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s daily] 여름의 육아 일기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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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대문 주신 kiwifi님 감사합니다. 육아 관련 글을 쓸 때 이 대문 쓰렵니다.>

 여름 한 철 간간이 끼적여둔 육아 일기를 모아 올린다. 오늘 시원하게 내리는 비는 이 여름의 퇴장 선언 같아 보인다. 여름 한 철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도 비와 함께 넓은 시간의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다음 계절은 조금은 더 성장한 아이들과 함께 하게 되겠지. 워낙 성장과 발달이 빠른 시기이니, 어떤 의미에선 여름을 함께 보낸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이라고 봐도 무방한 아이들과 말이다.

1



 우리 두 살배기 둘째는 오늘도 6시 전에 가장 먼저 일어나 온 집 안을 활보하고 있다. 첫째 딸과 내가 자고 있는 거실로 나와서는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분주하게 우리 사이를 오간다.

 어젠 내 옆에 누워 내 다리에 앉은 상처의 딱지를 손톱으로 떼더니, 오늘은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퉁기며 논다. 그 와중에 우리 네 살 난 첫째는 단잠을 자고 있다. 평소 같으면 둘째 소리에 벌떡 일어났을 텐데 어제 물놀이의 여파다.

 난 둘째가 냉장고를 두드리며 요구르트를 요구하는 소리에 백기 투항하여 집에서 두 번째로 기상했다. 기저귀를 갈고 요구르트를 쥐어주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영국 맥도날드에서 벌어진 무 개념 손님과 알바생의 난투극 영상을 봤다. 덩치가 산만한 알바생은 바디 슬램을 시전하며 진상 고객을 시원하게 두들겨 주었다. 영상을 다 보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둘째가 있었다. 요구르트를 마시며 영상을 함께 시청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쳐다보니 내 어깨를 두드리며 씩 웃는다.

 방금은 언니가 숨겨놓은 뽀로로 음료수를 찾아와 내게 슬그머니 내민다. 아기는 쉽지 않은 협상 과정이 펼쳐질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집요하게 음료수 병을 내민다. 다른 물병을 줘도 흔들리지 않는다. 번번이 협상은 결렬된다. 뽀로로 병을 다 비우고 거기에 물을 담아준 후에야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싶더니 다시 냉장고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매일 아침, 둘째 딸이 선사하는 일상의 균열은 내게 웃음을 준다. 이것도 한때라는 걸 생각하면 벌써 씁쓸해진다. 정돈된 질서가 넘치는 일상보다 두 살배기 무법자가 헤집어 놓는 일상이 더 풍요롭다.

2

 병원놀이는 아빠가 주로 환자 역할을 하므로 누워서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누워서도 아이와 놀아줄 수 있고, 아이를 방치한 채 혼자 휴식을 즐긴다는 아내의 따가운 눈총도 피할 수 있다.

 나른한 저녁, 좀 눕고 싶은 마음에 아빠를 치료해달라고 첫째 아이에게 요청했다. 딸은 흔쾌히 수락했다. 아이는 자기 방으로 가더니 진료 도구가 가득 든 왕진 가방을 가져왔다.

 딸은 평소와 달리 동생을 간호사로 부르고는 옆에 앉혔다. 난 아이에게 몸을 맡기고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누웠다. 놀이 겸 휴식을 취하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딱 거기까지였다.

 모르는 사이 진료 과목에 치과와 안과가 추가되어 있었다. 우리 작은 의사 선생님은 엄마가 머리를 말때 쓰는 플라스틱 기구를 입에 물고 있도록 했는데 기구를 살짝 빼기라도 하면 엄하게 질책하셨다. 놀이 내내 한 20분 물고 있었던 것 같다. 치아 건강과 턱 건강을 바꾼 듯.

 다음엔 아빠 치아의 건강함을 최대한 어필해야겠다. 진료 과목은 어차피 의사 선생님 마음이겠지만.

3

 둘째 애가 잠귀가 밝아 네 살 첫째 딸은 거실에서 나와 함께 잔다. 아내와 나는 매일 밤 아이 취침이라는 과제를 받아 들고 딸 하나씩 데리고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두 살 아기가 안방에서 잠들고 안방 문이 닫히면 우린 거실에서 조용히 잠 잘 준비를 한다. 첫째 딸은 순순히 자려고 하지 않는다. 책 몇 권을 뽑아 와서 읽어달라고 하고 책과 관련된 동영상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걸 다하고 이제 눕자고 하면, 잠이 안 온다며 버틴다. 불을 다 끄고 이제 늦었으니 자야해, 라고 최후통첩을 보내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연기를 하며, 엄마를 부른다. 아기가 자고 있는 안방으로 난입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난 재빨리 협상 카드를 제시한다.

 "그럼 TV 켤 테니 눈 감고 있을래?"

 캄캄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이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TV 불빛이 번쩍이는 가운데 내가 등을 살살 쓰다듬어주면 십 분 정도 뒤척이다 잠이 든다. 그 십 분의 언덕을 넘으면 아이를 재우고 내 시간을 좀 가질 수 있다. 요즘 그 마의 십 분을 넘기지 못하고 함께 잠들어 버리는 일이 잦다. 아이를 재우다 그렇게 같이 잠들어버리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첫째, 아이를 재우고 나서 널기 위해 빨래를 돌리는데, 돌려놓은 빨래가 후끈한 세탁기 속에서 함께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다시 헹구고 탈수해야 한다.
 둘째, 에어컨이 밤새 냉방으로 돌아간다. 내가 자기 전에 보통 타이머를 맞추거나 제습으로 바꾸고 자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오늘 같은 날은 새벽에 늦가을을 경험한다.
 셋째, 이를 못 닦아 입에서 단내가 난다.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넷째, 아침에 일어나면 충전기에 꽂지 못한 핸드폰 밧데리가 간당간당하다.

