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반환 그리고 구룡성 이야기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홍콩은 대개 미묘한 땅이었다. 아편전쟁 이전부터 영국인들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위한 작은 섬이나 지역을 청에 요구하고 있었고 아편전쟁으로 '잠자는 사자'를 '잠자는 돼지'로 만들어 버린 후 이 요구를 현실화했다. 홍콩을 확보한 것이다. 그 뒤 홍콩의 영역은 몇 차례의 조약에 따라 점차 넓어진다. 1860년에는 구룡 반도가 할양되고, 1898년 제 2차 베이징 조약에 의해서 인근의 신계 지역을 '99년 기한'으로 조차함으로써 '영국령 홍콩'의 실체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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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중국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영국령. 동서양의 끝과 끝이 만난 이 운명의 땅은 굴지의 자유무역항으로서 환락과 번영이 범죄와 부패가 오묘하게 공존하는 일종의 '퓨전 랜드'가 되었다. 뭔가 비정상적인(?)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으로 "홍콩 간다."는 속어가 쓰인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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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빚어낸 이 경계 모호한 땅 속에는 더욱 애매한 이야기 하나가 숨어 있다. 구룡성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다. 17세기 이래 구룡성은 해적을 감시하고 소금 생산을 관리하는 작은 요새였다. 그런데 아편전쟁 후 홍콩 섬이 영국령으로 넘어가면서 요새의 성격은 대홍콩 감시 및 전진 기지로 바뀐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1898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구룡반도 대부분을 영국이 장악하면서 구룡성은 고립무원의 섬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20세기의 서베를린처럼.
영국령에 포위된 구룡성이었으나 중국은 그 영유권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정권이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 다시 인민공화국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구룡성의 형식적 주인은 중국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행정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영국도 구태여 비용을 들여 구룡성을 점령하고 다스릴 의사는 없었다. 이 내용 없는 고집과 이유 있는 방임의 가운데에서 구룡성은 서세동점의 시기 내내, 그리고 특히 중국 공산화 이후 홍수처럼 밀려드는 민중들의 삶의 터전으로 화하고 지상 최대의 슬럼가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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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묘하고 음울한, 그리고 희망도 대책도 없는 빈민굴은 많은 문학과 영화 작품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영화 <아비정전>에 등장하는 빈민가의 모델이 바로 이곳이며 주성치의 영화 <풍푸허슬>에 나오는 ‘돼지촌’은 구룡성의 축소판이었고 클래식이 된 리들리 스코트의 <블레이드 런너>와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도 이 구룡성의 이미지를 차용해 갔다. “아편굴투성이에 쥐떼가 득실거리고 치외법권 지역인데다가 무척 위험하죠. 홍콩의 ‘sin city'랄까.” ’아비정전‘에 출연했던 양조위의 말이다.
주인이 없는 땅이 혼돈으로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중국도 영국도 홍콩 당국도 책임을 지지 않았던 이 공포의 치외법권 지대에서 치안을 장악한 것은 놀랍게도 범죄 조직 삼합회였다. 법의 지배가 없으니 가능한 형태의 모든 불법이 허용됐고 중국과 홍콩 양쪽의 범죄자들이 구룡성으로 무더기로 스며들었다. 면허 없는 의사도 버젓이 영업을 할 수 있었고 마약이나 매음 같은 것은 이야기할 꺼리도 못되었다. 구룡성 문제에 골머리를 앓던 홍콩 정부는 마침내 1974년 3천명의 대테러 부대를 투입, 삼합회를 몰아낸다. 하지만 삼합회의 공포가 사라지자 인구 유입은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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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인구를 좁은 면적에 수용하려면 고층 건물을 올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근처의 카이탁 공항 때문에 15층 이상은 지을 수 없다는 기준이 있었다. 그 결과 빌딩들은 콧김이 느껴질 만큼 다닥다닥 늘어섰고, 그 그림자는 대낮에도 시커맸다. 그래도 인구는 점점 더 유입되었고 급기야 세계 최악의 고층 슬럼가가 형성되고 말았다. 8천평 정도의 땅에 3만 5천 명이 거주한다는 통계가 있었고, 1인당 생활 공간이 우리 나라 고시원 방보다 좁았으니 (1.1평 정도) 그 심각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낮에도 햇볕도 들지 않는 골목길에 인파는 들끓었고 범죄와 마약은 계속 기승을 부렸다. 고양이만한 쥐들과 슬리퍼만한 바퀴벌레들이 천진한 아이들과 함께 뛰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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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당국은 86년 경찰을 파견하여 실효적 지배에 나섰고 이후 92년에는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을 통해 이 일대를 '공원화'한다. 일찍이 청 황제 건륭제가 통상을 청하는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저 멀리 7개의 바다를 건너 벽촌의 나라에 살면서 우리 문명의 자비를 얻고자 사신을 보낸 것을 치하”했던 것이 1792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50년 뒤인 1842년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영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홍콩을 할양한다. 그 질풍 같은 역사가 만들어낸 동과 서의 접점이자 애매한 점이지대로서, 또한 동과 서 양쪽에서 외면받았던 구룡성의 악취가 1992년 이후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1997년 7월 1일 성사된 홍콩 반환의 전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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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구룡성이 그 불결함을 과시하고 있었던 1982년 등소평은 영국 방문길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홍콩의 주권을 회복 못한다면 그 어떤 중국지도자도 중국인민과 세계인민에 대해 낯을 들 수 없을 것이고 그때 중국 정부는 청나라 정부와 다를 바 없으며 그 지도자는 리훙장(청나라 때 정치가)일 뿐이다." 이는 그 이후 중국이 지속적으로 내세운 불퇴전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7월 1일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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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신계 지역을 제외한 홍콩 섬은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영구 조차지였다. 난징 조약에 따르면 그랬다. 하지만 영국은 신계 지역과 함께 모든 것을 반환한다. 물론 영국이 마음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구와 산업 시설이 신계 지역에 있는데 ‘영구조차지’라고 홍콩 섬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55년 동안 중국에 드리웠던 대영제국의 그림자가 거두어지던 날, 중국과 영국은 대단한 신경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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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0일 밤, 강택민 전 주석과 영국의 찰스 황태자의 회견이 예정되어 있었다. 영국측은 반환 전까지는 홍콩이 영국 영토이기에 회견의 주최자는 찰스 황태자라고 주장했지만, 중국은 강택민 주석이 ‘손님’으로 회견장에 앉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다. 결국 황태자와 주석은 동시에 입장해서 주객 구분 없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게 된다. 또 중국의 국가가 7월 1일 0시 0분 1초에 연주될 예정이었지만 중국측은 이것도 고집을 피워 2초를 앞당겼다. 6월 30일 11시 59분 59초에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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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의용군 행진곡 (중국 국가)의 선율 속에서 중국의 굴욕의 역사에는 종지부가 찍힌다. 서양 사람들이 ‘잠자는 돼지’가 된 중국을 분탕질하고 땅을 빼앗아 서양식 건물들을 즐비하게 올릴 때, “너희들이 천 년 만 년 있을 것이냐, 결국은 돌아가고 그곳은 다시 우리 땅이 될 거다.”라고 뇌까렸다는 중국 고관의 소회는 ‘적중한 예언’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영국령 홍콩은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홍콩보다도 더욱 애매했던 땅 구룡성의 전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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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mbc 서프라이즈에서 주제로 다뤄줘서 본 것 같아요.
이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