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r ] [ kr-novel ] 제1화 산법의 천재

in #kr7 years ago (edited)

“초류향. 이 계산에 대한 답이 뭐지?”

“팔천오백삼십이.”

“……정답. 그럼 이건?”

“육천삼백이십.”

“……어떻게 주판도 안 튕기고 그렇게 슬쩍 보면서 답이 나오냐? 나보다 산법도 늦게 배운 놈이.”

서책을 뒤적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하던 소년. 초류향(草流香).
소년은 이 시대에는 매우 귀한 안경이라는 물건을 슬쩍 콧등으로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네가 집중을 안 해서 그렇지.”

“그게 고문서를 읽으면서 계산한 니가 할 소리냐?”

초류향은 자기보다 족히 두 배는 몸집이 커 보이는 소년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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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너희 집은 무가(武家)니까 이런 산법 같은 것 잘해 봐야 딱히 필요 없잖아? 무공만 잘하면 되지.”

“그래도 이건 기분상의 문제라고, 기분상.”

덩치 큰 소년.
하북에서 가장 큰 무림세가. 하북팽가(河北彭家)의 둘째인 팽가호(彭價虎)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여태껏 내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널 보면 자꾸 내가 바보가 되는 기분이야.”

“그래도 몸 쓰는 건 네가 나보다 낫잖아.”

“그건 인마 당연한 거고. 본가에서 죽자고 무공만 익히다 왔는데 너보다 몸 쓰는 것을 못하면 말이 되냐? 게다가 나이도 너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 몸 쓰는 것도 못했으면 칼 물고 죽어야지.”

가문에서 어릴 때부터 몸에 좋은 보약과 영약을 먹고 온갖 무공으로 다져진 팽가호다. 반면에 꽤 큰 표국업을 한다지만 기본적인 무공만 겨우 익힌 초류향이었기에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 당연했다. 초류향 역시 그 사실을 떠올린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긴 실질적인 투자 금액이 다르니까.”

“……넌 너무 계산적이야.”

“듣기 좋은 칭찬이네.”

“이게 어딜 봐서 칭찬이냐? 욕이지.”

초류향은 아까부터 계속 귀찮게 깐죽거리는 친구 팽가호를 향해 피식 웃어 주며 말했다.

“너희 집이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우리 집도 숫자 하나에 목숨을 걸어. 네가 나보다 무공이 센 게 당연하듯이 내가 너보다 계산이 빨라야 되는 것도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너무 쓸데없는 곳에 승부욕 불태우지 마. 시간 아깝다.”

“누, 누가 승부욕 불태웠다고 그래?”

팽가호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항의하는 것을 보던 초류향은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번 우리 학당(學堂)에서 치러진 산법수리대회(算法數理大會)에서 내가 일등을 한 건 당연한 결과야. 거기에서 네가 삼등을 한 것이 오히려 놀라운 결과지. 거기에 만족해, 친구.”

“그래, 거기에 만족해야지, 팽가호. 네 머리의 한계가 거기까지다.”

갑작스럽게 옆에 불쑥 등장한 소년.
호리호리한 체형에 멀끔해 보이는 이 소년이 바로 하북에서 하북팽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진주언가(珍州彦家)의 막내 언극린(彦極麟)이다.

“언극린 네가 왜 갑자기 끼냐? 형님들 진지한 이야기 하시는데.”

팽가호가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자 언극린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형님들 좋아하고 있네. 그리고 하나도 안 진지한 이야기더만.”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여기 온 거냐?”

“난 초류향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거든? 너한테 볼일 있어서 온 게 아니니까 신경 끄시지.”

“지금 이 형님이랑 한판 해보자는 거냐?”

“고놈의 형님…… 맨손으로 붙는 거면 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언극린의 말에 팽가호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서며 말했다.

“본가는 칼로만 대화를 하지. 그깟 하오잡배들이나 하는 주먹질은 싸움으로 치지도 않는다. 이 형이 특별히 목도로 상대해 줄 테니 연무장으로 나와라.”

“비겁한 새끼…… 무기를 사용한다는 말을 어쩜 저리 뻔뻔하게 하지? 그렇지 않냐?”

