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 31일 후라이보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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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 31일 후라이보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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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사어(死語)에 가깝고 부산 지역에선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지만 1988년 서울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아주 가끔 “후라이 까지 마라.”는 말을 들었다. “거짓말 하지 마라.”는 뜻인데 얼마 전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보는데 북한 인민군과 주민들이 “후라이 까지 말라”는 말을 쓰는 걸 보고 슬며시 웃었다. 저 말이 이북에선 저렇게 펄펄 살아 숨쉬고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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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짓말을 후라이라고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밀가루 반죽으로 튀김옷을 입히고 튀기면 본래 모습보다 커다란 모습이 된다는 의미로 ‘fry’를 쓴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꽤 오랫 동안 한국 사람들은 ‘후라이’라는 말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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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에게 후라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뜻보다는 한 다재다능한 연예인의 얼굴을 먼저 떠오르게 만든다. 바로 후라이보이 곽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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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TV에서 볼 즈음엔 이미 그의 전성기가 살짝 지난 MC였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연예계를 은퇴하고 미국으로 가 버리게 되지만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로 시작하는 그의 오프닝은 매우 강렬했고 TBC의 <쇼쇼쇼>는 가수들이 아니라 그를 보기 위해 곁눈질했던 프로그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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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라이보이는 ‘뻥치는 소년’의 뜻은 아니라고 한다. 그의 ‘무대 체질’을 처음 체험케 해 준 공군 정훈국 출신으로서 ‘Fly Boy’를 별명으로 삼은 것이 당시까지도 우세했던 ‘식민지 발음’의 영향으로 ‘후라이보이’가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플라이보이’ 하면 도무지 곽규석이 떠오르지 않는다. 김태식이나 박찬희 같은 왕년의 권투 플라이급 챔피언등이면 몰라도 곽규석은 그저 ‘후라이보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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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초’라는 단어와 매우 친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스탠팅 코미디’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고 한국 최초의 라디오 전화 퀴즈쇼 ‘다이얼 Y를 돌려라’의 MC였으며 한국 최초의 ‘전문 MC’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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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코미디 포맷이지만 예전에는 두 사람의 콤비 입담꾼이 나와 순수하게 ‘입으로 털며’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만담 코너가 많았다. 장소팔과 고춘자가 그랬고 백남봉과 남보원이 그러하며 ‘막둥이’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도 그런 콤비 중 하나였다. 구봉서는 어느 인터뷰에서 후라이보이 곽규석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나는 코미디언이고 곽규석은 MC잖아. 길이 다르니 라이벌 의식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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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이건 콤비건 둘은 항상 ‘세트’로 보였다 오죽하면 신문에 이런 라이벌(?) 대결 기사가 다 나왔을까. “두 코미디언은 우연히 충무로가에서 만나 서로를 칭찬,주위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그내용이 자못 흥미로운것. 다음은 그대화를 통해 밝혀진두사람의 비교된차이점들. ▲구봉서 :월수 1백만원,출연료 TV및 라디오 모두A급. 저택 4천만원상당, 아들4형제이나자신이 출연한 것 일체 시청 금지. 당45세. ▲곽: 월수 30만원,출연료A급. 1천2백만원짜리저택소유. 1남2녀 자녀가 자신의 출연장면을 보아도 좋다고 허가. 당43세. 구군은 TV,라디오,영화에 넓게 출연하나 곽군은 주로 MC를 담당.수입이 구군보다떨어진듯.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공처가(?)라는 점” (매일경제 1970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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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무원 월급이 1만원을 조금 웃돌았으니 예나 지금이나 스타들의 화려한 삶은 다른 것이 없다. 고 구봉서 선생이 집안에서는 농담 한 번 한 적 없고, 아이들도 무릎을 펴고 앉아 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는데 자식들에게 자신의 출연 모습을 보는 것조차 금지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아버지를 우습게 볼까 저어하신 것일까. 일종의 가부장의 몽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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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곽규석은 그런 틀로부터는 자유로웠던 것 같다. 