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 이야기

in #kr3 years ago

아부지는 음악을 참 좋아하십니다.

아빠라 부르기엔 아빠가 될 나이가 되어서 철이 안 든 것 같고, 아버지라 부르기엔 장성한 자식이 너무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보다 친근하게 아부지라 부르는 저희 아버지요.

아부지 때문에 저희 집은 심야가 아니고서는 항상 음악이 틀어져 있었습니다. 뭔가 우아하게 티 한 잔 해야 할 것 같은 잔잔한 분위기는 아니였고, 항상 조금 크다 싶을 정도로 매일 음악이 넘쳤지요. 화장실에 문을 닫고 들어가도 음악 소리는 들렸고, 샤워기를 틀어야 좀 안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기억할 수 있는 최대치의 어린 시절로 스트리밍 바를 끌어다 놔도, 음악은 항상 들리고 있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는 아부지 바이닐을 바닥에 꺼내놓고 바이닐 끼리 비벼대서 전부 버려야 했던 때도 있다네요. 엄마 말이 아부지가 바이닐을 턴테이블에서 꺼낸 다음에 또 다른 판을 올려놓을 때면 제가 땅바닥에 붙어서 매번 구경했더랍니다. 그렇게 기어 다니던 제가 두 다리에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보고 배운 걸 따라 한 것 같다고 하시네요.

Vinyl1.jpg

좀 더 커서도 아부지가 음악 들으실 때면 옆에서 같이 음악을 들었습니다. Vinyl 케이스나 CD 케이스도 괜히 한 번씩 구경하고. 듣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이 음악 뭐냐고 여쭤봤죠. 그냥 좋았을 뿐이에요. 유치원 갔다 와서 어떤 음악이 듣고 싶어서 엄마한테 틀어달라 쫄라대면 엄마는 틀어주질 못하셨어요. 무작정 쫄라대는데 그 CD 가 어느 건지 아실 턱이 없지요. 그래서 어느 때부턴가 들어서 좋은 음악이 나오면 케이스 표지에 어떤 그림이나 사람이 있는지를 기억했어요. 그리고 혼자 틀어서 듣기 시작했죠.

전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 시절에 저희 집 안방에 스피커가 있었데요. 그걸 제가 해먹었다네요. 물론 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저음이 나오는 우퍼 부분을 그림 그린답시고 전부 찢어놨답니다. 그래서 새로 하나 사셨던 거 같은데, 그 오디오는 기억이 납니다. 티비 양쪽에 놓인 넓고 낮은 스피커가 내는 소리가 좋았어요. 학교 다녀오면 엄청 많은 CD 들 중에서 하나 골라 틀어놓고 씻고, 밥 먹고, 숙제하고 그랬습니다. 그쯤 돼서야 케이스에 적힌 글씨들을 읽었던 거 같아요. 물론 알파벳만 읽을 줄 알았습니다. 브이, 아이, 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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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교에 다녀오니 검정색 플라스틱의 앰프는 없어지고 은색 알루미늄의 앰프가 있네요. 그리고 점점 스피커 개수가 늘어갔습니다. 넓고 낮은 스피커 대신에 날렵하게 생겨서 키가 커진 스피커와 티비 밑, 소파 양옆으로도 하나씩. 마치 음악이 하늘에서 내리는 거 같았어요. 어떻게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지 너무 신기했습니다. 엄마가 갑자기 왜 아부지한테 화를 내는지는 이해하지 못할 즈음의 나이였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녀오니 LD 플레이어가 생겼네요. 엄마는 또 샀다고 잔소리를 하십니다. CD 만큼 또 LD 를 모을 거냐고. 그저 신나신 아부지는 대꾸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신났습니다. 엄마가 얼마냐고 다그치셨죠. 아부지는 용감하게 숫자를 말하셨어요. 앞자리 숫자를 바꾸는 대신 0을 하나 빼버리셨죠. 그렇게 아부지는 웃으시고, 유이하게 0 이 빠진 것을 아는 저도 웃었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입시를 준비했고 캠퍼스를 오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먼 타지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랩탑 스피커의 말라비틀어진 음악 소리와 귓가만 겨우 울리는 이어폰 소리로 음악을 들었는데, 그 소리들은 나라가 불러 다녀온 곳에서 듣던 음악 소리와 닮아 있었습니다. 음악을 듣는 것이 전혀 즐겁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페이첵을 받기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갔습니다. 눈을 못 뜨게 내리는 눈마저 허드슨 강바람에 날려 쌓이지 않았던 추운 겨울날, 스피커를 사들고 돌아왔어요. 아직 어리버리한 사회 초년생은 코 묻은 돈으로 스피커를 샀고, 라면과 달러 버거로 2주를 연명했지요. 하지만 얼어서 깨질 것 같은 발바닥으로 조심스레 스피커를 옮기고 음악을 플레이 한 그날, 인생이 마냥 행복하다 느꼈습니다. 이렇게 음악이 감싸주는 게 얼마 만이었는지. 감사했어요. 그냥 누구에게든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소중하게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Companion3.jpg

순환 근무로 인해 뉴저지에서 펜실배니아로, 펜실배니아에서 플로리다, 캘리포니아, 일리노이를 옮겨 다니는 동안 10키로는 족히 넘어가는 우퍼와 스피커를 캐리어에 우겨 넣고 다녔어요. 무게 때문에 체력을 쪽쪽 빨아가도 매번 여정이 마무리되면 이제 다 왔다며 혼잣말을 건네며 스피커부터 캐리어에서 꺼내곤 했지요. 그리고 스피커가 들려주는 음악 속에서 짐 정리를 하곤 했습니다.

