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고향은 어디입니까?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edited)

movie_image.jpg
(오사카 조선학교 럭비부)

다큐멘터리 <카운터스>를 보고 오사카 조선학교가 생각났어요. 5년 전 오사카 조선학교 럭비부가 2010년 오사카종합체육대회에서 우승해 오사카 대표로 하나조노(야구로 치면 갑자원)에 진출한 적 있습니다. 그때 오사카 조선학교 럭비부를 취재하러 오사카에 간 적 있어요. 오사카 조선고급학교(이하 오사카 조고) 럭비부를 그린 다큐멘터리 <60만번의 트라이>가 후반작업을 앞두고 있는데, 이 영화를 만든 박사유라는 감독의 사연이 드라마틱하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재일동포도 아닌 서울 출신인 여자가 어떤 연유로 오사카로 건너가 조선학교 럭비부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무척 궁금했었어요. 오사카를 다녀온 뒤 제법 긴 기사를 썼는데 온라인에 노출이 되지 않아 완전히 묻혔었어요. <카운터스>를 보고 난 뒤 그때 썼던 글을 찾아 스팀잇 형식에 맞게 다시 편집해 올립니다. 글이 꽤 깁니다.

오사카=글·사진 김성훈

프롤로그: 히라노강의 풍경

IMG_2642.jpg
​(간사이 국제 공항)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를 반겨준 건 폭우뿐만이 아니었다. 마침 몽당연필 오사카 공연 참가단을 마중나온 김명준 감독을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그걸 지켜보던 일본 공안경찰이 카메라 셔터소리로 요란하게 환영(?)해주었다.(그는 찍은 사진을 어디에 넘기려고 했던 것일까) 몽당연필의 한 관계자가 그 공안경찰을 잡아 공항 경찰서에 넘기는 소동을 한바탕 치른 탓에 인터뷰 장소인 박사유 감독의 집에 도착한 건 약속시간보다 무려 1시간이 지난 뒤였다. 늦게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사유 감독은 집 앞에 있는 히라노강의 건너쪽으로까지 달려나와 양손을 흔들며 맞아주었다. 작은 체구와 환한 미소가 씩씩해 보였다. 그의 뒤로 보이는 히라노강은 이쿠노구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강(재일동포가 모여사는 쓰루하시가 이쿠노구에 속해 있다)이다. 원래 이쿠노구는 잦은 범람으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동네가 아니었다. 이쿠노의 옛 이름이 ‘돼지를 기르는 토지’라는 뜻의 이카이노라 불렸을 정도니까. 이곳에 재일동포가 몰려든 건 1920년대 히라노 운하 건설 공사에 재일동포가 강제 동원되면서부터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은 싼 임금으로 위험이 따르는 운하 노동을 강제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었다. 그들은 강 주변의 공사 현장에 모여 살기 시작했고, 공사가 끝난 뒤에는 건설·항만 노동자, 광부, 자영업자 등으로 정착했다. 오래전 조선인의 피와 땀이 서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낮의 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일본식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의 풍경은 무척 평화로웠다.

IMG_2675.jpg
(히라노강)

