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이항복 -한승헌 변호사의 명복을...

in #kr2 years ago

우리 시대의 이항복 - 한승헌 변호사님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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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 위인전들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엄숙하고 과묵하며 중후하기만 해서 재미없지 않냐는 푸념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백사 이항복 같은 예외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말 한 마디로 사람들 배꼽을 흘리고 뒷머리를 긁적이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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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업무에 임하기를 (보통 사람들이) 술과 여자 탐하는 것처럼 했다.”고 적은 것도 한 예가 되겠다. 충무공 모시는 제사에서 누군가 이 대목을 읽었더라면 엄숙한 분위기는 단번에 파장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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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 이덕형이 아버지에게 별장을 선물하자 이항복은 굳이 그곳을 찾아 인사하고 이덕형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 ‘맑고 맑은 집’이라는 ‘청청당’(淸淸堂)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지어 준다. 그런데 근무 마치고 돌아온 이덕형은 머리를 짚는다. “아 이 자슥. 고약한 장난을 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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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에는 조청, 석청 등 ‘꿀 청(淸)’의 뜻도 있는 바, 청청당이라면 꿀꿀이집이라는 비아냥도 성립하는 것이다. 청백리 명단에 올라 있는 이항복이 아버지에게 별장을 지어 바칠 정도로 효심이 깊은 이덕형에게 한 방 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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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어릴 적 짐승 같이 놀았다며 어지간한 악동이었음을 고백했고 “해학이 지나쳤다.”는 평가까지 들은 이항복이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대환난기의 명신으로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고 그 어떤 진지하고 중후한 관료보다 실무적으로도 뛰어났던 사람이었다. 병조판서를 맡아 국방을 책임지기도 했고, 명나라 장군들의 접대를 도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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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들은 어느 시대에나 도드라지게 빛나는 법이다. 필요 없이 진지하고 필요 이상으로 심각한 사람들투성이인 조선 땅에서는 말이다. 우리들의 현대사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능력과 용기와 결단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분들은 많지만 비슷한 업적을 쌓으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에게 여유를 불어넣을 줄 알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이끌어 낼 줄 아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오늘 그 중 대표적인 한 분이 총총 세상과 이별하셨다. 고 한승헌 변호사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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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살아생전 행하신 일, 쌓아온 업적과 세운 공훈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될 것이니 따로 보태지 않겠다. 한승헌 변호사는 엄혹하고 어려웠던 시기를 그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어루만질 줄 알았던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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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표현대로라면 “오랜 군사독재 문화, 즉 '차렷!' 문화에만 너무 익숙한” 한국 사람들에게 “열중쉬엇, 편히 쉬엇!'의 여유”를 선사할 줄 알았다고나 할까. 그 영면을 맞아 슬프고 아쉬운 마음 크지만 그분의 살아생전 여러 번 구사하신 ‘편히 쉬어’의 몇 토막들을 되새기며 고인을 기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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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나간 적이 있었다. 짧은 시간에 통역을 쓰면 할 말을 못할 것 같아 일본어로 강의를 하겠노라 밝힌 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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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내가....또 일본어를 완벽히 했다면 그건 일제통치가 얼마나 지독했는가의 증거구요. 만약 내 일본어가 엉망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치 통치가 실패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겁니다.” 일본인들 ‘편히 쉬어’ 하며 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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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었지요?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MEN’(복수형)이라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 오면 같이 들어가려고 기다리다가 늦었습니다. 미국 갔을 때는 신호등에 ‘Don’t Walk’라고 불 들어오길래 (걷지 않고) 뛰어 건너다가 혼났어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가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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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주보에 찬송가 제목이 인쇄돼 나오는데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에서 ‘주’가 ‘중’으로 잘못 인쇄된 거예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중의 크신 은혜라. 아 덕분에 개신교와 불교가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예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마다 아멘과 아미타불 부르짖으며 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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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로 고생하는 한승헌 변호사에게 아직도 감기 안 나았느냐고 묻자 한승헌 변호사 이렇게 대답한다. “내 감기는 주한미군이야.” “네? 갑자기 무슨....” “한 번 들어와서는 나갈 생각을 안한다니까.” 몰아내자 몰아내자 주한(駐韓)감기 몰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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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례식장에 가서......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다 알겠는데 말이지...... 도난주의는 무슨 주읜가?” 상주부터 문상객까지 다 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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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해 축가를 부른 성악가 조수미씨가 김대중 대통령을 뜨겁게 끌어안으면서 큰 박수를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한승헌 당시 감사원장 왈 “조수미씨가 해외에서 오래 살더니, 디제이의 ‘포용정책’을 ‘포옹정책’으로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감?” 무심히 듣던 사람들 의자에 머리 대고 깔깔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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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라는 단어가 골프의 대명사로 쓰이고 ‘운동하십니까?’가 ‘골프치십니까’로 해석되며 ‘운동 가십시다’가 ‘필드 나가십시다’로 번역되는 대한민국의 어느 날, 한 사람이 한승헌 변호사에게 물었다. “요즘 무슨 운동하십니까?” 한승헌의 대답 “아 저는 변호사라..... 석방 운동합니다.” 운동 운운했던 사람 순간 동공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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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독재 시절 판사가 검사의 구형량 그대로 판결을 내리는 걸 보고 한 마디
“아니 정찰제는 백화점에서 해야지 왜 재판정에서 합니까. 우리나라 정찰제는 법원에서 다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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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저작권 포럼에서 영국 대표가 한국을 두고 해적 출판물 국가라고 흥분했을 때.
“허허 영국분이 조상을 모독하시면 되겠습니까.” 영국 대표 요즘 말로 데꿀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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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이 푸념을 했다. “청와대는 감옥 같은 곳이오.” 그러자 한승헌 감사원장이 대뜸 받아친다. “다르죠. 감옥은 들어갈 때 기분 나쁘고 나올 때 기분 좋은 곳인데 청와대는 그 반대잖아요?” 천하의 김대중도 잠시 눈 껌벅껌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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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로 본인을 소개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 마디. “변호사는 인권변호가 본연의 업무인데 그럼 다른 변호사는 이권 변호사입니까? 자꾸 인권변호사 인권변호사 하지 말아요. 그런 말이 없어져야 민주주의 사회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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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정치인들에게 이런 당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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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성원들이 유머와 여유를 갖고 갈등을 잘 조절해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제발 살기띤 어조로 막말을 하거나 매도에 가까울 정도로 몰아붙이는 것을 피했으면 좋겠어요. 의회가 공론의 장인데 툭하면 성질부리고 몸싸움하고 욕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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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은 한승헌 변호사가 한창 활동할 때보다도 유머는 사라졌고 해학 역시 실종 중이다. 남아 있는 건 갈라치기와 서로간의 혐오, 서로를 멸절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강퍅함 뿐. 그래서 더욱 고인이 아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분이 설파하셨던 바 ‘편히 쉬어’가 만발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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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과 비슷한 또 한분....월남 이상재 선생 이야기 보시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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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지식인은 엄숙만 할게 아니라 해학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만큼 사회가 더 건강해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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