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그 님은 누구일까 2

in #kr4 years ago

사람은 변하지만 또 변하지 않는 존재죠. 그런 모습은 가정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승려의 결혼을 주창했지만 정작 본인은 쉰 다섯에야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의 두 번째 배우자가 된 사람은 무려 열 아홉 살 연하의 간호사 유숙원이었습니다. 시인 고은에 따르면 유숙원은 만해가 돌아간 뒤에도 만해 가족들을 도왔던 산부인과 의사 정자영이 하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였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정자영의 모친이 중매를 섰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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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본인이 마다하면 성혼이 되지 않았을 테지만 둘 사이는 애틋한 남녀관계보다는 유숙원이 한용운 ‘선생님’을 하늘처럼 모시고 사는 쪽에 가까웠을 것 같습니다. 출가 후, 아니 출가 이전부터 한용운은 그야말로 부초(浮草)처럼 떠다니는 인생이었습니다. 설악산 오세암으로 출가한 이후 시베리아, 설악산 백담사, 건봉사, 금강산 유점사, 표훈사, 만주 등 사방팔방을 오가며 정착하지 못하고 생활하던 한용운에게 유숙원과의 결혼 생활 11년은 그의 삶에서 보기 드문 ‘정착’이었습니다. 만해에게 말년의 안정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유숙원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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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원은 삯바느질과 빨래품 등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않고 가정을 지탱해 나갔지요. 한용운이 어디 가서 돈 벌어 올 사람도 아니었고, 총독부나 다른 친일파 인사들에게 고개를 숙일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요. 총독부 보기 싫다고 집을 북향으로 지어 버려서 온 식구가 오들오들 떨며 지내야 했고 아내는 늘상 찾아오는 손님들 접대하느라 술을 항상 채워 놔야 했습니다. 최린 같은 이가 집에 들러 딸에게 돈이라도 쥐어 주면 그 돈을 쫓아가서 내던져 주고 왔던 서릿발 같은 대꼬챙이를 모시고 살면서 유숙원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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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5월 5일 경향신문에는 유숙원 여사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군산의 유지들이 돈을 모아 전달했다는 보도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유숙원 여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하에 계신 고인이 여러분께 이런 폐를 끼치는 걸 알면 얼마나 분격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 마디는 여러 상황을 짐작케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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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바싹 마르다 못해 손만 대면 바스락 부러질 듯 한 대꼬챙이. 성격은 불 같고 사사로운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 한용운이 어떻게 <님의 침묵>같은 시를 쓰게 됐을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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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이 <님의 침묵>을 썼던 건 1925년 장마와 여름 어간의 백담사에서였습니다. 그 해는 우리 역사에 악몽처럼 남은 대홍수, ‘을축년 대홍수’의 해였죠. 한강 인도교가 떠내려가고 남대문까지 물이 들어차고 한강의 물길까지 바꿔 버려 조선 시대 이래 번화했던 송파나루를 흔적도 없이 없애 버렸던 가공할 홍수. 그 지루하고 무서운 장마 속에서 한용운은 88편의 시를 써냅니다. 그 중에 <님의 침묵>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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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고등학교 수업 시간 이후 최대의(?) 미스테리. “시 속의 ‘님’은 누구일까.” 물론 우리가 배운대로 ‘조국의 광복을 그리는 마음’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인 고은이 쓴 한용운 평전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님의 침묵>을 쓰기 전 설악산 일대에서 수도할 무렵, 그는 한 여인을 만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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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건봉사를 비롯해 서 설악산에서도 잘 알려진 아름다운 보살계 수계(受戒) 신도였다. 선주였던 남편이 해난 사고의 충격으로 요절한 뒤 남겨진 부유하고 젊은 미망인이었다. 해제일(解制日)을 기해서 그녀는 남편의 영가(靈駕)를 위로하는 커다란 법회를 열었다. 며칠동안 범패까지도 경향의 명인들을 불러서 들려주는 대규모제였다. 거기서 그녀는 다른 스님들과는 달리 쌀쌀하고 입을 꼭 다문 키 작은 한용운에게 마음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용운 평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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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내세를 기약하자던 한용운이었지만 어느날 속초 장에 나갔다가 대취해서는 끝내 요석공주를 만난 원효대사처럼 그녀 품 안에서 파계하고 말았다고 하는데요. (뭐 파계랄 것도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승려의 결혼을 지지한 한용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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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님의 침묵>에서 님을 부처님이든 조국의 해방이든 갖다 붙일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시에서는 도통 그걸 대입하기 어렵거든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런 시에서도 당신이 부처가 되고 조국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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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자신 <님의 침묵> 서문에서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이다.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메는 어린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는 식으로 뺑끼(?)