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에 대한 두 비판

in #kr3 years ago

오징어 게임에 대한 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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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의 열풍이 가히 세계적이다. 프랑스에서 열렸다는 뽑기 (달고나, 쪽짜) 이벤트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렸다는 얘기 들으며 싱긋 웃었다. 니들 딱지 접을 줄도 모르지? 시즌2에서 고무줄 뛰기나 말뚝박기 나오면 아마 까무라칠 거야 하면서 말이다. 허어 이 무슨 때아닌 문화적 우월감(?)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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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지난 추석 연휴 하루를 이 드라마 때문에 '순삭'했다.. 특이한 것은 감독의 필모그래피였다. <도가니>를 벗어나 <수상한 그녀>를 만나고 <남한산성>에 올랐다가 <오징어 게임>으로 대박을 쳤다니 특이하고도 관심가는 재능을 지녔다 싶다. 이런 저런 단점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어느 드라마든 흠이 없고 하자가 드물겠는가. 그런데 이 드라마를 비판하는 이야기들 중 뜨악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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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야기를 옆으로 새면 소설 <태백산맥>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선을 누비며 전쟁의 참상과 미제의 만행을 문학으로 형상화하고 싶은 문예 일꾼들이 등장한다. 하루는 폭격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목도하고 그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절절히 묘사했는데 선배라 할지 지도일꾼이라고 해야 할지 하는 사람이 대충 이런 지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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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훌륭한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돼요. 슬픔만 절절하게 묘사해서는 안돼. 그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아냐. 죽은 아이를 부여안고 하늘을 바라보며 "이 승냥이 같은 미제놈들아. 이 어미는 너를 위해 미제와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그런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 거요 . 그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요. (상세 묘사는 찾아보지 않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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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남한에서 명함 걸고 활약했던 얼치기 문예 평론가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꽤 됐다. "노동 계급의 전형 창출에 실패했어요. 노동계급을 너무 연약하게 묘사했어요. 과학적 세계관이 부재해요. 이건 부르조아적 세계관의 반영이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걸맞지 않아요." 라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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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자신의 이념에 걸맞지 않는 예술은 미성숙한 것이고, 심지어 불량하기까지 한 것으로서, 자신들의 훈계와 지도 편달을 받아 교정돼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었겠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을 비판하는 두 주장에서 나는 이들의 향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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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비판.
"‘오징어 게임’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과 탐심, 생존 본능을 들추어내고자하는 의도라면, 왜 굳이 기독교인만을 특정하여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국내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드라마라고 하는데, 그들의 눈에 기독교의 모습이 어떻게 이미지화 되었을지를 생각하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소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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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등장하는 웃기는 짜왕같은 기독교인들에게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런 사람들을 수태 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나쁜 놈들은 종교를 가리지 않고 많은데 유독 기독교인을 '특정'하게 되는 것은 기독교의 특징이 '과시'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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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믿슙니다."를 부르짖는 불자 없고 "부처극락 불신지옥"을 앰프에 대고 떠드는 스님도 없으며, '절에 가자 안그러면 지옥간다.'라고 강요하는 보살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기독교인은 어디 갖다 놔도 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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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나쁜 기독교인들이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하고, 더구나 (현금 동원력에서) '소리없이 강력한' 불교와는 달리 소달구지 자갈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삼박자 축복'을 얘기하는 기독교 목사들의 비리가 더 생생히 드러나는 건 당연한데..... 하다못해 이근안이 목사가 되는 한국 기독교에서 목사 질이 떨어지는 건 뻔한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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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아니 이해를 하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에 어긋나는 일에 화를 내는 것이다. 바로 전두환의 심리다. "왜 나만 갖고 그래." 그리고 언젠가의 전두환처럼 호통치는 것이다 “말조심해 이놈아.” 동시에 위에 언급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패거리들의 속내이기도 하다. 자기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인상부터 찡그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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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타자. 한국일보에 난 기사를 읽다가 또 한 번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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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 오징어 게임이 전제하는 세계관과 여성을 바라보는 태도가 불편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2021년에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여성 캐릭터를 그리다니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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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많이 말해왔는데…. 공부를 하나도 안 한 것인가? 한미녀(김주령)의 캐릭터는 너무 기괴하고 작위적이라서 살아있는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한미녀는 “못하는 것 빼곤 다 잘한다.”면서 무리의 가장 힘 센 자에게 섹스를 제공하고 안전을 약속받는다(곧 배신당한다).

극한 상황에 처한 여성이 그토록 기꺼이 섹스를 안전과 교환할 것이라는 발상은 남성의 상상이다. 실제 상황에서 여성은 오히려 섹스 때문에 안전을 위협받는다. 살아있는 여성이라면 힘 센 남성에게 섹스해주겠다며 먼저 다가가기보다는 공격성이 극에 달한 남자들 사이에서 매일 밤 강간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떨 가능성이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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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도 '나의 경우'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찬미하던 태백산맥 속 문예일꾼을 떠올리게 된다. 본인이 불편한 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본인의 불편함 여부가 ‘정확함’의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고, 본인 생각에 ‘2021년에는 이래야 하는 방식’이 사람들에게 생소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하물며 그걸 ‘공부를 안했나?’라고 묻는 건 그야말로 ‘동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몰라’ 하는 앙칼진 호통과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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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글쓴이가 말하는 ‘여성적 관점’으로 한미녀의 캐릭터가 기괴하고 작위적인 건 사상적 관점의 자유로 인정해 주겠는데, 그걸로 드라마 속 캐릭터를 몹쓸 것으로 상정하는 행위에는 동조해 줄 수 없다. 극한 상황에서 여성이 (‘기꺼이’는 절대 아니겠으나) 섹스를 댓가로 위협을 모면한 역사적 케이스는 무수하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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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남성의’ 상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시겠지만 남성들 그렇게 창의적이지 않다. 그 현실 자체가 구역질나고 참담한 것이고, 물리쳐야 할 상황이지만 세상에 없는 캐릭터를 오징어 게임의 감독이나 ‘남성’들이 상상하여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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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여성이라면 힘 센 남성에게 섹스해주겠다며 먼저 다가가기보다는 공격성이 극에 달한 남자들 사이에서 매일 밤 강간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떨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표현에 이르면 이제 글쓴이의 편견을 의심하게 된다. 글쓴이가 볼 때 한미녀같은 여자는 '이미 죽은 여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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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자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윽박지르던 사람들, 나아가 자신의 머리 속 상상을 현실에 대입하고 자신의 이념적 가치를 위해 현실을 왜곡시켰던 ‘문예일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뜻이다. 자신이 믿는 가치가 진실이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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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두 부류를 욕하게 됐지만 불현듯 드는 생각은 이 두 부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주관적 가치에 따라 사실을 재단하고, 그에 따른 형상을 저마다 만들어 “우리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옳소 좋아요 훌륭해요 멋져요 찬미하고 그에 반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인간 이하 내지 파렴치한 또는 매국노로 몰아붙이는 이상한 풍속이 유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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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항상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건 이러이러해서 나쁜 생각이고, 모자란 생각이고 역적놈들을 돕는 생각이고 말이 안되는 생각이에요..” 그럼 나는 오징어 게임의 1번 참가자처럼 반문할 밖에.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건 말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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