7월4일 오후 2시 박사유 감독의 집: 저널리스트에서 활동가로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는 기자의 제안을 박사유 감독은 한사코 거절했다. 쑥스러워서? 사는 곳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단다. 그 말은 집의 위치가 알려지면 안되는 사연이 있는 것처럼 들렸고, 사는 곳이 어딘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쓰루하시에서 나고 자란 상당수의 재일동포들과 달리 그의 고향은 오사카도, 도쿄도 아닌 남쪽의 서울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서울에서 살았던 그가 일본으로 유학간 건 2002년 한·일월드컵 때였다. 2005년 한 한국 매체의 일본 통신원으로 합류하기까지 약 3년간의 일본 생활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정작 왜 도쿄로 가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고야 아이치 엑스포 소식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일어나는 한국 관련 소식을 고국에 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나 한류를 선전하는 뉴스는 그에게 큰 흥밋거리가 아니었다. “당시 정기구독하고 있었던 <한겨레21>에 우토로 마을 강제 철거 소식이 실렸다. 여전히 일본 내에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우토로 마을로 가겠다고 취재 신청을 했더니 데스크가 반대했다. 미래 지향적이고 희망을 주는 뉴스를 내보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세상에 희망만 주는 뉴스가 어디 있어? (웃음)”
그는 끝내 우토로 마을로 달려갔다. 마을 주민을 비롯한 일본의 의식있는 시민들이 함께 모여 강제 철거 집행 반대운동을 하는 풍경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얘기를 하다가 그런 문제를 모른다는 게 정당화될 수 있나 싶더라. 그러면서 내 역사적 의식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알려야 할, 그리고 고국이 알아야 할 재일동포의 삶과 소식이 있는 곳이라면 일본 어디라도 카메라를 들고 달려가게 된 것도 우토로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3·11 도호쿠 대지진 때는 프레스카드 하나로 일본 경시청을 설득해 지진으로 출입통제된 고속도로를 달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고국에 알렸다. 일본 매스컴에서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재일동포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고 비상식량을 하루라도 빨리 전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도쿄를 거쳐 센다이에 있는 도호쿠조선초중급학교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적도 있다. 하루에 2끼만 먹으면서 아낀 쌀로 근처의 일본 학교와 일본 대피소에 주먹밥과 국밥을 만든 조선학교 학생들의 감동적인 사연도 생생하게 전했다.
저널리스트로서 박사유의 집요함은 뉴스가 필요한 곳을 찾는 데 그치지 않았다. 데스크가 그가 부지런히 취재한 뉴스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지 않은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가와즈 기요에를 비롯한 일본인 시인 55명과 재일동포 시인 24명이 함께 낸 시선집 <조선학교무상화제외반대 앤솔러지>에 대한 기사를 내겠다고 하니 데스크가 재일조선학교 무상교육 배제 관련 뉴스를 그만 취재하라고 했다.” 관련 자료를 찾아 일일이 번역해가며 이 일을 세상에 알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설득했지만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조차 없던 편집부에 그건 쇠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굴려야 했다. “마침 일본의 팔레스타인 연대운동 진영이 무인양품(無印良品)의 이스라엘 시장 진출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뉴스로 내보내면서 전 무인양품 회장 쓰쓰미 세이지가 쓰지이 다카시라는 필명으로 <조선학교무상화제외반대 앤솔러지>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함께 알렸다. (웃음)” 그가 부지런한 두 다리로 만들어 낸 뉴스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세상을 알려야겠다는 집요함이 컸다.

물론 스스로 꼽은 저널리스트로서의 단점도 있다. 2012년 3월 촬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후유시바 국토교통성 장관이 우토로 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우토로 마을 문제 해결에 착수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우토로 마을의 한 어머니가 “몰래 촬영하라”고 권했지만 박사유는 자신의 촬영으로 마을이 잘못될까봐 촬영하지 못했다. “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마을 주민들과 일본 정부가 약속을 했다더라. 차라리 그 말을 못 들었으면 모른 척하고 촬영했을 텐데…. 스스로에게 불만스러운 것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폐를 끼쳐야 하는 일은 안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취재원과 신뢰를 쌓을 수 있지만 좋은 그림은 못 건지게 되더라. (웃음)” 인터뷰를 시작한 지 두 시간 가까이 지났을까. 쉴새없이 떠든 탓에 얼굴이 창백해진 그를 보고 영화 <60만번의 트라이> 오카모토 유카 프로듀서는 “(박)사유의 몸이 아직 완전치 않으니 오늘 인터뷰는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했다. 유방암은 완치됐지만 아직까지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오카모토 프로듀서의 설명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의 만남을 기약하고 집을 나오니 저녁 노을이 히라노강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7월5일 오후 2시 박사유 감독의 집: 연대로 극복한 암


