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원래 그런 것

in #kr8 years ago (edited)

홍콩에서 대학원 졸업 후 학생 비자가 끝나 최장 체류 기간인 3개월 이상을 머물 수 없게 되었다.

3개월이 되기 전에 마카오나 심천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오면 또 다시 3개월을 머물 수 있기에 나는 아기를 데리고 둘이 마카오 여행을 떠났다. 


여행이라기 보다 입출국 도장을 받기 위해 가는거라 별 준비 없이 떠났는데, 그때 마침 새로 산 유모차도 같이 가지고 갔다. 

가지고 가기 전에 유모차를 접는 방법을 남편한테 물었으나 남편은 귀찮았는지 어쨌는지 배에 그냥 실으면 되니 굳이 접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나는 뭔가 불안했지만 더 이상 남편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유모차를 접는 방법을 모른채 마카오 여행길에 올랐다..


배에 타자마자 문제 발생. 유모차를 접어야 한단다.==

제길. 그냥 실으면 된다고 남의 편은 분명 그랬다. 물어봤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산지 얼마 안 돼 접는 법을 모른다고 홍콩 선원한테 사정을 해 어찌 저찌 그냥 그대로 실었다. 


문제는 마카오에 도착해서 였다. 마카오에 도착해 광장으로 나가고 싶었던 나는 평소처럼 아무 생각없이 택시를 기다렸다. (바보같이 유모차를 실으려면 접어야 한다는 생각을 또 까먹었다..) 마카오 택시 기사는 내 유모차를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어찌 저찌 유모차를 나 대신 접었고 나는 그 과정을 옆에서 다 봤으나 역시나 접는 법을 기억하지 못 했다..


세나도 광장에 도착했고 택시 기사는 유모차를 내려주더니 다시 펴주질 않고 그냥 가려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유모차 좀 다시 펴 주세요 펴는 법을 몰라요 아저씨가 접었잖아요 ㅜㅜ 했으나 그 아저씨는 자기는 펴는 법은 모른다며 택시를 몰고 휭 가버렸다..


음...

아기는 안고 있고 유모차는 접혀 있고 마카오 길은 좁아 옆에 사람들이 치인다.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버튼 저 버튼을 눌러 보았으나 이 놈의 튼튼한 유모차는 접힌 상태에서 꿈쩍도 안 한다. 

너무 덥다. 

슬프다. 

남편도 친구도 없이 말 못 하는 아기와 나 단 둘이

덩그라니 외국에 떨어져 튼튼한 유모차 덕분에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었다. 


근데 왠일,

지나가던 아주머니 두 분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반갑다. 천사가 따로 없다. 

그 분들은 끙끙 나와 함께 유모차를 펴 보려 했지만

잘 되질 않았고 다시 나를 떠나시고 

한참 후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도와주다 

결국 자전거 가게 집으로 나를 데려 가셨다.

고맙게도 자전거 가게 주인 아저씨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휙 하고 유모차를 펴 버렸다. 


아기를 겨우 유모차에 태우고 세나도 광장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겨우 겨우 국수로 배를 채우고,

해가 지기 전에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타려는데 또 왠일.

아깐 잘 접어졌던 유모차가 내가 하니까 또 안 접어지는 것이 아닌가. 

.........


나는 바보인가..

정말 이상하다. 분명 그 아저씨는 한번에 했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내가 어리버리한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옆에서 보고도 모르다니. 사실은 접는 법 펴는 법을 자세히 물어봤으면 

됐을텐데 그 정도는 나도 안다는 척을 하고 싶어서

그 아저씨가 펴 줬을 때 다시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이게 문제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물어보면 될 걸.

아는 척 하느라 결국 혼자 하니 또 모르겠다.


아기는 안고 있고, 해는 져가고,

유모차를 접질 못 하니 택시기사는 날 태워주질 않는다. 그럼 버스라도 타자.

버스 정류장을 찾아 접히지 않는 튼튼한 유모차를 싣고 아기띠를 한 채 겨우 버스에 탔는데, 

이런, 무정한 마카오  기사 아저씨,

안 된단다. 접지 않으면 태워 주지 못 한단다.

분명 버스에는 공간이 넘쳤는데. 

기왕 올라 탔는데 절대 안 된단다. 내리란다.

내렸다.


...........


슬프다.

소심한 나, 이왕 탔는데 이번만 태워 달라고

그 무정한 기사 아저씨한테 찍 소리도 못 해봤다.

벌써 해는 졌고 유모차 접는 법도 모르고 

아기는 지쳐 품 속에서 잠들고 나의 다리는 천근만근

인데 나는 그 상황에서도 나 좀 도와달라는 말을

결국 하지 못 하고 바보같이 그냥 내려버렸다..