언극린이 초류향을 향해 동조를 구하자 안경을 다시 고쳐 쓴 초류향은 지극히 무덤덤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진주언가는 주먹과 장법으로 유명하고 하북팽가는 도법으로 유명하니까 그런 거겠지. 애초에 서로 간에 무의미한 대화다. 그리고 둘 다 시끄러우니까 밖에 나가서 싸워 줄래? 나 아직 봐야 될 책이 남아서…….”

“그렇게 구석에 처박혀서 책만 읽지 말고 너도 가끔 연무장에 나가서 땀 좀 흘려. 몸에서 곰팡이 피겠다.”

팽가호가 잔소리하자 초류향은 여전히 관심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항상 깨끗이 씻고 있어서 그런 걱정은 없어. 나 씻는 거 꽤 좋아하거든.”

초류향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고정시키자 팽가호가 말했다.

“언극린, 너 이 녀석한테 볼일 있다고 했냐?”

“그렇지. 그래서 왔지. 안 그러면 내가 미쳤다고 이 답답한 서가에 찾아오겠냐?”

“하긴 너도 그럴 놈이지. 좋다, 그럼 나를 도와라.”

“뭘?”

팽가호가 음흉하게 웃으며 앉아 있던 초류향의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네가 반대쪽을 들어라.”

“어?”

초류향이 저항의 몸짓을 해 보였지만 애초에 힘으로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언극린 역시 이런 일은 사양하지 않는지라 재빨리 초류향의 반대쪽 팔을 어깨 위로 걸치며 말했다.

“연무장이겠지?”

“물론이지, 동지.”

평소에 앙숙이던 이 둘이 이렇게 힘을 합치면 애초에 저항이 무의미함을 잘 알고 있기에 재빠르게 모든 걸 포기한 초류향이다. 그는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이러지 마, 나 땀 빼는 거 싫어.”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 모르나, 친구? 어차피 곧 있으면 무예경연대회(武藝競筵大會)도 있잖아? 그에 대비해 육체를 강건하게 하러 가자.”

“난 거기 순위에 드는 거 관심 없어.”

“내가 관심 있네, 친구. 그러니까 함께 가야지, 우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힘으로 질질 끌고 가는 팽가호를 보며 초류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무식해 보이고 둔해 보이는 녀석이지만 의외로 똑똑하고 민첩한 팽가호다. 반대로 한없이 가벼워 보이고 뺀질거릴 것 같은 언극린이지만 사실 그는 한없이 날카롭고 노력형인 인간이었다. 이 둘을 친구로 삼게 된 것은 분명히 잘된 일이었지만 그만큼 희생해야 되는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서책.얼마 전에 어렵게 찾은 산법기술요해(算法技術了解)를 보며 초류향은 슬픈 얼굴을 해 보였다. 이제 마지막 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또 쓸데없는 행사가 생긴 것이다. 연무장으로 질질 끌려가며 초류향은 계속 속으로 지금의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기(技, 재주)라는 것은 한 번 익혔다고 몸에 완전히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때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는 것이지. 재주라는 것은 내 몸에서 완벽하게 숙달될 때까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지루하게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야 기가 완숙되며 그때야 비로소 그 껍질을 깨고 그 너머에 있는 해(垓, 경계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

강당에 서서 설명하고 있는 늙은 학자를 보다가 팽가호는 크게 공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초류향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건 마치 본가의 어르신들이 상승무공을 풀이해 주는 것 같은데?”

“그래?”

“산법(算法)이라는 것이 무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게 좀 놀랍군. 역시 아버지가 날 여기 보낸 게 다 이유가 있었어.”

강당의 전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노학자는 과거 조정에서도 산학자(算學子)로 관직 생활을 했던 조기천(朝紀天) 선생이었다. 지금은 연로하여 낙향했지만 젊었을 적 그가 가진 계산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고 한다. 조정 관리 열 명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처리가 되는 문서들을 혼자서 도맡아서 했다고 하니 그 두뇌 회전 능력이 얼마나 엄청났겠는가?

“거기 떠드는 놈. 역시 팽가호겠지?”

“아닙니다.”