<60만번의 트라이>의 한국 배급 계약을 맺는 날이다. 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조은성 프로듀서가 오카모토 유카, 나가타 고조 등 <60만번의 트라이>의 일본 프로듀서와 배급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덕분에 박사유 감독과 전날의 대화를 조금은 편하게 이어갈 수 있었다.
재일동포가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국에 전하겠다는 그의 신념에 변화가 생겼다. 참여정부가 세운 ‘우토로 재단법인’이 우토로 땅을 소유한 일본 기업으로부터 땅을 사들이면서 우토로 마을의 꼬인 실타래가 풀렸던 2010년쯤이었다. “우토로의 한 활동가가 이렇게 얘기하더라. ‘처음에는 당신이 기자 나부랭이인 줄 알고 상대를 안 했다. 하지만 우토로 문제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훌륭한 활동가가 맞는 것 같다’고.” 그 말은 망치가 되어 박사유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스스로 활동가라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앞으로 동포들의 삶을 전달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설령 활동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활동가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우토로 마을을 위해 모금을 해달라는 뉴스를 만드는 대신 모금함 통을 들고 거리로 나가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나가보니 이미 우토로 모금에 참여한 사람이 많더라. 새로운 사람을 뚫어야겠다 싶어 우토로 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생계를 위해 일본에 촬영 온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송국 사람들에게 우토로 얘기를 해주면서 모금을 독려하고, 당장 돈이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에서도 모금할 수 있는 계좌를 알려주고, 그렇게 우토로 모금 활동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우토로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해 다시 촬영을 오기도 했다.”
모금 활동에 열중하던 어느 날, 그는 큰 모금함을 껴안은 채로 우토로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몇날며칠이 지나도 몸에 통증이 사라지질 않아 병원에 갔더니 아무 이상이 없단다. 한달, 두달, 세달, 네달 계속 집에서 뒹굴거리며 잠만 잤는데 몸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두문불출하는 그가 걱정되었는지 우토로의 어머니들은 “괜찮다”는 그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우토로의 어머니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현관문에서 어머니들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노래방에서 찍은 어머니들의 영상을 아직 편집 못했는데. 내가 이대로 가면 안되겠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박사유는 어머니들을 끌어안고 그 자리에서 참아냈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틀 동안 어머니들은 냉장고를 가득 채워주고, 필요한 물건을 마트에서 사다준 뒤 우토로로 돌아갔다. 곧바로 박사유 감독은 집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에 자리한 암 전문 병원을 찾아갔다. 그렇게 가까운데도 한번도 병원을 찾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갈 용기가 나지 않았거나 왼쪽 가슴에 혹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했는지도 모른다. 네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앙상해질 대로 앙상해진 그의 몸을 보자마자 의사는 “바로 여기네요. 암 맞네요”라고 말했다. 초기암에서 말기암으로 넘어가는 유방암 3기였다.
“소중한 사람들의 영상을 굉장히 많이 촬영했는데 편집을 하나도 못했다. 지금부터 밤새워 완성시켜야 할까? 언제까지 편집할 수 있을까?” 암 진단을 받자마자 의사에게 던진 그의 첫 질문이었다. 그 영상이 바로 우토로의 어머니들을 비롯한 오사카 조고 럭비부를 따라다니며 찍었던 영상들이다. 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 암 때문에 그간 촬영한 소스를 편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설 만큼 미련했다. 의사 역시 “당신 병 걱정이나 하시지” 하고 비웃었다. 그런데 첫 진찰 이후 의사로부터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느낀 박사유는 그 병원을 다시 찾았다. “어차피 다 잘라낼 거라서 서두를 게 없다”는 게 의사의 설명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이상했다. 암은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아야 완치가 되는데 다 잘라내겠다니. 그때 다른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암 치료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도쿄의 세이루카 병원은 진찰 받는 데만 4개월이 걸리는 등 어딜 가도 당장 치료가 가능한 병원은 없었다.
조금의 희망도 없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우토로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이었다. 박사유를 강제로(?) 끌고 우토로로 데려간 우토로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삼시세끼 꼬박 따뜻한 밥을 지어 먹였고, 우토로 근처의 암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게 하면서 따뜻한 사랑으로 보살펴주었다. 덕분에 항암제 수술도, 방사선 치료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저널리스트로서, 활동가로서, 우토로에 쏟아부었던 그의 열정에 우토로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은혜로 갚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박사유 감독은 “우토로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우토로를 도와준 재일동포들에게 큰 빚을 졌다”고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서로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 이들을 연대하게 했고, 그 연대가 그들을 구원한 것이다.

