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설일 떠올리는 노씨 가문

in #kr4 years ago (edited)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설일 떠올리는 노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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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허무하게 망하긴 했지만 20세기 초반 대한제국은 부국강병 중 부국(富國)은 몰라도 강병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억지스러웠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국가 예산의 거의 절반을 국방비에 쓸어 넣는 정성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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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육성한 대한제국 군대는 의화단 잔당들이 국경을 소란스럽게 할 때나 간도를 둘러싼 분쟁에서는 꽤 야무진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 앞에서는 군대 해산 당일의 남대문 전투를 제외하면 조직적 저항을 해 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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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수만 명을 헤아린 군인들 가운데 어찌 군인다운 군인들이 없었을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의병 사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한 장면으로 유명해진)의 중앙에는 칼을 어깨에 댄 기병대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는 군복 입은 남자가 서 있다. 이름모를 그는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리라. 군대 해산의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박승환 참령도 있었고 후일 노백린이라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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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은 황해도 송화 출신이다. 풍채 좋고 총명했던 그는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에 유학, 게이오 의숙을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군인의 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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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귀국한 그는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하는데 성격이 여간 괄괄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진 후 일본인들과 을사5적 등 매국노들이 연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노백린이 이완용 등을 보고 손짓을 하면서 이렇게 입술을 내밀었다. “워리워리 쫏쫏.....” 그들을 개 취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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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한 일이 있어서인지 험악한 얼굴의 군인이 두려워선지 매국노들은 얼굴만 붉힌 채 아무 말도 못했는데 이것을 본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츠가 벌컥 화를 내며 칼을 뺐다. 좌중이 얼어붙은 가운데 노백린 역시 지지않고 칼을 스릉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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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다섯 하세가와와 서른 혈기 넘치는 노백린이 칼을 맞대 상황. 여기서 이토 히로부미가 뜯어 말렸다고 한다. 을사늑약 체결 축하연에서 피를 본다는 건 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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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은 이후 신민회 활동을 하는 등 국권회복 운동을 하다가 경술국치 이후에는 망명을 떠난다. 그런데 그의 행로는 좀 특이했다. 중국으로 갔다가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그는 한국 청년들을 모아 군사 조직을 결성했는데 특이한 대목은 그가 보여준 공군(空軍)에 대한 관심과 선견지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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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을 목도한 한국 교포들이 공군의 필요성을 설명했고 노백린은 그걸 재빨리 알아먹었다.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장을 지배한다.” 미국 교포 사상 최초의 백만장자라 할 캘리포니아 ‘쌀의 왕’ 김종림의 도움으로 비행학교를 세우고 조종사를 양성한다. 그의 꿈은 일본 폭격이었다. “독립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으로 날아가 도쿄를 쑥대밭이 되도록 폭격해야 한다.” (이 꿈은 미국에 의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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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림의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비행학교는 문을 닫고 노백린은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군무(軍務)를 맡는다. 그의 꿈은 자나깨나 승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남대문에 말 타고 들어가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 괄괄한 군인의 자식들에게 독립운동은 일종의 가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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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노선경은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대한독립단원으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3년 넘는 옥고를 치렀다. 그 여동생 노숙경은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의사 이원재와 결혼해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도왔고 또 하나의 자매 노순경은 3.1항쟁 당시 시위를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군대 해산 때 자결한 박승환의 아들과 박정식과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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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정식도 세브란스 병원 의사였고 병원을 운영하며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노백린의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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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창립된지 얼마 안돼 만신창이가 됐다. 대통령 이승만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조직은 없느니만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이었다. 지역 감정은 당시에도 무지하게 심각했고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갈등도 상상 이상으로 치열했다. 서로 팔뚝질과 주먹질을 하고 축고 죽이기까지 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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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은 절망했다. 괄괄하고 자존심 높았던 그는 “내가 이러려고...... 임시정부에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1926년 그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라는 말도 나온다. 대한제국의 노병은 끝내 칼 차고 말 타고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직할 병력 하나 없는 망명 정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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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한제국 마지막 군인이 돌아가고 14년 뒤, 1940년 9월 17일에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산하의 무력 기구를 정식으로 출범시키게 된다. 한때 노백린이 몸담았던 미주 한인 사회의 지원, 그리고 무엇보다 장개석의 승인을 얻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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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17일 가릉빈관에서 진행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는 중국의 ‘국공합작’을 그대로 옮겨온 자리였다. 중경 지역 위수 사령관 유치, 중공의 영원한 2인자 주은래 등이 참석했고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이 회장인 중국 부녀위문회에서 10만 위안을, 장개석은 축하 메지시를 보냈다. 그리고 광복군의 일원으로 노백린의 아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노태준 (1911~1970) 이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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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광복군은 미국군과 합작으로 공동 작전을 계획한다. 이른바 독수리작전. CIA의 전신인 OSS가 세운 계획은 3개월간의 특수 훈련을 거친 광복군을 식민지 조선 곳곳에 잠입시켜 일제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지하군을 조직하며 정보활동을 전개하다가 미군 상륙부대와 연합하여 본토 수복작전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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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준 역시 충청도와 전라도를 맡은 제 2구대를 맡아 맹훈련을 받았고 준비를 끝냈으나 작전 돌입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맥이 풀려 버렸다. 아버지의 소원처럼 말 타고 남대문을 들어가고 싶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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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펼쳐졌으면 우리도 승전국이 될 수 있었으리라 주장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광복군과는 비교가 안되는 병력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폴란드도 전후 찬밥 아니 쉰밥 대접을 면치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또 광복군을 망명 군대로 실체가 없는 군대였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광복군의 의미는 적지 않다. 광복군은 1919년 이래 명맥과 법통을 유지해 왔고 후일 해방된 대한민국 헌법이 명기한 정통성의 보유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군이었다. 한계가 컸으되 결코 그 의미를 덮을 수 없는 군대. 그리고 아버지가 평생에 소망했고 기어코 아들이 그 일원이 됨으로 꿈을 이룬, 숙원의 군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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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정해진 뒤에 수십 년이 지났으면 역사성라는 것이 생기고 그 또한 후대의 입맛대로 바꿔서는 안된다고 여기는 편이지만 국군의 날 만큼은 별로 의미가 없고 그 유래도 좀 민망한 10월 1일보다는 9월 17일로 바꾸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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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성화를 부리는데 38선을 한국군 자의로 돌파하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중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핑계를 짜내 38선을 넘어갔던 날이 무에 그리 영광스러워서 대한민국 국군의 경축일로 삼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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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군대가 무슨 군대냐고 코웃음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보잘것없고 상대 안 는 싸움에 목숨을 걸었고 수십 년 동안 지지리궁상 떨면서도 투지를 놓치지 않았던, 그래서 끝내 군대를 조직해 냈던 사람들의 마음이다. 정신이다. 1940년 9월 17일은 그를 기리기에 가장 적절한 날 중 하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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