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탐하다] #01 프롤로그 - 여행은 책이다

in #kr7 years ago (edited)

사막에 비가 오면 생기는 호수 수영장-1.jpg

1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그리고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The world is a book, and those who do not travel read only a page - Saint Augu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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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여름날 마루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채 <닐스의 신기한 여행>을 읽으며 자신도 닐스처럼 작아져 철새 등을 올라타고 먼 나라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겨울 밤엔 이불 속에 웅크리고 <15소년 표류기>를 읽으며 친구들과 함께 무인도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를 대비해 <로빈슨 크로우소우>를 그 그 어떤 책보다 꼼꼼하게 읽었지요.

해질 무렵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얘야, 밥 먹으러 오너라!"하고 문 앞에서 외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집으로 들어오면 식사를 끝내자마자 늘 <소년소년세계문학30> 중 한 권을 꺼내 읽었습니다. <소년소녀세계문학> 외에도 <한국위인전>, <세계위인전> 등등 전집류가 차례차례 책장을 차지했지만 한 달이 가기도 전에 이미 다 읽은 전집이 되어버리곤 했지요. 소년이 태어난 가정형편은 부족하지도 않았지만 또 넉넉하지도 않았습니다, 소년이 읽고픈 모든 책을 사들이기엔. 그래서 소년은 늘 책이 고팠습니다. 그래서 읽었던 책을 또 읽고 읽었지요.

이미 읽은 책이지만 그 중에서 그날 저녁에 읽을 책을 고르는 순간은 언제나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보통 한 권당 서너 번을 읽었지만 더 자주 읽는 책들이 있기 마련. 소년에겐 '로드 무비' 마냥 길 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거나 미지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담긴 책들이 그랬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읽을 때도 제우스나 헤라 같은 신들이 등장하는 장면보다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같은 주인공이 길 위에서 겪는 모험담에 마음이 더 끌렸지요.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동키호테>, <보물섬>, <신밧드의 모험>, <서유기>,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걸리버 여행기>, <오즈의 마법사>, <파랑새> 등등.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던 시절 소년은 하루 종일 쏘다니다 집에 들어오면 또 다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래요, 책을 읽는 것이 여행이었으니까요.

'길'과 '여행'과 '모험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하던 소년은 자라서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년시절 읽었던 신화나 동화 속의 세계로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길 위에서 책 속의 길들 못지 않게 넓고 신비로운 세계를 만났지요. 오래된 성, 사막, 설산, 폭포, 바다, 신전, 폐허, 호수, 떠돌이 히피, 탈영병, 사기꾼, 부랑자, 수도승.....

그렇게 낯 선 고장과 낯 선 사람들을 만나며 방랑자는 알게 되었습니다. 유년시절엔 책을 읽는 것이 여행이었다면, 이젠 방랑자가 되어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 책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오래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말은 방랑자의 나침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세상은 무한정한 페이지들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이기도 했지만, 또한 수많은 책들로 이루어진 '도서관'이기도 했습니다. 낯 선 여행지, 신기한 풍경, 이상한 사람들. 길 위엔 신비로운 책들로 가득했으니까요. 그리고 길은 방랑자가 오래 전에 이미 읽었던 책들을 기억 속에서 꺼집어 내어 다시 읽어주기도 했지요.

칠로에섬-8.jpg

그렇게 길이 들려주는 문장을 들으며 방랑자는 눈을 떴습니다.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다 배웠다는 것을, 다만 잊고 지냈을 뿐.

어느날 방랑자는 고향에서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나누던 중 친구는 '도대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방랑자는 말했습니다. "그럼 길을 떠나봐, 그러면 네 영혼이 가장 명징하던 시절 네가 읽은 시를, 문장을 길이 읽어줄 거야. " 방랑자의 친구는 어린시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이란 경구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현재를 즐겨라!' 그러나 그는 지금 그 경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방랑자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 경구를 모르기 때문에 힘든 게 아냐. 앞이 보이지 않는 밤길,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선 등불이 필요해. 마음 속 꺼진 심지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 필요한 건 새롭거나 낯선 게 아냐. 네가 잊었거나 잃어버린 문장이야. 여행을 떠나 길들이 네가 잊어버린 페이지를 펼쳐 문장들을 읽어줄 때를 기다려. 어둑어둑해져 가는 길 위로 한 점 한 점 켜지는 차창 밖 풍경이, 텐트를 두드리는 빗방울이, 침낭 위를 지나가는 바람이 읽어줄 거야. 네가 그동안 잊어버린 문장과 잃어버린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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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곳에 길들이 내게 다시 읽어준 문장을 차례차례 내려놓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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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San Agustin의 인사말을 좋아합니다.

Muchas Gracias! @mtaccab, De donde eres? Yo viajé durante 2 años por Sudamérica antes de volver a Corea hace unas semanas.

De Madrid, España....un buen viaje de punta a punta casi.

Gracias! Hace 6 meses, yo pasé 1 semana en Barcelona. cuando vuelva a visitar España, ¡visitaré Madrid!

좋은 말이네요 ^^ 여행하지 않으면 한페이지만 본 것이라는 거... 경험과 기억이 자산이죠

세상엔 펼쳐지지 않은 페이지가 무수히 많이 팔락거리지요, 우리가 읽어주길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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