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하나의 장면, 영화 속 명장면 철학 읽기 2 <스워드피쉬>

in #kr6 years ago (edited)

△이 하나의 장면, 영화 속 명장면 철학 읽기 2 '<스워드피쉬>편' 유튜브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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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씬 : 스워드피쉬(Swordfish, 2001)
감독 : 도미닉 세나
#장면 : 버스를 납치한 뒤 대화하는 가브리엘과 스탠리
주제 : 공익의 정의는 어디있는가

*'영상'과 '글'의 내용이 다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본 내용은 같은 영화의 여러 장면을 소개할 수 있음


존 트라볼타의 인상적인 연기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테러범을 소탕하기 위해 테러를 저지른다'는 가브리엘(존 트라볼타)과 그에게 이용당하는 스탠리(휴 잭맨)의 이야기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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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질병을 없앨 수 있는 힘을 얻었는데 그 대가로 무고한 어린아이 하나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나?”


가브리엘은 일명 ‘스워드피쉬’라는 비밀자금을 강탈한 후 인질들을 태운 버스에서 이 일의 정당성에 대해 논하라는 스탠리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제법 복잡한 철학적 관점들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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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스탠리는 ‘No’라고 대답한다. 유사한 태도를 가질만한 철학자의 관점을 데려온다면 이는 칸트의 정언명법과 흡사하다. 정언명법이란, 어떤 선을 지킬 때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게 하라'는 것으로,쉽게 생각하면, ‘내가 하는 행동을 전세계 사람들이 다 같이 하면 그래도 괜찮을까?’ 라고 생각하면 된다.

만약 전세계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면 어떨까? 세계는 멸망하고 말것이다. 그래서 살인은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된다.

영화의 맥락으로 봤을 때 스탠리의 태도는 공자와 맹자로 이어지는 동양 철학의 '차마 어쩌지 못하는' 군자의 ‘인’한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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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수천 명도 생각해주지 그래?”


가브리엘의 입장은 벤담의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달콤한 함정에 빠지면 이러한 논리는 응당 받아들여지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밀이 지적했듯이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간과한 판단이다. 만약 이 논리에 동조한다면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인신매매를 통해 얻은 장기로 질병으로 고통 받는 최대 10명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다면, 그 인신매매는 합당한 것인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것도 결국은 각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 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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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없는 스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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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피스에 몇 달러 기부한다고 세상이 좋아질거라 생각하나?”


그럼에도 가브리엘이 던진 질문은 완전히 해결되진 않겠지만, 그가 마지막에 던지는 메시지는 제법 육중하다. 그린피스에 몇 달러 기부하는 행위는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발걸음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상징적인 문제로 접근해야한다.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기부하는 행위가 알려지면, 내가 불행해졌을 때 이를 구제받을 수 있다는 일련의 작은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인간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는 행위와 유사하다. 죽은 사람은 단지 생을 마감한 것이지만, 그 사람에 대한 데이터는 다른 사람의 두뇌에 기억으로 남아 계속 보전된다. 즉, 내가 죽을 때 타인에게 내가 기억됨으로써 ‘흔적의 영생’은 가능하고, 이에 대한 기대감은 사람들이 장례라는 독특한 의식을 치르게 만든다. 존재하지 않는 타인을 기억하는 행위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때로 삶의 동기부여가 되고, 살아가는 방식을 숙고하게 만든다.

그런 것처럼, 기부행위도 마찬가지다. 이타적인 행동을 공유한다는 건 결국 이타에 놓이지 않은 이들도 이타심을 유지하게 만든다. 삶을 평탄하게 지나올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모두가 도와주지 않을 게 뻔한 세상보다는, 누군가는 도와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세상을 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그린피스에 몇 달러 기부하는 행위가 세상을 좋아지게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위와 같은 이유로) 고로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에 대한 믿음은 각종 재앙과 고통들을 해결할 '시간을 벌어'준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 못지않게, 정치적, 사회적 도구들이 발전하는데도 훌륭한 지지대가 된다.

어쨌거나 개인 간의 믿음을 저버린 채 효익만을 추구하는 경제체제에서는, 필연적으로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막대하게 축적된 부가 '인간을 위해' 쓰여야지만 비로소 진정한 공익을 달성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결국 이것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드러나는 검은 그림자인 ‘경제에 종속된 인간’을 분리하여 ‘이익 때문에 서로를 불신하는 사회’를 지양할 때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범죄 수준의 위험한 공리주의'도 차치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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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이죠. 또한번 봐야겠네요 생각난김에

저도 글쓰면서 다시봤는데 재밌습니다 역시 ㅎㅎ

ㅋㅋㅋㅋ 방송을 시작하셨었군요
금주 중 팔로우하고 자주 교류하겠습니다

되든 안되든 후딱 해치워버려야죠 하핫;
디베이트 채널은 열렸나요? 저도 채널 열리는데로 구독하러 가겠습니다 ㅎㅎ

ㅎㅎ 일단 디베이트 계정에 아무 것도 없긴 하지만 구독은 개시했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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