팽가호가 지적받자마자 특유의 뻔뻔한 얼굴로 부정했지만 조기천 선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네 녀석 덩치에 숨기려고 해서 그게 숨겨지겠느냐? 사내답게 인정해라.”

평소에 사내다운 것과 의리에 목숨을 거는 팽가호였기에 조기천 선생의 지적에 뼈아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순순히 말했다.

“예, 제가 떠들었습니다.”

“그 옆에서 불행하게 희생될 녀석은 역시 초류향이겠군.”

“…….”

초류향은 안경을 고쳐 쓰며 얼굴을 찡그렸다.
애초에 부정할 수도 없게 상황을 만드는 것. 확실히 조기천 선생의 이 교묘한 화술은 배워 둘 만하다고 초류향은 생각했다.

“둘 다 뒤로 가서 마보세(馬步勢)를 취한 채로 일각(15분) 동안 서 있도록.”

“알겠습니다.”

내심 ‘그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호쾌하게 일어서던 팽가호는 뒤이은 조기천 선생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실수할 뻔했군. 팽가호 너는 반 시진 동안 서 있도록. 물론 내공은 사용하지 말고.”

자기를 바라보는 또래의 아이들.
그 앞에서 사내답게 인정하고 일어섰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내뺄 수도 없었다. 때문에 팽가호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강당 뒤쪽에 가서 조용히 마보 자세를 취했다. 죽을 만큼 힘들긴 하겠지만 억지로 하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속으로 그렇게 필생의 각오를 다지고 있는 팽가호 옆. 초류향 역시 조용히 마보 자세를 취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의 일에 대한 처분에 다소간 억울한 점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일일이 따져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익숙하게 마보 자세를 취하며 편하게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조기천 선생의 수업에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유기산법무예학당(有技算法武藝學堂).
이 먹물 냄새 진하게 나는 이름의 학당이 바로 강북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산법 학당이었다. 그 크기와 규모도 그렇지만 초류향이 그토록 배우고 싶어 했던 산법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은 사실 전국을 통틀어 여기 한 곳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초류향이 이곳에 입학하여 가장 관심 있게 듣고 있는 강의.
그게 바로 조기천 선생의 산법 강의였기에 힘들더라도 단 한 자라도 놓칠 순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익힌 기(技)를 베푸는 것은 완숙되지 않은 자라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 배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 하지만 그 진체(眞體)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자신이 깨달은 진체를 남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힘든 과정들이 필요하겠지. 나는 부디 너희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완숙되어 해(垓)의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구나.”

“스승님께서는 해의 경지에 이르셨습니까?”

학생들 중 하나가 불쑥 질문하자 조기천 선생은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못하는 성실한 노학자는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앞에 있는 나 역시 해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너희들보다 그것에 조금 더 가깝다 할 뿐이겠지.”

“평생을 산법 하나에 몰두한 스승님께서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라면 그런 경지는 없다고 봐도 되지 않겠는지요?”

꽤나 당돌한 질문과 의표를 찌르는 물음이다.
초류향은 방금 전에 두 가지 질문을 했던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소년은 무림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南宮世家).
그곳의 셋째 아들인 남궁옥빈(南宮玉彬)이었다.
남궁옥빈은 이곳 학당에서 또래의 아이들 중 가장 영민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아이였다. 무예면 무예, 산법이면 산법. 문법을 비롯한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능한 천재. 학당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서 최고의 성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남들은 훌륭한 가문에 천재적인 머리를 지닌 그를 부러워했지만 초류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얼마나 혹독하게 노력해 왔을까?’

남궁옥빈이 가진 여러 가지 뛰어난 재주들.
다른 것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학문과 무공. 이 두 가지는 스스로 노력한 만큼 그 결과가 확실하게 나오는 것이다. 천재라고 해서 남들보다 소홀히 공부하거나 건너뛸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초류향이 이번에 있었던 산법 시험에서 남궁옥빈을 이긴 것은 적어도 그 분야에서만큼은 그를 넘어서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지 결코 천재라서가 아니다.
초류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허를 찌르는 질문을 받은 조기천 선생 역시 무슨 생각인지 한동안 조용히 남궁옥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해의 경지는 분명히 있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을 보았지.”

