들에게 커피와 함께 유신 관련 소책자가 들이밀어지기 24시간 전에 이미 한국의 국무총리 김종필은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에게 유신을 통보하고 있었다.

“10월 16일 18:00시에 김 총리 사무실을 방문했음.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 만나자고 했다면서, 계엄령 선포를 통보했음. 김 총리는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 미국 측에 통보하는 것이 예의라고 믿어 24시간 전에 통보하는 것이라고 말했음.” 그리고 그 앞의 보고서에서 하비브는 유신 선포 일정과 향후 정치 일정, 심지어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출까지 보고하고 있다.

  • 《동아일보》 2013년 6월 11일자 〈김지하와 그의 시대〉 중

미국과 사전 교감을 가졌다는 것은 억측이겠으나 미국도 박정희의 전횡을 막을 생각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유신 선포의 배경에서 “‘미국과 중공의 접근’ ‘월남 평화협상’ 등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라는 내용을 빼 달라고 주문했을 뿐이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중공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을 유신의 배경으로 하는 문구를 빼 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했을 뿐이다. 박정희는 보좌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미국놈들이 안 그러면 뭐가 아쉬워서!”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결국 유신은 ‘국제정세’가 아니라 ‘국내 정세’의 결과임을 입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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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한창 국정감사 중이었다. 국회의원들은 국정감사를 벼르는 중에, 자료 준비 중에, 또는 호통과 질책을 한바탕 내지르고 목을 가다듬던 상황에서 벼락같은 유신 선포를 접한다. 유신을 선포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음성은 음울하고도 카랑카랑했다.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 오늘의 이 역사적 과업을 강력히 뒷받침해주는 일대 민족주체 세력의 형성을 촉성하는 대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약 2개월간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하는 바입니다. …”

‘저의’도 아니고 ‘나의’ 중대한 결심이었다.

중앙청 앞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진주했다. 수도방위사령부 마크 선명한 장갑차가 광화문을 뒤로 하고 포신을 세종로로 향하고 있었다. 즉 나라의 군대가 국민을 향해 공격 태세를 갖춘 것이다. 아울러 정권의 마수가 긁어 들인 것은 평소에 밉보였던 언론인과 재야인사,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이세규 의원이었다.

그는 예비역 준장으로 한국전쟁 당시 육사 7기 출신의 초급 장교로서 용감하게 싸운 이였으며 부패와 횡령이 일상화됐던 당시의 군대에서 거의 독야백백한 군인으로 유명했다. 그의 별명 중 하나는 콩나물 대령이었다. 대령 시절 자신의 월급을 나눠 불우이웃들에게 전달하는 바람에 살림이 반 토막이 나서 손님이 왔을 때 콩나물국 한 그릇만 내놓는다 해서 ‘콩나물 대령’이라 불리웠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단장 시절 임지로 면회를 간 부인과 자녀들은 ‘민간인이 군의 식량을 축낼 수 없다’는 이씨의 고집(?) 때문에 서울에서 쌀과 부식을 가져가야 했으며 군용차량에 발도 못 올리게 해 관사로부터 버스터미널까지 수㎞ 길을 걸어 다녀야만 했다.

  • 《중앙일보》 1993년 7월 26일

그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던 장성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집 한 채 하나 없는 장성이었다. 이세규는 3선 개헌에 완곡한 반대 의사 표명을 한 것이 빌미가 돼 군복을 벗은 뒤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서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야당 입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국방 전문가 자원이었다. 영화 〈실미도〉의 실제 주인공들이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 시내에서 자폭한 사건에서 정부의 초기 입장은 일관되게 ‘무장공비’였다. 이 거짓말을 폭로한 게 바로 이세규 의원이었던 것이다.

“너희 놈들은 사람도 아니다”

유신이 선포되자마자 다른 국회의원들과 더불어 이세규 의원은 일착으로 군 정보기관에 끌려간다. 그리고 대통형 휘하의 군인 출신 정보요원들로부터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한다. 왕년의 남로당 군사 총책의 히스테리는 대단했다. 이세규가 군 내에서 반정부 인맥을 꾸려 자신의 발밑을 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을까, 대통령의 하수인들은 이세규에게 인정사정없는 고문을 가하면서 유신 지지 서명을 강요하는 한편 이세규의 ‘인맥’과 군내 동조자 명단을 집요하게 물었다.

대개 인간은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비굴해지고 자신도 놀랄 만큼 잔인해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멍청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 “이세규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한 박정희 대통령은 잔인했고, 그 명령에 따라 “명령이니 어떡해?”라면서 이세규를 잡아매고 몽둥이질하고 고춧가루 푼 물을 콧구멍에 들이부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비굴했으며, 자신의 나라가 무슨 상황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또는 모른 체하면서 술이나 마시던 이들은 멍청했다.

그러나 때로 그 인간 가운데 인간은 그렇게 하찮고 지질한 존재가 아님을 외치는 인간이 꼭 나와서 인간들은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고 깨우치고 발길을 다잡게 된다. 이세규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문을 당하던 중 이세규는 자살을 결심하고 혀를 깨문다. 그러나 고문의 고통 중에 혀를 정확히 깨물지 못하고 대신 앙다문 서슬에 의치가 부러져 나간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지자 고문하던 이들도 당황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왕년의 용감한 소대장, 불우이웃들에게 자기 월급 반을 쪼개주던 콩나물 대령, 부인에게 “당신 음식은 당신이 싸가지고 오시오! 민간인이 어딜 군 밥을 먹어!”라며 호령하던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군인. 한때는 박정희가 아끼는 제자이자 후배였던 이세규는 입에 피를 가득 문 채 이렇게 절규한다.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성에게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너희 놈들은 사람도 아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5075 프레시안 2002. 10.16
사람도 아닌 자들이 사람에게 일으킨 쿠데타

1972년 10월 17일은 사람도 아닌 자들이 사람들에게 일으킨 쿠데타였다. 최소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짐승이 되기를 자임했던 자들이 가한 폭거였다. 그 와중에 사람다운 사람들은 혀를 깨물며 피를 흘렸고 몽둥이찜질 속에 비명을 질렀다. 이세규 장군은 그 후 1년 동안 7번이나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그 후 지팡이를 짚고 생활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고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일체의 공직을 마다한 채 칩거하다가 1993년 사망했다. 그의 사망을 보도한 위 《중앙일보》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고문 도중 한때 혀를 깨물고 자결을 시도할 때 부러진 의치를 이씨의 부인 권혁모 씨(60)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권혁모 여사 역시 돌아가 남편 곁에 묻힌 지금 그 의치의 행방이 궁금하다. 온 나라에 어둠이 참혹하게 내려앉던 시절 그 어둠의 무게를 버티고자, 그에 지지 않고자 이를 악물었던 한 사람의 소중한 증거이자 유신이라는 암흑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낸 보석 알갱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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