12년 전 그 스피커는 베트남까지 따라와서 지금도 제 앞에 있습니다.
제가 자주 듣는 음악들에 길들여져 새삼 소리가 더 좋아진 것 같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옛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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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ellin님 안녕하세요. 개수습 입니다. @floridasnail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수습님 감사합니다 !
얼른 정규직 전환 기원합니다 !

음악이 항상 있는 집은 참 좋은것 같아요. 어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네요.
그런데 전 어머님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잘 되는 ㅋㅋㅋㅋ
멋진 스피커 보유하고 계신데요. 사진들도 너무 멋집니다!!

음악을 좋아하게 해주셔서 무한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래도 모든 어머님들은 같은 생각이실까요?ㅎㅎㅎㅎㅎ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 고맙게 간직하고 있는 스피커 입니다.^^

멋진 그 아부지에 그 아들입니다. 그 아부지와 그 아들을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충동마져 느끼게 됩니다. 한편으론 왜 우리 아들은 저런것은 닮지 않고 맨날 짐에가서 보디빌더만 할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그리고 달러버거로 연명하시게 만든 Bose 녀셕도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멋진 음악 얘기 기대됩니다.

아들은 정말 아버지를 많이 닮는 것 같아요. 그런면에서 @donkimusa 님도 운동을 좋아하시지 않나 싶습니다.^^ 우퍼 소리만 잘 조절하면 꽤나 소리가 괜찮기는 합니다. :))

짱짱맨 호출로 왔습니다!
한주 수고하세요
코인거래소인 고팍스에서 멋진 이벤트중이네요!
https://steemit.com/kr/@gopaxkr/100-1-1

달려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행복한 주말 되세요 !!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는 아부지와 아들, 참 행복한 모습이네요~
12년 지기 친구인 스피커도 정이 드셨겠어요~
@홍보해

앗. 플로리다님 감사합니다 ^^
추억이 계속 붙다보니 애정이 많이 가네요.ㅎㅎㅎ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

아... 학생때 기타 사들고 집에왔을때 어머니께서 얼마냐고 물어봤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물론 저도 그때 0을 하나 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하~

근 20년 지금까지도 저와 함께하고 있는, 당시 학생 입장에서는 꽤나 고가의 악기였어요.
음악을 만들어 내는 악기이든 담아내는 스피커든 함께 오래하다보면 추억 버프가 붙는것 같아요^^

와 핵공감 합니다. 진짜 추억 버프가 어마어마하게 붙었어요. 더 좋은 스피커도 정말 많은데, 차마 바꾸질 못하겠습니다.ㅎㅎㅎ @ttongchiirii 님께서 저희 어머니를 이해하시는 것처럼, @caferoman 님은 저희 아부지와 저하고 공감대가 형성될 것 같네요.ㅋㅋ @caferoman 님께서 기타에 가지시는 애정이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갑니다. :))

멋진 아버지셨군요.

음..뭔가 큰그림이 있었던 건 아닐거에요..-_-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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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인생이죠.. 플레이리스트가 나의 감정의 역사라는.. 어려서 늘 전축 가진 친구들 집이 부러웠습니다. 마이마이 한대로 버티던 시절에는 sony가 aiwa가.. 커서 턴테이블 한 번 들려 놔 볼라고 이리저리 용쓰다 비좁은 집에 영 언밸런스해서 결국 포기.. 지금은 보스미니도 부담스러워 아이폰 번들 이어폰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부러울 뿐입니다. ^^

감정의 역사 멋있네요.^^
부러워 마세요..대신에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ㅎㅎㅎ

12년 전 스피커라고 하시니 괜히 마음이 뭉클하네요~~ 음악을 어떤걸로 듣느냐에 따라 참 달라지는데..저도 급 턴테이블을 꺼내볼까 싶네요!

턴테이블로 듣던 음악들이 참 정겹기는 했습니다.^^
저는 좀 다양하게 듣다보니 스피커가..음..잡식이 된 것 같습니다.ㅎㅎㅎ
그래도 음역대가 넓은 음악들을 많이 듣다보니 소리가 답답하게 나오지는 않네요. :))

본문 중에 일리노이가 달려있으니 댓글을 안쓸 수가 없네요. 일리노이에 살고 있거든요. ^^ 저는 어렸을 때 주변의 고급 오디오를 가지고 있던 분들 덕에 일찍이 귀를 버려서 순수한 오디오파일의 세계를 포기하고 지금은 A/V 나 Home Theater 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어요.

소싯적에 다른 분들 집에서 듣던 탄노이 웨스트민스터나 아포지의 리본 스피커, JBL 의 파라곤에다가 미국에 건너와서는 윌슨 오디오들의 스피커 위주로 경험하다보니 저에게는 넘사벽으로 느껴지더군요. ^^

그래도 항상 오디오 스피커 하면 많은 추억들이 있어요. 어렸을 때 음악 감상실에 가서 듣던 매킨토시 앰프와 탄노이의 조합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고 정말 많은 일들이 음악 감상실에서 있었거든요.

우연히 발견한 글 맛깔나게 읽고 감사드리며 갑니다. 팔로랑 보팅은 당연한 거구요. ^^

굉장히 전문적이신 거 같아요!!
너무 고가의 장비들은 넘사벽인 존재라 별로 경험해보지를 못했어요. 게다가 한 번 듣고 나면 더이상 웬만한 리시버로는 음악 못 듣는다고 하길래 위험할 거 같아서 함부로 관심을 두지 않았답니다.ㅎㅎㅎ
찾아주셔서 감사드리고, 저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