소심하고 바보같아 내 인생이 지금껏 이랬나 싶으면서

내 자신이 싫어지고 갑자기 울고 싶어진다.


남의 편한테 전화를 해 마구 소리를 지른다. 

너가 접는 법 안 가르쳐줘서 지금 외국에서 미아 

됐다고. 오도 가도 못 한다고. 아무도 날 태워주질 

않는다고 말이다. 남편은 그러길래 왜 광장까지 나가서 놀았냐고 되려 나한테 성질이다. 역시 남의 편이다.


성질이 나 전화를 끊어 버리고,

버스도 택시도 포기하고 그냥 무작정 걷는다.

어둡고 어둡다. 

아기는 지쳐 내 품에서 잠든지 오래. 

튼튼한 유모차를 끌고 하염없이 걷는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또 누군가.

나는 바보인가 사람인가..


지나가다 보니 누군가가 보인다. 머리에 뭔가 하얀 것을 했다. 자세히 볼 기운도 없다. 

걷다보니 점점 어두운 골목으로 빠져 들어 

번화가는 어딘지 물었다. 가르쳐주었다. 

지나가면서 자세히 보니 상가집이다..


번화가를 찾아 걷고 또 걷는다. 

소심하고 바보같은 내 자신이 싫고 또 싫다.


홍콩에서 시부모님과 남의 편의 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받기 싫다. 

유모차 못 접어서 택시 못 타서 외국에서 미아 

됐다는 바보같은 말을 전하고 싶지 않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항상 요모양 요꼴이다.


걷고 걷다보니 무슨 스포츠 센터가 보인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마카오 아줌마.

번화가를 물었으나 나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고,

나는 지칠대로 지쳐 이제 걸을 힘조차 없다.

아줌마한테 가장 가까운 호텔을 물었다. 

오늘 홍콩 가는 거 포기. 남의 편도 꼴 보기 싫다.

내 자신도 싫고 내 품에서 지쳐 잠든 아기만 불쌍할 뿐이다. 


다행히 근처에 호텔이 있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드디어 아기와 함께 지친 몸을 뉘였다...

남의 편은 그제서야 나에게 유모차를 접는 법 펴는 법이 담긴 설명서를 문자로 보내주었고 == 

그 설명서를 보니 이건 쉬워도 쉬워도 너무 쉬운 것이었다..!! 


휴,

어쨌든 외국에서 밤에 헤매다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아기랑 안전하게 몸을 뉘여서 다행.


그런데 아기가 잠든 후에도 난 잠이 오질 않는다.

오늘 하루를 생각해본다.


자기가 유모차 접어놓고 돈만 챙기고 펴 주지도 않고 줄행랑 친 마카오 택시기사. 

그리고 내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기꺼이 나를 도와준 세 명의 마카오 아줌마. 

그리고 내가 길에서 아기를 안고 낑낑대며 한참동안 유모차랑 실랑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일 없다는 듯이 나를 지나쳐갔던 많은 마카오 시민들.

그리고 내가 간절히 도움을 바랬으나 무정하게 나의 요청을 거절해버린 마카오 버스기사 아저씨.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원래 이런 걸까?

나는 가만 있었는데 나에게 피해만 주고 가버리는 사람이 있고,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나를 기꺼이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고, 또 내가 도움을 요청해도 거절하는 사람이 있고, 또 내가 살든 죽든 상관없이 자기 갈 길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그게 세상일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줄행랑 쳐버렸다고

해서 계속 세상을 원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세상엔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니까.


그리고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마음씨 착한 사람들도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도움을 간절히 바래도 무정히 나의 요청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존재하는 사람들은

내가 잘 살든 못 살든 상관없이 자기 갈 길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세상은 그냥 이런 것이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다. 


세상이 나에게 피해 준다고 원망만 하지 말고,

세상이 내 편이라고 우쭐대지도 말고,

날 안 도와준다고 남 탓하지 말고,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돌아간다고 우울해 하지도 말자.


내가 못나서 혹은 내가 잘나서, 

세상이 나에게 피해를 주거나 도움을 주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냥,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받아 들이고

나도 내 갈 길을 묵묵히 가면 된다. 


그리고 기왕이면,

나도 누군가를 기꺼이 

도와주는 그 세 명중의 한 명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도움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은 도움이었으니까.


그래도 인생은 

아직 살 만한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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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참 냉정하고, 모든사람들이 이기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따뜻한사람도 많다는걸 느끼게 됩니다. 제 주변에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그렇겠죠? ㅎ

세상이 냉정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거 같아요~~ 그래서 아직은? 살만한 거 같아요~~~^^

세상은 원래 그렇고 사람또한 그렇지요. 저두 기대감을 낮추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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