7월5일 밤 9시 쓰루하시역 근처의 꼬치집 ‘구시노모리야’(串のもりや): 60만 재일동포를 위한 ‘트라이’

IMG_1090.jpg
(쓰루하시 역 근처의 꼬치집 구시노모리야)

“사유! 이게 얼마 만이야.” 시끌벅적한 퇴근길의 인파를 뚫고 쓰루하시역 인근의 작은 꼬치집에 들어가자 꼬치를 뒤집고 있던 중년의 여사장님이 박사유 감독을 환하게 반긴다. <60만번의 트라이>의 주인공인 오사카 조고 럭비부의 리성영 학생의 어머니다. 조선학교 출신으로, 남편 리창리와 함께 꼬치집을 운영하며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기자 일행을 가리키며) 남쪽에서 손님이 왔어요”라는 박사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니는 테이블 앞에 앉은 한 무리의 아줌마들에게 “저분이 <60만번의 트라이>를 만들고 있는 박사유씨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 말을 들은 한 어머니가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 아들도 조선학교 다녀요. 투구(조선학교에서는 럭비를 투구라 부른다)부에 입단시키고 싶었는데 체구가 작아서…. 투구가 축구나 야구보다 팀 정신이 살아 있는 진짜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야구의 도시 오사카지만 이 동네만큼은 럭비가 인기 스포츠였다. 그게 다 오사카 조고 럭비부 덕분일 것이다.
박사유 감독이 오사카 조고 럭비부와 인연을 맺은 건 2007년 ‘오사카 조고 운동장 재판’ 사건 때였다. 오사카부의 동부에 자리한 히가시오사카시는 오사카 조고 운동장의 일부가 되어 있는 시 소유지의 명도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약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오사카 조고쪽이 1억4600만엔으로 시 소유지를 매입하는 조건으로 일단락된 사건이다. “우토로로부터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고민하던” 박사유 감독은 이 사건을 취재한 인연으로 오사카 조고 럭비부를 촬영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하필이면 왜 럭비부였을까? “2009년 1월 전국고교럭비대회인 하나조노 4강전에서 역대 최약체였던 오사카 조고가 일본 최강팀을 상대로 아깝게 졌다. 그런데 재일동포들이 ‘가라! 가라! 가라! 조고!’, ‘잘했다! 조고!’라고 뜨거운 응원과 함성을 보내는 광경을 보니 전율이 일더라. 이 감동을 나만 느끼고 끝낼 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서 60만 재일동포와 남쪽 사람들과 함께해야겠다 싶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찍은 영상을 다큐멘터리로 만들 계획은 없었다. 그저 럭비부 아이들의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럭비부 아이들은 “정말 학교를 사랑하는 순수한 친구들”이었다. “역시 조선학교 출신인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에어컨도 없는 더운 교실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수업 듣는 아이들과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선생님을 보니 정말 감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특히, 럭비부 오영길 감독은 럭비의 노사이드 정신(시합이 시작되면 죽기 살기로 덤비지만 경기가 끝나 ‘노사이드’가 선언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서로 격려하고 축하하는 정신)을 가르치며 아이들을 건강하게 단련시켰다. 오영길 선생의 헌신적인 가르침 덕분에 오사카 조고 럭비부는 60만 재일동포의 염원을 안고 2010년 오사카총합체육대회를 제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오사카 대표로 하나조노에 진출했다(지난해 역시 오사카 조고가 오사카 대표로 선출되었는데, 오사카 하시모토 시장은 오사카 조고를 시청에 불러 아이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돌려보낸 뒤 오사카 조고에 대한 장비 지원을 철회했다). 매년 경쟁적으로 우수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고, 영양사를 고용해 식단까지 전문적 관리를 하는 럭비 강호인 일본 학교와 달리 오사카 조고는 자신의 학군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 진학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걸 감안하면 오사카 조고의 성적은 대단하다. “럭비부의 한 아이가 시합 전에 그러더라. ‘한번의 트라이(미식축구의 터치다운을 럭비에서는 트라이라고 한다. 바닥에 럭비공을 터치하면 점수를 획득한다)로 60만 동포들이 트라이할 수 있고, 60만 동포들의 트라이가 모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이제 겨우 사춘기를 관통하는 어린 아이들은 ‘60만 재일동포’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올린 채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당당하고 성숙한 아이들의 모습은 아픈 몸을 이끌고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낸 박사유 감독에게 큰 용기와 위안 그리고 희망을 주었다.
어쨌거나 오사카 조고 럭비부와 조선학교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던 가게 안의 재일동포 손님들은 하나로 ‘트라이’했고, 주인 어머니는 안주를 아낌없이 내주면서 술값을 받지 않는 과감한 ‘트라이’를 했다. “사유의 손님은 내 손님이나 마찬가지!”라는 쿨한 이유와 함께. 어쩌면 그것은 그간 재일동포의 삶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해온 박사유를 응원하는 60만 재일동포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가자! 가자! 가자! 박사유!

