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룸 7.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잡탕이지만 묘하게 맛있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잡탕이지만 묘하게 맛있다
*본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시사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극장판 <청의 엑소시스트>에 등장하는 '오쿠무라 린'과 '우사마루'. *사진 : 다음 영화, <청의 엑소시스트>(2012) 포스터
1.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수를 한 스푼씩 넣다
작품을 보지 않고 포스터만 보았는데도 나는 벌써 하나의 작품이 떠올랐다. 그것은 애니메이션 <청의 엑소시스트>의 극장판이었다. <청의 엑소시스트>는 악마의 힘을 가졌으면서도 악마와 싸우는 엑소시스트 견습생 ‘오쿠무라 린’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만화인데, 극장판에서는 갓 엑소시스트가 된 린이 마을에 주기적으로 열리는 축제와 그와 관련된 전설에 얽히게 되는 일화를 다룬다.
극장판 <청의 엑소시스트>(2012)에 등장하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마을에 한 악마가 나타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 이 악마는 사람들이 놀이에만 전념할 수 있게 기억을 먹어치우는데, 때문에 사람들은 일하는 것을 잊고 즐겁게 놀다가 종래엔 마을이 황폐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악마는 엑소시스트에게 봉인당하지만, 마을조차도 잊어버린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잊지 않기 위해 그 악마를 위한 축제를 열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악마는 ‘우사마루’로, 후에 린의 시대에서 부활해 린과 추억을 쌓아나가며 또다시 주변인들의 기억을 먹어치운다. 그러나 린은, 우사마루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할아버지 시로와의 괴로운 기억까지 먹어치우려고 하자 “잊어서는 안 될 기억도 있다”며 우사마루를 설득해 그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든다.
카이와 루. 이 둘의 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린'과 '우사마루'와 많이 닮아있다. *사진 : 다음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2018)
다른 작품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까닭은 이 이야기가 사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대입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시모다 쇼타)와 루(타미 카논)의 첫 만남도 항구 마을에 내려오는 ‘인어 전설’에서 기인하고, 그 전설은 세이렌 전설을 따라 인어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선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 역시 ‘우사마루’처럼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고, 심지어는 루와 우사마루가 어린아이의 모습인 것까지 판박이다. 게다가 마을에 해가 될지도 모를 힘을 가두기 위해 우사마루를 맡은 ‘린’의 모습은 루를 숨기려는 ‘카이’의 모습과 비슷할뿐만 아니라, 끝내 루와 우사마루가 그들의 힘으로 사람들을 구출하게 되는 결말조차 유사하다.
이 부분까지만 보면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는 얼핏 극장판 <청의 엑소시스트>의 표절작품 같기도 하다. 그런데 두 영화에서 사용된 신화소(재료)는 유사성을 띨 뿐 전혀 다른 종류(인어와 악마)이며, 집중하는 주제도 다르기에 표절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만약 주제의식마저 같았다면 표절의혹을 피할 수 없겠지만, 인간의 추억내지는 기억을 다룬(보다 미시적인) <청의 엑소시스트>의 주제의식은 후에 개봉한 디즈니의 <인사이드 아웃>(2015)과 일맥상통한다면,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는 인간의 탐욕과 생태학적 관점이 가미되어 차라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2000)와 주제가 맞닿아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고령화와 저출산, 청년실업과 이로 인한 유령도시 현상이 닥쳐온 지금의 심각한 일본을 풍자하고 있기도 해서, 확실히 이런 저런 요소들이 뒤범벅된 ‘잡탕’이지만 이 요소들이 잘 섞여 미묘한 ‘맛’을 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부해'를 채취하는 나우시카. *사진 : 다음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2000)
2. 심상치 않은 ‘잡탕의 맛’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전체적인 모습은 극장판 <청의 엑소시스트>를 닮아 있다. 그런데 추구하는 내용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부해와 나우시카의 관계를 떠올리게도 한다. 현대문명이 멸망하고 오염된 지구에서 부해는 그 오염의 부산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병든 지구를 정화하고 있었다는 설정에서, 부해와 인어들은 공통점을 갖는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서도 인어들은 겉보기엔 사람을 해치는 듯하지만, 결말부에 폭로되듯이 실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해치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인어는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존재이며, 오히려 그것을 해침으로서 환경에 재앙이 닥치기도(그늘신의 벌) 하는데, 이는 나우시카의 ‘부해’가 절멸하면 그야말로 지구는 정화되지 못한 채 파국을 맞이하리란 설정과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인어가 자연물이 아니라 사람의 한 형태임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은 생태학적 관점을 넘어 인종차별과 같은 부분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가오나시와 대면하는 치히로. *사진 : 다음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그런가하면 이 작품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묻어있기도 하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절망,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어버리는 유바바의 온천 속에 갇힌 치히로의 모습은 카이의 모습에 어렴풋이 비친다. 카이는 음악을 꿈꾸며 인터넷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괄목할만한 인기도 얻게 되지만, 저물어가는 어촌 마을에서 젊은이들에게 부과된 목표는 ‘취업’뿐이다. 가오나시에게 황금을 얻으려 자신의 정체성도 잊은 채 모두가 굳은 일도 마다않는 유바바의 온천장이, 카이에겐 그 자신이 속해있는 마을인 것이다.
