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14)
반추反芻 (14) - 미연동으로 이사
얼마쯤 지나자 대문소리가 들리더니 문희가 들어왔다.
“어, 웬일이에요?”
“문희씨…”
태식은 먼저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망설이는 동안 문희는 마루에 두부가 담긴 검은 비닐봉투를 핸드백과 함께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다.
“엄마… 어?”
문희는 방문을 열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태식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아무도 없어요? 오빠랑 엄마는 어디 가셨어요?”
“문희씨…”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문희는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태식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빨리 이야기 해 봐요. 답답해요.”
“오빠가…죽었어.”
“예?”
문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 태식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편 백악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이 문희가 열어놓은 방문을 덜컹거리며 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충혈 되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만 입술만 파르르 떨렸다.
“오늘 오후에 내가 집에 와보니 어머니하고 오빠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져 계셨어.”
“말도 안 돼…태식씨 지금 장난치는 거죠? 그렇죠?”
문희는 태식의 눈을 보며 다가갔다.
“그래, 내 말이 맞아! 태식씬 지금 우리 엄마랑 오빠 어디에 데려다 놓고 나 깜짝 놀래줄려고 장난치고 있는 거야.”
“문희야!”
태식은 다가오는 문희를 와락 껴안았다. 혼자 서 있을 수 없었다.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벌컥거리며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세상이 빙빙 돌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행히 회복 되셨는데, 오빠는 결국… 미안해, 문희야. 내가 조금만 빨리 왔더라도 어쩌면…”
문희는 자신을 껴안고 있는 태식을 팔로 밀어 낸 채 태식의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정말이에요? 정말…오빠가…”
태식은 여전히 말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 거렸다.
잠시 현기증이 일었는지 문희는 흔들거리며 태식의 팔을 잡았고 태식은 문희를 마루에 앉혔다.
“연탄불이 꺼졌기에 출근하기 전에 다시 피워놓고 잠들어 있는 엄마를 흔들어 연탄불을 보라고 말하고 갔었는데…그게.”
“H병원에 계셔…”
문희는 아직도 믿지 못하다는 듯 H병원에 있다는 태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서 대문으로 나갔다. 태식은 문희의 뒤를 황급히 따라가 문희의 팔을 잡고 자신의 승용차 뒷좌석에 태웠다.
문희는 차에 타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차가 병원을 향해 출발했지만 마치 영혼이 빠져 나가버린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눈은 정면에 고정된 채 앉아 있었다. 태식은 병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문희를 부축해 어머니가 있는 병실로 들어섰다.
“엄마!”
“문희야!”
“문석이가… 문석이가…”
문희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서야 문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 가슴이… 내 가슴이…기어코 문석이의 무덤이 될 줄은 몰랐다. 네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 어떡해.”
병실 안은 온통 모녀의 울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태식은 병실을 나와 병실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어떻게 되어가는 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오빠-, 오빠-”
K시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강변위에 하얀 소복을 입은 그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눈발이 휘날리는 강변은 살을 에는 듯 했고 태식은 울부짖는 그녀의 한 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그녀의 떨린 손에서 날리어진 문석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강물위에 떨어진 문석의 뼛가루는 강물 위에서 흔들리며 국화꽃잎처럼 뭉쳐져 가라앉고 있었다.
잊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그 한마디를 뱉어내던 문석의 모습, 그것은 태식의 귓가에 마지막 유언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생을 온전히 살지 못했던 문석은 자신을 그토록 보살펴 주었던 동생 문희의 손에서 그렇게 점점 잊혀 질 듯 멀어져 갔고 문희의 울음소리도 강물에 잠겨가고 있었다.
잊을 뻔 했어
기억 너머 멈추지 않는 바람 같은 사람
그늘진 삶의 어둠 속에
부딪쳐 울어대는 저 바람의 노래처럼
타인의 아픔 속에 향기롭게 피어나는
소용돌이 같은 꽃잎, 저 꽃잎.
잊을 뻔 했어
연약한 하나의 줄기로 버거운 사람
무수히 내려앉은 새벽이슬에
여울져 부서지는 아침 햇살처럼
가느다란 기억 속에 아슬히 피어나는
불꽃같은 꽃잎, 저 꽃잎.
- ‘국화’ 전문 -
한동안 문희는 출근을 하지 못한 채 실성한 사람처럼 오빠의 물건들만 바라보고 있었고 문희의 어머니는 여전히 기력을 차리지 못한 상태로 누워만 있었다. 첫 눈 이후로 간간히 눈발만 휘날릴 뿐이었던 겨울은 서서히 북쪽 산 너머로 밀려가고 어느덧 백악산을 타고 내려 온 봄 햇살은 문희의 집 앞 마당에서 무심히 거닐고 있었다.
태식은 문석의 체취가 묻어있는 집을 떠나 이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휴가를 내고 태식은 자신의 적금을 해약해 자신의 집이 있는 동림동 근처 미연동에 방을 얻어 문희와 문희 어머니를 이사하도록 했다. 한사코 집을 떠날 수 없다며 울기만 하던 문희였지만 자신도 언제까지 오빠의 흔적 속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느꼈던지 이틀 후, 태식이 문희의 집으로 갔을 때 망연히 짐을 꾸리고 있었다.
“잘 생각했어, 문희도 문희지만 어머니를 생각해야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서서 문희가 싸고 있던 짐 꾸러미를 빼앗아 여미던 태식의 손에 문희의 얼굴이 조용히 내려앉았고 이내 뜨거운 눈물이 태식의 손등을 타고 흘러 짐꾸러미를 적셨다.
“그만해… 오빠도 문희씨가 계속 슬퍼만 하고 있는 걸 원치 않을 거야.”
문희는 울음을 삼키더니 태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젖은 눈을 한 채 웃어 보였다.
“우리 엄마, 오빠 몫까지 사랑해 줄 거지? 그럴 거지?”
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식의 등 뒤에서 문희의 어머니가 누운 채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라한 이삿짐엔 문석의 물건들은 없었다. 마당에 쌓아 놓은 채 태워버린 후에야 이삿짐을 싣고 떠날 수 있었다. 골목을 벗어날 무렵, 바람을 타고 타다만 사진 한 장이 날아와 이삿짐 위에 사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