“……!”

“그러니 의문을 품지 말고 정진하거라. 그리하면 너희들도 분명히 도달할 수 있을 터이니.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산법에 있어서만큼은 너희들에게 그 길을 제시해 줄 만큼 나 역시 많은 시간을 노력해왔다. 그러니 어렵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질문하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산법총람(算法總攬)이라 쓰인 서책을 펴고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산법총람에는 셈을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많은 계산식들이 적혀 있었고 아이들은 그것들을 보며 스스로의 기예(技藝)를 연마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군.”

팽가호는 벌을 서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초류향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스승님께서 말한 기(技)가 완숙된다는 것은 무공으로 봤을 땐 분명 조화경(造化境, 몸 안의 기운이 조화롭게 완성되어 무예를 펼치기 위해 최상의 몸 상태가 되는 것)의 경지를 말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팽가호는 세상 모든 것을 무공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초류향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팽가호의 그런 견해를 조금도 무시하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가끔씩 팽가호의 독특한 시각에서 생각지도 못할 깊은 혜지(慧智)가 번뜩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강호에서 조화경의 경지를 이룬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 기껏해야 삼황오제칠군(三皇五帝七君)정도가 있겠지?”

“그렇겠지.”

무공에 큰 관심이 없는 초류향이지만 삼황오제칠군라면 귀가 따갑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강호에 있는 모래알처럼 많은 무인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초인(超人)들. 이 넓은 강호를 고작 열다섯 명밖에 안 되는 절대초인들이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구주십오객(九州十五客).
강호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곧 법이고, 진리였다.

“근데 여태껏 무림 역사상 조화경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있었어도 조화경을 완숙된 경지에 이르러서 그 껍질을 깨고 신선의 경지라는 신입(神立)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은 없었어. 뭐, 사파 놈들이 과거 마교의 개파조사였던 천마(天魔)가 신입의 경지였다고는 하는데 그건 다 사파 놈들의 허황된 개소리고, 정파 쪽에서도 소림사의 달마대사나 무당의 장삼풍 도인도 신입의 경지가 아닐까라고 생각은 하지만 확실한 건 없으니까.”

“음…….”

“방금 스승님의 말씀으로면 분명 해의 경지가 신입의 경지라는 것과 똑같은 걸 거야. 그런데 직접 해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봤다고 했지, 분명? 그럼 그건 재미없는 농담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나는.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경지니까.”

초류향은 생각했다.
확실히 팽가호의 논리는 제법 그럴싸했다. 게다가 그답지 않게 타당성도 얼추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이마를 비롯해서 얼굴 전체에 흐르는 흥건한 땀 때문에 밑으로 내려간 안경을 고치며 초류향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한 스승님은 농담을 모르시는 분이다.”

“야,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

“팽가호.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초류향은 정면을 보고 있던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그러자 턱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느껴졌다.

“너와 내가 떠들고 있다는 것을 스승님께서 아까부터 보고 계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팽가호가 그제야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러자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기천 선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기천 선생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 옆에 있는 친구의 말대로 나는 농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 그런 실없는 이야기는 학문 정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팽가호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스승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스승은 그들이 하는 대화를 아까부터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젠장 고상한 선비답지 못하게 제자들이 소곤대는 대화나 엿듣고.’

팽가호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욕하고 있을 때 조기천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들린 것이다. 네가 좀 크게 떠들어야 말이지.”

속마음이 들키자 팽가호는 뜨악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귀신같은 늙은이!’

독심술이라도 쓰는 것일까?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파악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팽가호가 오만 가지 상념에 잡혀 있을 때 초류향은 일찌감치 포기한 얼굴로 순순히 스승의 처분을 기다렸다.
조기천 선생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초류향은 그만 들어오고 팽가호는 반 시진을 추가해서 마보세를 취하도록.”

“스, 스승님. 설마 여기서 반 시진을 더 추가해서 말입니까?”

팽가호가 죽을상을 한 채 비명처럼 소리치자 조기천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농담을 하지 않지. 그러니 계속 수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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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소설을 올려주시는 분도 계셨군요ㅎㅎㅎ
고맙습니다

나는 이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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