IMG_2699.jpg
(그날 술값을 받지 않으셨던 주인 아주머니)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IMG_2689.jpg
(몽당연필 공연)

7월5일 오후 6시에 열리는 몽당연필 오사카 공연을 박사유 감독과 함께 보러갔다. 그의 집에서 나와 쓰루하시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가 오사카 한국영사관에 불려간 사연을 들려주었다. “총련계인 조선학교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내 국적이 어디냐고 묻더라. 당신들이 더 잘 알지 않냐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영사관이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얘기를 김명준 감독에게도 했단다. 김명준 감독은 “오사카 조고 럭비부 촬영한 것을 가지고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라. 다큐멘터리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숨어지내지 말고 이 작품을 가지고 당당하게 한국으로 가라”고 말해주었다. 그게 박사유 감독이 다큐멘터리 <60만번의 트라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라고 한다. 인터뷰 내내 어린 시절 얘기를 일절 하지 않던 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냐”는 질문을 차마 하지 못했던 차다. 직접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저널리스트이기도 하고, 사회 활동가이기도 하고, 이제는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그에게 “셋 중 어디에 해당되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싸우는 사람? 이름만 저널리스트, 활동가, 감독인 사람이 세상에 널렸다. 나의 영역에서 본분을 다하며 살아가고 싶다.”​


​고교 무상화는 일본 내 모든 고교생을 대상으로 수업료를 징수하지 않겠다는 일본 정부의 교육정책. 경제적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이 없도록 하겠다는 게 목적으로 하토야마 정부가 내세웠던 공약 중 가장 기대되는 정책으로 평가됐다. 정부가 고교생을 둔 가정의 은행계좌에 수업료를 입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을 때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당시 공안 출신인 나카이 히로시 납치 담당 대신은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다니는 조선학교를 지원해서는 안된다”고 문부과학성 가와바타 다쓰오 대신에게 전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조선학교는 고교 무상화에서 제외됐다. 이 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사회의 차별이 극심해졌다. 오사카에서는 2011년 당시 하시모토 주지사가 지급정지시킨 10개의 오사카 내 초·중급 조선학교의 보조금 재개를 호소하기 위해 매주 화요일마다 전단지를 돌리는 화요행동이 열리고 있다.
Sort:  

짱짱맨 출석부 호출로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문제를 모른다는 게 정당화될 수 있나 싶더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우리는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

재일교포들이 정말 힘들게 사세요. 일본 사회의 그들에 대한 차별은 상상 못할맘큼 심한데 정작 모국(대한민국)은 그 사실을 잘 몰라요.^^; ㅠㅠ

그럴것 같습니다 ... 저도 제주 살이를 하게 되면서 부끄러운 적이 많았습니다. 100여년이나 몽골 지배를 받고, 4.3항쟁의 아픔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는 그 곳은 내가 알던 제주가 아니었습니다. 몰랐다는 말을 어찌 할까요.

재일교포들의 상황은 상상을 초월하리라 여겨집니다......

Congratulations @pepsi81!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Steemit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Award for the number of comments

Click on the badge to view your Board of Honor.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Do you like SteemitBoard's project? Then Vote for its witness and get one more award!

Thanks a lot!

아직 Payout 되지 않은 관련 글
  1. [취재일기] <카운터스> 첫 시사 첫 반응 ( 81.74 % )
  2. 프롤로그 넷 중 둘 ( 79.57 % )
  3. 뭐해 먹고 살래? 고민은 빠를수록 좋다. ( 78.06 % )
  4. 내가 원하는 것은- ( 77.41 % )
  5. 페스카마 호의 비극 ( 77.35 % )
모든 기간 관련 글
  1. [취재일기] <카운터스> 첫 시사 첫 반응 ( 81.74 % )
  2. 주말 오카사 번개 밋업, 참석하고 오겠습니다. ( 81.18 % )
  3. 내일이면 알게 되리 역사가 어디로 흐르는가를 ( 80.30 % )
  4. 프롤로그 넷 중 둘 ( 79.57 % )
  5. 신고합니다! 오사카 밋업, 잘 다녀왔습니다. ( 78.86 % )

인터레스팀(@interesteem)은 AI기반 관심있는 연관글을 자동으로 추천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interesteem 태그를 달고 글을 써주세요!

감사합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7
TRX 0.15
JST 0.028
BTC 57651.10
ETH 2377.43
USDT 1.00
SBD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