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자유의 진정한 가치란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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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자유의 진정한 가치란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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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노예가 되기 전에는 번듯한 자유인 음악가 '솔로몬 노섭'이었다

1. 이름으로 피어나는 것


먼저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너무나 유명한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본문 中

만물은 이름을 부여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얻게 되는 법이다. 물론 인간만의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에게 이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눈앞에 물체가 실존하지 않아도 이름을 통해 물체를 상상할 수 있고, 때로 인간 세상은 그 '대체된' 이름이 실체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 분)이 노예 인신매매로 팔려가기 전과 후의 세계 역시 ‘이름’으로 나뉜다. 자유인으로서의 ‘솔로몬 노섭’과 노예로서의 ‘플랫’ 말이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되찾고자 하는 이름은 본래의 자신 이름인 ‘솔로몬 노섭’이며, 또 한 편으로 끊임없이 감추려 하는 것도 ‘솔로몬 노섭’인 아이러니한 상황이 영화 내내 지속된다. 노예라는 존재는 한 사람의 자유를 앗아가 자신의 자유를 좀 더 영화롭게 누릴 수 있게 하는 도구에 불과하기에, 지나치게 영리하거나 특별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와 부당한 대우를 눈치 챌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억압에 대항할 생각을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영화 초반부에 인신매매로 실려 가는 노섭과 그의 동료들 역시 노예가 되기 전, 폭동으로 상황의 반전을 꾀하려고 한다. 물론 특별한 재능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면 그 재능은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을 가둔 자의 경계심만 더욱 부추기는 꼴이다. 그런 까닭에 노섭은 의도하든 의도치않든 자신의 재능과 본래 모습을 드러낼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위협과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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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강제로 노예가 된 후 자신을 변호 하지만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다

솔로몬 노섭이든, 플랫이든 모두 같은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그 이름에 따라서, 그 대상의 가치는 심지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조차 현저히 차이가 난다.

바로 그 차이와 괴리감이 우리에게 강한 모순을 안겨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호명(號名)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결정된 이름에 따라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하면서 이름과 존재의 차이가 낳는 괴리감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자신의 이름 하나를 말하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한 노섭의 상태는 그 자체로, 온전한 이름을 가지고 사는 우리가 과연 그 이름의 가치를 제대로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나’로서 산다는 것의 소중함을 절박하게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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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 자체가 모순이다

2. 자유의 가치


이 영화의 가장 인상 깊은 점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솔로몬 노섭의 첫 주인인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 분)다.

영화나 어떤 작품을 보다보면 우리는 종종 어떤 인물과 상황에 동화되는 것을 느낀다. 아니, 종종이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우리는 온전히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우리가 영화 작품이 의도한 바, 영화적 합의에 이르지 않는다면 영화는 존재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어쨌든 우리가 그러한 생각으로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 포드가 꽤나 괜찮은 인간으로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노예들을 학대하거나 혹사시키지도 않고, 노섭에게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관대한 처분만을 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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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자비로움에 무릎이라도 꿇을 지경이지만 그가 과연 '자비를 베풀' 존재인가?

심지어 노섭이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바이올린을 주는 그의 모습은 대단한 인격자의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노섭도 그런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그를 돕지만 역시 간과된 사실이 있다.

결국은 노예라는 것이다.

포드는 노예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읽지만 오히려 그 상황은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진정 인격적인 성숙함을 갖춘 사람이라면 노예 자체를 부정해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포드는 노예제를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고, 노예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잠깐 포드의 호의에 속아 ‘노예제도’ 라는 큰 틀의 억압을 잊었지만 결국 그도 비난의 화살을 면하기 어렵다. 솔로몬 노섭에게 필요한 것은 노예로서 받는 바이올린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는 것이다.

음악가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을 떠나 인간의 육체적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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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시는 주인인 엡스에게 총애를 받지만 성적 노리개로 전락해버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바란다.

작품의 가장 첫 부분에 등장하는 노섭에게 접근하여 성욕을 해결하는 여자 노예의 절규도, 가장 기본적인 욕구조차 통제 당하는 상황에서 이성을 잃게 되는 자기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는 것이며, 후에 팻시(루피타 니옹고 분)가 주인 에드윈 엡스(마이클 패스벤더)에게 성적 농락을 견디지 못하고 노섭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하는 것 역시 자아의 한계에 도달한 극한의 상황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노섭이 살기 위해 그 자신을 잊어야만 했던 것처럼, 그래서 그 자신의 가치가 아닌 노예의 가치로만 살게 됐듯이, 또한 노예로 전락해버린 자신을 그저 괴롭게 바라봐야 하듯이, 자유를 잃은 삶이란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분출되어 그 자신을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생각해보라. 매일 깨끗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정갈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우리가 어떤 수도 시설도 없는 독방에 갇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맨 바닥에 똥오줌을 누기 시작하는 것을. 그 더러운 오물 속에서 오물을 뒤집어 쓰며 살고, 또한 그 오물을 그 자신이 생산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괴로움을.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외침에도 겉모습은 이미 똥오줌으로 범벅돼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 그런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발견하게 될 때를.

자유는 단순히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유는 내가 내 가치를 깨닫고 행하고 있다는 것, 그 모습을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자유'까지 만들어준다. 건강한 자아는 그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한다. 당신이 그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일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가 자존감이라 부르는 그 '자기평가'의 기준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바로 자기 자신이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모습대로 살지 않는 나의 모습, 아무리 좋은 환경이 있어도 내가 내 모습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유가 없는, 자아 상실의 삶이다. 그런 삶은 때로 죽음보다도 고통스러우며, 그렇기 때문에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느닷없이 자살하기도 하는 것이다.

노섭이 받는 본질적인 고통은 노예여서 힘들고 거친 삶을 살아가게 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음악가이지 않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러므로 꼭 노예 제도가 아니어도, 우리는 언제든 노섭처럼 살아야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있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아닌 수많은 외연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런 억압은 마치 포드의 사탕발림처럼 당위성을 가지고 우리를 노예상태로 이끌고는 하지만, 그 사탕발림이 아무리 달콤해도 진정한 자유와 달콤함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기능하고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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