 아기가 새벽에 거실로 나와서 활동을 시작할 때, 이미 벌어진 네 가지 일들이 퍼뜩 생각난다. 에어컨 리모컨만 겨우 찾아 끄고 다시 엎드린다. 우리 집 기상 1호인 아기는 그 사이 언니 옆에 벌러덩 누워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소리 나는 책을 눌러서 잠을 깨우기도 한다. 내 몸을 넘어 다니기도 하고, 내 등을 껴안고 엎드리기도 한다. 아기가 폭신한 몸으로 날 누를 때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포근하다.

 오늘은 첫째 딸이 아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잠이 깼다. 냉장고에 가자고 내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꼬집어 띄워서 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다. 일어나려고 하니 아기가 물컵을 내 등에 올려놓았다. 다행히 빈 물컵이었다.

 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밤새 잠이 든 세탁물을 다시 헹구는 일부터 하루는 시작된다. 비슷한 과정으로 하루가 끝나고 또 하루가 시작된다. 이 루틴이 어느 시점부터 달라질 때, 난 아이가 훌쩍 컸구나, 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삶의 흐름에 따라 내 마음엔 물때가 낄 것이고, 그때그때 그 물때가 주는 의미와 느낌을 알기 위해 이렇게 글을 끼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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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따님만 두분이시면 금메달....
평생할 효도 다 한다는 그 나이겠죠? 아직은? ^^
따님이 등장해서 그런지 글이 넘 따뜻해보여요.ㅎㅎㅎ

네 골드메달입니다ㅎㅎ
한창 효도 받고 있습니다. 맨날 애들 보며 웃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육아랑 잘 어울리네요. 일상의 행복이 따스하게 전해집니다.^^

대문 여러 개 주셔서 글 분위기에 맞게 바꿔가며 쓸 수 있겠어요ㅎㅎ

저도 병원놀이.. 환자역을 해야겠네요 ㅎㅎㅎㅎ

좀 누워있고 싶을 때 강추입니다ㅋㅋ

네 가족중에 솔메님이 제일 막내이실수도 있겠군요 ㅎㅎㅎ

ㅋㅋ 아니 핵심을 찌르셨네요~~ㅋ

따님을 표현하시는 말들이 왠지 귀엽습니다. 글을 읽고 있으면 상상 속의 따님들이 귀여우니까요^^
냉장고에서 시위를 한다니!! 우리 아이들도 아마 냉장고까지 가는 길이 열려있었다면 그랬을 거라고 읽는 내내 상상해봤어요ㅎㅎ 아직도 울타리를 쳐두고 있어서 부엌은 밥 먹을 때 빼고는 늘 출입금지랍니다ㅎㅎ
저는 거의.... 모든 일을 막는 편인데.... 그에 비해 아이들의 요구에 자연스럽게 해결해주시는 군요. 재돌님도 그렇게 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잘 안되더라구요.... 요즘은 더욱 윽박을 지르게 .....됩니다 흑흑 ㅠㅠ
오늘은 아이들이 먼저 잠들어주길 기원할게요!(저는 야근 예약입니다!! 오늘 낮잠을 2시간이나 잤거든요!! 하하하)

실제로도 애들 하는 짓이 웃기고 귀여워요. 지금 시절이 넘 빨리 지나가면 아쉬울 거 같네요.
냉장고로 가는 길을 너무 열어뒀나봐요ㅋㅋ
첫째 어릴 땐 울타리 쳐뒀었는데 지금은 오픈해두니 맨날 냉장고 가자고 난리네요ㅎ
지금쯤이면 김쑤님 달콤한 잠에 빠지셨겠죠. 아이들 부디 일찍 잠들었길 바랍니다!^^

ㅋㅋㅋ 육아의 힘듦이 느껴지지만
이또한 금방 지나가더라구요...

애들이 너무 빨리 자라는 건 또 싫더라구요,,^^

아이들과 잘 놀아주시는 자상한 아빠시군요.
참 금방 커요, 아이들은.

이 시절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는 걸 알기에, 가능하면 많이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ㅎ

병원놀이에 그런 치명적인 단점이. 그나저나 저희 어릴 때나 지금 아이들이나 그맘때 엄마 아빠랑 할 수 있는 놀이는 다 비슷한가봐요.

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놀죠. 다만 분야마다 더 정교해진 장난감이 나온다는 차이가^^ 병원놀이 장난감도 실제와 가깝게 나오죠ㅎ

일상을 재미있게 쓰셨네요.
아이 키울때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기에요.

네 그렇죠? 애들 복작복작해도 지나고 보면 지금이 좋은 시기일 거 같아요^^

아.. 아이들의 일상 정말 너무 귀여워요 ㅠㅠ
왠지 멀지 않은 미래에 닥칠 수 있는 일 같아서 기분이 묘하기도 하지만요...ㅎㅎㅎㅎ

신농님이 조만간 엄마가 되시면, 육아라는 포스팅 주제가 하나 더 늘겠지요!^^ 신농님이 쓸 아기자기한 육아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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