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영화] 택시운전사 / 5.18 민주화 유공자의 아들로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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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5.18 민주화 운동의 이미지는 항상 흑백이었습니다. 접하던 기록물이 모조리 흑백이었던 탓일까요? 도청 앞의 시위대와 광주 시내를 누비던 트럭의 모습을 상상하면 검고 하얗게만 떠올랐죠. 아빠가 전남대 앞에서 보도블럭을 깨고, 화염병을 만들때 겪었던 세상은 분명히 총 천연색의 현실이었을 테지만 제겐 먼 이야기였습니다. 아빠는 5.18 당시의 이야기를 저희에게 거의 해 주지 않으셨거든요. 엄마도 그렇구요.

하지만 제게 다가오는 영화가 둘 있었습니다. '화려한 휴가'와 '택시 운전사'입니다. 화려한 휴가에서 담양의 메타 세콰이어 길을 달리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죠. 그 시대에도 색은 있었구나. 저렇게 밝고 찬란하고 어둡고 폭력적인 시대에도 색은 언제나 존재했구나. 사람들이 초개처럼 죽어나가는 시기에도 웃음이 있고 삶이 있었구나. 내게는 흑백의 사진일 뿐이었지만 부모님에게는 코와 눈을 찌르는 최루탄의 냄새고 생생한 현실이었구나.

이 글을 쓰며 아빠의 이력서를 다시 뒤져 봤습니다. 아버지는 타자 속도가 느려서 저한테 항상 타자 작업을 맡기거든요. 아버지의 대학원 논문과 이력서는 모두 제 손에서 나왔어요(엣헴). 1980-1981년 들불야학 교사. 1982-1983년 민주화 시위로 인한 징역 2년. 민주쟁취 국민운동 본부 광주 전남 청년학생 위원장, 전남 민주주의 청년연합의장, 전국 민주청년단체 협의회 부의장 등등... 왜 아빠는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하시는 걸까요? 아들인 저는 되게 궁금한데 말이죠.

아, 그래도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가 조금 있어요! 아빠가 경찰에 수배된 시기의 이야기인데요. 도망다니다가 집에다 전화를 했어요. 옷이랑 돈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하고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죠. 근데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웬 덩치 큰 남자 네명이서 '연탄 갈러 왔습니다'하고 들어오는 거에요. 아빠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도망치려고 하니까 그놈들이 'XXX 잡아라!' 하면서 아빠를 덮친 거에요. 알고 보니 형사들이 집 전화선을 따서 도청을 하고, 만나기로 한 다방에서 아빠를 덮친 거였어요. 결국 아빠는 징역 2년을 살았지만 저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엄마의 이야기도 안하면 삐질지도 몰라요. 우리 엄마도 시위 열심히 하고 도망치느라 대학교 졸업을 못하셨거든요. 몇년 전에서야 겨우 졸업을 하셨어요. 그 때의 이야기는 거의 해 주지 않으시지만, 막 솜이불을 창문에다 대고 그랬다는 얘기만 해 주시죠.

그런데 어째서 부모님은 어째서 총알이 빗발치는 금남로의 거리에서 시위를 하셨을까요? 감옥에 갈 지도 모른다, 총 맞아 개처럼 죽을 지도 모른다는 속삭임을 무시하고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을까요. 영화 안에서 송강호는 말합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있어도 좀 참고 그래야 하는 거야. 사는게 원래 다 그래.' 그러나 과연 참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까요? 송강호가 대학생이면 대학생답게 공부나 해야 한다고 타박하지만 류준열이 퉁명스럽게 반박하죠. '뭣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녀유.'

우리가 모르던 불의가, 어떤 폭력이 1980년 5월 18일, 저보다 젊던 제 부모님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던 것일까요?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로 나갈 수 밖에 없던 그 날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처참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군인들이 눈을 번득이는 초소를 지나가던 푸른 눈의 기자와 택시 운전사도 있었죠(영화를 보면서 @shiho님의 생각이 좀 나더군요). 그날의 실화가 조금 각색되긴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알기엔 충분합니다. 길게 쓰지는 않겠어요! 직접 보시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요.