를 치는 바람에 ‘님을 그리는 길 잃은 우리 민족’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결기 높고 까칠하기로 이름났고 에둘러 말하기보다는 직정적으로 내질러 버리기 일쑤이던 꼬장꼬장한 남자 한용운이 저렇게 목마르고 순한 어린 양이 되는 듯한 느낌은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오게 만듭니다. 바싹 마른 대꼬챙이에도 속살은 있는 걸까요. 적어도 남자로서는 ‘나쁜 남자’과에 들어감직한 만해에게도 순정이 돋아났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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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평전인 <만해 그날들>(박재현 저, 푸른역사)을 보면 이런 해석도 나옵니다. “마음을 짠하게 하는 모든 것을 죄다 ‘님’이라는 한 글자에 우겨 넣었다. 그리고 님을 떠나보내고 그리워하고 염려하고 기도하지만 끝내 님에게 달려가지 못하는 여자를 시적 화자(話者)로 삼았다 여자는 오래 전부터 강렬한 화두였다...... 여자는 세상의 모든 욕망이 집약되고 온갖 이념이 무너져내리며 사랑과 그리움이 숙성되고 바람과 기대가 솟아나는 곳이었다. 여자는 시간보다 빨리 변하면서도 돌처럼 늘 제자리에 있었고, 미추와 선악의 경계를 오가면서도 성을 높이 쌓고 그 안쪽에 혼자서 웅크리고 있는 듯도 싶었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듯 박재현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여자의 자리를 생각할 때마다 부처의 자리가 떠올랐다.” 아하. 이렇게 여자는 부처가 되기도 합니다. 여자라는 단어에 ‘사랑’을 대입해도 무방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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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처같은, 조국같은 ‘님’으로 꼽히기도 하는 한용운의 연인의 이름은 서여연화(徐如蓮花)였다고 합니다. 철학자 강신주가 쓴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동녘)을 잠깐 들춰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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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음을 단번에 뒤흔든 ‘연꽃 같은(如蓮花)’ 여인이 있었습니다. 한용운의 나이 47세, 그러니까 내설악의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고가며 지냈던 1925년은 그의 인생에게 가장 극적인 해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이 때 그는 가장 강렬한 두 권의 책을 폭풍우처럼 완성하게 됩니다. 하나는 6월 7일에 탈고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이고, 다른 하나는 8월 29일 탈고한 ‘님의 침묵’입니다. 십현담주해는 선불교의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의 수행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는 십현담(十玄談)을 주석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십현담주해를 쓰면서 한용운은 스님으로서 가장 강렬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이루었을 겁니다.그렇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권의 책을 쓸 때, 한용운의 곁에는 서여연화(徐如蓮花)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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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는 한 여인의 극진한 사랑을 통해 ‘스님이 아니라 남자가 돼 가던’ 한용운이 마음을 다잡고 쓴 책이 십현담주해이고, 수도자로서의 성과를 이뤄 냈지만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가슴 속 질풍 속에서 한용운이 끝내 평온할 수는 없었음의 자기 고백이 <님의 침묵>이기도 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가 갈등의 양안(兩岸)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려 (애인)님에 대한 사랑과 (부처)님에 대한 발원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킨 결과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슬픔에 잠긴 여인에게 발 딛고 떠오를 디딤돌 같은 사랑이 돼 주는 일이 어찌 불성을 해치겠으며 ‘스님이 아니라 남자’라는 구분이 어찌 그리 유의미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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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렀던 전라북도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의 작지만 오래된 절 월명암에 전해지는 <부설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신라 시대 승려 부설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오대산으로 도를 닦으러 가다가 묘화라는 젊은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부설에게 한눈에 반해 버린 묘화는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는 식으로 사랑을 갈구했고 부설은 이 시퍼렇게 날 세운 사랑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동료들을 떠나 보내고 묘화와 결혼합니다. 아이 둘을 낳고 해로하는 와중에 그는 수도를 계속하여 크게 깨달음을 얻지요. 한편 처음의 다짐대로 수도를 계속해 온 동료 둘을 만나 회포를 풀면서 도력(道力)을 펼쳐 보이는데 오히려 부설의 도력이 두 동료들보다 훨씬 윗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처받고 아낌과 멸시를 주고받으며 한 생을 꾸려가는 것, 그 이상의 도(道)도 없다는 역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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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해 한용운이 한 인간으로서 가장 풍요롭고 한 스님으로서도 가장 절정에 올랐던 시기가 바로 1925년, 서여연화와 함께 설악산 자락을 거닐고 그녀를 위로하고 자신의 바싹 마른 대꼬챙이에도 윤기를 불어넣었던 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상념에 젖어 한용운의 시들을 읽으면 절로 ‘아미타불’ 소리가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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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 수 없어요 정말로 알 수 없어요.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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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어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작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한다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인연설> 중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성불들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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