자신의 출연 모습을 ‘허가’하고 있었으니까. 사람을 웃겨야 하는 코미디언과 출연자들을 쥐고 흔들며 좌중을 주도하는 MC의 차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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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개그맨이라 할 전유성은 곽규석을 통해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친구들로부터 코미디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전유성은 그야말로 무작정 방송국을 찾아가 곽규석을 찾았지만 당연히 상큼하게 쫓겨난다. 그래도 틈을 노리던 전유성은 화장실에 가는 곽규석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필시 우리가 아는 그의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거 코미디 원고 누가 써요? (참 못쓰네) 다음에 제가 써 올게요.” 그리고는 휙 나가 버렸다. 천하의 후라이보이도 저거 뭐지? 어안이 벙벙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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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전유성은 코미디 원고를 써서 전달만 부탁하고 왔는데 방송을 듣던 전유성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곽규석의 멘트에 반영됐음을 알게 된다. 힘을 얻어 방송사에 찾아가서 곽규석을 만났는데 곽규석은 즉석에서 전유성을 회계 담당자로 발탁하고 “엄청나게 큰 돈”을 단숨에 맡겨 버렸다고 한다. 전유성이야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 준 대선배에 감읍할 따름이었겠지만 이런 모습은 사업가로서는 그리 탐탁한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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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MC로만 나갔으면 그는 우리 방송사의 더 큰 전설이 됐을 테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광고 등 사업에 손을 댔고 쫄딱 말아먹고 곤궁에 처한다. 이웃해 살던 구봉서의 말에 따르면 “부도가 나서 집을 뺏기고 일본으로 도망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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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동앗줄처럼 붙잡은 것이 종교였다. “부인도 낙담해 앓아눕고 있다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기도 받은 지 열흘 만에 치유 되어 예수에 미쳤어요. 부부가 막 방언하고 그런 케이스예요.” (구봉서) 이 부부는 숫제 구봉서의 집에 들어와 살면서 구봉서의 부인을 전도했고 급기야 알아주던 술고래 구봉서까지 전도한다. 그리고 한참 화려하게 장식한 연예계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서 후라이보이 아닌 곽규석 목사로 살다가 1999년 8월 31일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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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주황색 삼양 라면보다는 농심 라면을 좋아했다. 이유는 오로지 구봉서와 곽규석의 광고 때문이었다. 당시 농심라면의 포장지에는 당시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온 형제의 일화, 즉 추수한 벼 나락을 서로의 집에 갖다 주다가 밤길에 딱 마주치는 순간의 그림이 박혀 있었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광고 컨셉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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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끓인 라면을 두고 곽규석과 구봉서는 형님먼저 아우먼저 하고 먼저 드시라고 양보를 반복하다가 곽규석이 능청스럽게 그럼 네가 먼저 하면서 라면 그릇을 가져간다. 그때의 곽규석의 득의양양함과 구봉서의 낭패난 표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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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먹는데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흉내를 내며 처음 “네가 먼저” 했더니 대뜸 그럼 내가 먼저 하면서 후루룩 먹어치우던 놈의 뒤통수도 눈에 선하다. 아마 그때 내 표정은 구봉서보다 더 황망했을 것이고 녀석은 곽규석보다 더 맛있게 라면을 들이마셨다. 지금도 보글보글 끓여 그릇에 수북히 담아 젓가락을 꽂을라치면 이따금 곽규석과 구봉서의 광고가 자동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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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규석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소재에서 예상치 못한 꼬투리를 잡아 사람들을 웃기는데 능했는데 그 실력을 언젠가 한 번 주례할 때 발휘한 적이 있다. 주례단에 서서 엄숙한 어조로 주례사를 늘어놓은 끝에 이렇게 불쑥 물어 버린 것이다. “신부는 주례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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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신랑을 사랑하는가가 아니고! 안그래도 혼이 나간 신부가 (결혼식 때 정신 제대로 있는 신랑 신부 나와 보라 그래) “네!”라고 얼떨결에 대답하자 곽규석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주례를 사랑하면 됩니까 신랑을 사랑해야지? 험한 세상 정신 똑바로 차리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세요.” 역시 ‘후라이보이’다운 주례사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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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규석이 기일 야참으로 농심 라면을 끓일까 말까 하며 그의 생애를 잠깐 돌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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