이 영화의 모델이 된 위르겐 힌츠페더는 심장 질환으로 쓰러졌을 때 '나는 광주에 묻히고 싶다'라고 몇 번이고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회복 된 이후 25주년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했으며, 광주에 묻히고 싶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고 하였죠. 결국 사망 후 5.18 구묘역 입구에 그의 유해 일부와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위르겐 힌츠페터(생 1937. 7. 6 ~ 몰 2016. 1. 25)와 이름 모를 택시 운전사 분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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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하지 못했던 울분을 삼키던 기자분들에게도.

별점 4.5 / 마지막 부분은 좀 아쉽습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기 위해서 더 이상 말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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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하늘은 푸른 색이었고,
교복은 흑백이었습니다^^
박모양의 아버지와 그 패거리들이 강요한 것이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제게 다가오는 현실감이 부족했죠. 나아쁜 전두환씨 그러고도 잘살다니

오늘 보려하고 있었는데 고맙습니다~ 아버님은 장말 그 공간의 한가운데 계셨던 분이군요. 한편으로는 저는 자의 아버지의 삶에 대해 모르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많이 이야기해보고 물어보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죠. 이런 글을 썼다고 아빠한테 자랑도 하구, 그려러구요. 센터링님도 한번 이야기를 해보시는건 어떨까요?

자식에게 자랑스런 부모님이시니 행복하실겁니다. 꼭 말씀드려주세요 부모님께요^^ 보고싶은 영화네요^^ 시간내서 꼭 봐야겠어요~

꼭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최근의 영화 중엔 가장 나은 것 같아요.

저는 정말 사소한 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붓을 놓는다고 말하는데, 저 막짤 볼 때마다 창피해요. 멋진 선배들.

글을 쓰면서 몇 번이고 저 문장을 곱씹게 되죠. 내가 쓰는 글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싶구요.

송광호는 역시 이런 영화랑 참 잘 어울리는 배우인것 같습니다.
저도 내용을 대충 출발비디오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나중에 다운로드 받아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송강호가 포스터에서 활짝 웃을수록 영화 내용이 슬프다고 하는 데 이건...꺼흑 마이갓 ㅠ

네 민주화 라는 말 자체가 슬픔이 담겨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네요.
정말 슬픈 과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역사 순간들이 많지만..
근대사에서 5.18은 정말 잊어서는 안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버지께 그당시의 일을 조금은 전해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께서 광주에 계셨던 것도 아니었고,
일때문에 광주로 가야했는데 그 길이 막혀서 겪으셨던 이야기였지만요.

다시는 재발되서는 안되어야 할 일이지만,
잊혀져서도, 잊어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5.18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고, 현재진행형이니까요.

지금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잊지않고, 기억하고,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 만으로도 그 당시의 사람들에겐 큰 위로입니다. 감사합니다.

화려한 휴가도 엄청 울면서 본 기억이 있는데
택시운전사도 엄청 기대됩니다.
스포없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꼭꼭 보시길 추천드려요. 이제 스포가 될 만한 것들은 전부 다 줄여버리고 있어서..후훗.

영원한빛이라니 아이디가 참 좋으시군요

가족들과 함께 봐야 겠어요.ㅎㅎ
작년부터 기대하던 영화라 꼭 극장가서 봐야겠네요!
이름을 영어로 옮겨봤어요 ㅋㅋ

잘 읽었습니다. 글로만 읽는데도 울컥하네요.
우리는 참 많은 분들께 빚을 지고 살고 있죠. 고마워서라도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데...

택시운전사 좋은 영화입니다 ㅎㅎ 저두 어제 보고왔어여 팔로하고 갈게요 ~

영화를 보고온 뒤에 마지막 글은... 가슴을 찌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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