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나는 음란서생이다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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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개봉한 영화 〈음란서생〉은 점잖은 양반의 이중생활을 유쾌하게 그린 이야기다. 내 이십대에 가장 사랑하던 배우 한석규가 명망 높은 사대부의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김윤서 역할을 맡았다. 김윤서는 권력을 얻는데 별반 관심이 없다. 별 욕심 없이 그저 하루하루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 왕의 후궁인 정빈이 지시한 위작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조사를 위해 찾아간 유기전에서 한 노인이 어떤 책을 필사하는 걸 보게 되고, 난잡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접하게 된다.

 그 날부터 김윤서의 머릿속엔 그 책의 내용이 떠나질 않는다. 급기야 그는 책을 유통하는 유기전 영감을 찾아가게 된다.

“인봉거사라는 사람이 그렇고 그런 글에선 아주 최고라던데. 대체 뭐가 그렇게 뛰어나서 그런 겐가?”
“뭐랄까? 진맛을 안다고나 할까?”

 김윤서도 결국 음란한 이야기를 쓰게 되고, 책이 유통되는 유기전으로 책을 갖고 간다. 별 기대 없이 책을 받아든 유기전 영감은 글을 읽고 깜짝 놀란다. 김윤서가 쓴 <흑곡비사>라는 음란 서적은 이내 저잣거리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김윤서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책에 삽화를 넣기 위해 가문의 적인 의금부 도사 광헌을 찾아가 부탁한다. 김윤서의 책을 읽은 광헌은 김윤서와 의기투합하고 보다 실감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때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삽화까지 삽입된 음란서적은 김윤서의 필명인 추월색의 명성을 더욱 높이게 된다. <흑곡비사>는 왕의 후궁과 선비의 금지된 사랑을 그리고 있어, 후에 이 책으로 인해 김윤서는 고초를 겪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김윤서는 음란서적을 통해 봉인되어 있던 자신의 창작 욕구를 분출한다. 그 욕구는 뜨겁고 강렬하다. 자신의 지위나 하는 일과는 다른 영역에서 엄청난 열정을 불사르게 되는 것이다. 그 열정은 은밀하고, 숨겨져야 한다.

 윤서는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 그는 밤이 되면 감추어진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한다.

두 세계

 많은 사람들이 두 세계에서 살아간다. 두 세계를 명명하자면, ‘현실 세계’와 ‘도피처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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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현실 세계의 요구에 따라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의 ‘도피처’는 입구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도피처를 상실한 사람은, 끊임없이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만, 반대로 내면에서 외부에 영향을 끼치는 생각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쯤 되면, 내가 ‘도피’라는 말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을 것이다.

 도피처는 삶의 역동성을 생성하는 ‘지휘 통제소’다. 자신의 열정을 은밀히 발휘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유사시 통수권자가 상황을 지휘하기 위해 들어가는 지하 벙커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지하 벙커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래서는 외부의 도발에 무너지기 쉬운 것이다.

 두 세계 모두 번화하면 제대로 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모두의 번영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하나라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현실 세계를 잡으면 외부적인 ‘성공’에 가까워질 것이다. 도피처를 선택하면 행복과 삶의 의미를 깨닫는 일에 가까워진다. (도피처를 선택한다고 현실 세계에 충실하지 않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현실 세계를 잡지 않는다는 말은 단지 현실 세계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상의 욕망을 내려놓는 걸 의미한다.)

 나의 도피처는 ‘이야기의 세계’다.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것 말이다. 이 세계는 음란서생의 그것처럼 꽤나 은밀하다. 나의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매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끔 SNS를 통해 올리는 글을 통해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겠지만, 특히 스티밋에 매일 글을 올리려고 밤마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난 이 일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희열을 느낀다. 내가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기만족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 비해 실상이 빈곤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난 최소한 그런 인간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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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란서생이다

 오늘도 난 두 세계 사이에서 비틀거린다. 아직 내 안에 있는 도피처가 온전하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곳으로 기어들어간다. 난 또 다른 음란서생 김윤서다. 은밀하게 움직이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의 도피처에서, 이야기 속 인물이 고통을 겪고, 병들고, 방황하고, 구원받는 일을 아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생존에 필수적이진 않지만 삶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와 결과로 인해 내 삶이 풍성해진다.

 난 아버지고, 가장이고, 선생이지만,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 글을 쓴다. 은밀하게 영역을 확장한다. 레지스탕스처럼 소리 없이 움직인다.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쓰지 않았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세계를 발견한다. 흥분되고 짜릿한 것을 찾아 또 숨겨진 장소의 문을 연다. 나는 음란서생이다.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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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ㅎ

oh thats cute

thank you. hh

솔메님이 벙커에서 글쟁이라 좋아요
선생님이면서 동시에 파이터가 아님에
저랑 이렇게 다른 세상에서 같이할 수 있음이 말이죠 ^^

그나저나.. 이 영화 마지막에..
그림이 움직이니 동영상 이라 불러야겠다는 대사가 생각나네요.
학창시절에 가끔 만들었었는데 말이죠 ^^

네 저도 소철님과 뭔가 묘한 동질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ㅎ
함께 할 수 있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영화에 현대적인 말들이 좀 나오죠. 나올때마다 빵빵 터지는 거요.
동영상도 나오고 댓글도 나옵니다.ㅋㅋ

앗 이거 혹시 이민정씨 나오는거였나요?
엄청 오래전에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ㅎ

네 정빈 역할로 김민정이 나옵니다.^^ 웃기고 재밌는 영화죠.ㅎ

우리는 모두 음란서생이네요 ㅋㅋ 가즈앗!!!

음란한 조서생님,, 오셨습니까.ㅋㅋ

음란하다는 단어가 반가운 건 소울서생님 닥분이겠죠 ㅋ 가즈앗!!!

우린 모두 음란합니다. ㅋㅋㅋ

아~ 글 좋네요. 저도 이 스티밋이 음란서생이 되는 창구 같습니다.

네 링싯님도 맘껏 음란합시다.^^

앗. 좀 다른걸 기대하고. 흠흠.

강렬하고 흥분을 주는,, 김부각 같은 거 말이죠?ㅋ

ㅋㅋㅋㅋ 뭔가 두번 속은 느낌 ㅋㅋㅋ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고 계신듯,,ㅋㅋ 뭘까요.ㅎ

그런 의미에서 스티밋은 일종의 저잣거리가 되겠군요 ^^ 자신의 또다른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장이죠. ㅎㅎㅎ 소울님의 음란한 이야기 앞으로도 찾아올게요 ^^

네 저잣거리에서 한판 잘 놀아봅시다ㅎㅎ 한껏 음란해 지렵니다ㅋ

내속에 나 아닌 다른 나가 숨어있죠...

네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세계속에 사는 존재가 있죠^^

저에게도 스팀잇이 도피처가 되는 건 맞는데.. 전 읽으러 오는 거 같아요.ㅎㅎ 다른 분들의 생각이나 이런 저런 일들 ^^ 대리만족도 하고 공감하고 위로받기도 하고.. ㅎㅎ
쏘울메이트님 같은 분들이 있으니 저에게 도피처가 되는 거겠죠? ^^
감사합니다~~~

네 읽든 쓰든 도피처에서 내면의 힘을 기르지요^^ 다른 이들은 모르는 위로와 힘을 받으면서 말이죠. feyee95님도 다른 이들의 도피처가 되고 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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