그런데 유바바의 온천장과 가오나시가 일본 사회의 양극화와 기형적인 사회 모순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라면, 카이가 속한 어촌 마을과 카이가 처한 현실은 지금 일본의 폭발적인 고령화와 저출산, 가난한 청년, 그로 인한 도시 외곽의 황폐화 등을 묘사한다. 젊은이들은 점차 활력을 잃어가는 어촌 마을에서 희망을 느끼지 못하고 도시로 떠나지만 이들 중 성공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쓰러져가는 어촌 마을에 남아 가업을 승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해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취향을 쫓아간다는 건 위험한 도박이 된다. 카이가 보여주는 무기력함도 여기서 기인한다.
이 과정에서 카이와 루의 관계는, 피폐해져가는 마을에 탐욕과 광기를 불러일으킨다. 인어를 멸시하던 인간들이 그로 인해 관광수입이 예상되자 태도를 급변하는 모습, 루와 한 팀인 아이들을 내쳐버리는 어른들, 그런데 다시 인어로 인해 피해를 입자 루에게 ‘태양빛을 쬐는 형벌’을 내리는 모습 등은 역겨움을 자아낸다. 이런 역겨움 속에 처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과연 미래는 있는가? 활기찬 애니메이션에 어울리지 않는 카이의 음울과 무기력은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이와 같은 ‘맛’을 준다. 그리고 이 맛은 낯선 일본의 ‘낫토 맛’이 아니라, 어디선가 먹어본 적이 있는 ‘된장 맛’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모른다. 지독히 정신 사나운 이 잡탕의 애니메이션이 보기와는 다르게 ‘심상치 않은 맛’이 나는 이유는.
좋은 작품들의 '냄새'가 많이 나지만, 분명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속에는 자신의 고유한 냄새도 난다. *사진 : 다음 영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2018)
그럼에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은 역시 ‘잡탕’이라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전체를 아우르는 과장된 액션은 이질적인 재료들을 재빨리 섞기 위한 필수적인 조리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훌륭한 작품들의 소스를 이것저것 첨가해 좋은 맛이 났다고는 해도, 자신의 고유한 맛은 떨어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작품들처럼,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서 말하는 것들은 어디선가 조금씩은 들어본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이든 자신의 색깔이 뚜렷하지 않다는 건 치명적인 단점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여러 작품들을 한데 섞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동화되어있는 것도 놀랍다. 명작들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자신의 냄새도 분명 존재한다. 음악을 들으면 다리가 튀어나오며 춤추는 귀여운 인어, ‘인어화’되는 강아지들과 기다란 곤약처럼 물을 바다에서 끌어와 주인공과 소통하는 루와 같은 모습들은 분명 이 작품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상상력이다. 그래서 어딘가 거부감이 들면서도 삼킬수록 묘하다. 마치 신비한 인어의 노래처럼 말이다.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두 재밌게 봐서..이 영화도 빨리보고싶네요..일부러 자세하게는 안읽었습니당..아 그리고 인앤아웃..ㅋㅋ일본애니는 나름 진지하고 창의적인 세계관에서 교훈을 주고..미국애니는 장난감이든 곤충이든 몬스터든..아님 실제 인간사회를 그대로 코믹하게 풍자해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저는 둘 다 좋아합니당~~
두 작품을 모두 보셨다면 이 작품도 나름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 일본과 미국 애니메이션의 차이에 대한 점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양쪽의 분위기 모두 각각의 장점, 특징이 있어서 저도 둘다 좋아하는 편입니다 :)
일본 애니메이션을 심도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어릴 적 봐왔던 대부분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의 '기괴할 정도의 상상력'이 늘상 부럽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요소들을 펼쳐내는 것을 보면 창의력에 감탄을 거듭하게 됩니다.
시사회 작품 리뷰 감사히 보고 갑니다 !
가끔 회사에서 놀라운 제품을 발표할 때 '외계인을 고문했다'는 표현을 쓰곤 하지요. 일본인들의 상상력을 마주하면 저도 그런 표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 한국도 이제는 좀 타인의 시선을 벗어던진, 자신의 상상력을 극대화한 독특한 작품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아니 그러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습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