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u essay] 첫 인상을 믿지 마세요.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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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급을 맡아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부재할 때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아이가 있다. 올핸 희진이가 그런 아이였다. 희진이는 많은 선생님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인데, 벌써 키가 165cm가 넘어갔으니, 웬만한 여선생님들보다 컸다. 3학년 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는데, 그때 벌써 160cm가 넘는 10살 아이였으니 처음 만난 담임 선생님은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혹시, 어떤 사정 때문에 학교를 쉰 적 있냐고. 쉽게 말해, 복학생이냐고 물어본 거다. 희진이는 남들 다 하는 나이에 입학을 했고, 학교를 한 번도 쉰 적 없다. 큰 키와 덩치 때문에 어딜 가든 늘 눈에 띄는 아이였다.

 새 학기 첫날, 교실에 들어왔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희진이가 앉아 있는 걸 보고 순간 학부모가 잠시 들어와 앉아 있나 했다. 희진이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큰 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살짝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 희진이는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아이였다. 새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희진이는 첫날부터 내가 하는 말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고, 학급 규칙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첫 인상이 별로였다. 난 희진이의 큰 키처럼 마음도 4학년을 벗어나 저 앞서 걷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너에겐 6학년 학생에게 어울리는 규율이 필요하겠구나, 라고 마음먹고 희진이가 불만을 표시할 때면 면박을 주기도 했다. 나, 6학년만 수년째 한 선생님이야, 호락호락 하지 않다구!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만난 지 일주일째, 난 희진이에 대한 나의 평가가 완전히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희진이가 툭툭 내뱉는 말들이 거슬렸지만, 그 속에 어떤 악의도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희진이는 자신의 마음을 꾸미지 않고 툭툭 내뱉었다. 그러다가 말실수라도 하게 되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빨개진 얼굴로 멋쩍은 웃음을 짓곤 했다.

 희진이에 대해 느끼는 마음은 반 아이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에 아이들은 외모에서 풍기는 위압감 때문에 희진이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희진이가 의외로 털털하고, 아줌마의 잔소리처럼 들리는 말들로 은근히 친구들을 챙긴다는 걸 깨달은 후부턴 희진이를 아주 편하게 대했다.

 희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잘했다. 너 왜 이렇냐, 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느냐, 같은 말들을 남학생, 여학생 가리지 않고 했다. 근데 그 말에는 나무라거나, 비난의 의도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하는 말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의 뉘앙스와 의도를, 듣는 이들은 알아차리고, 어떤 이의 말엔 화를 내고, 어떤 이의 말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희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났다. 그 말투와 모습이 꼭 보통의 아주머니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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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희진이의 잔소리를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어떤 아이들은 그 잔소리를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희진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잔소리하는 대모의 이미지가 되어 갔다. 희진이의 실수에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웃었고, 희진이가 뭔가를 잘 할 때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치켜세워 주었다. 희진이는 남녀 할 것 없이 친근감을 느끼는 아이가 되었다.

 3월 말쯤에 체력 검사의 달리기 종목을 평가하는데, 희진이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1등이었다. 학년 전체에서도 희진이가 가장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신체적으론 중학생과 4학년이 달리는 꼴이었다. 희진이가 날렵하거나 발이 빠르진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희진이와의 다리 길이 차이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마침 교육감배 육상대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4학년도 80m 종목에 출전할 수 있다. 난 희진이에게 여러모로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대회 출전을 권유했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희진이는 싫다고 했다. 예전 다른 학교에서 달리기 대표가 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쟤 왜 저렇게 커? 라고 웅성거렸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직접 들은 것인지, 본인이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래? 그런 적이 있었어? 속상했겠네. 그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나쁜 거야. 근데 선생님이 보기엔 너한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거든. 지금 실력이면 학교 대표가 될 텐데. 대표가 되어 다른 학교 애들하고 겨루어보면 신날 것 같지 않아?”
“신나지 않을 것 같아요.”
“야, 너처럼 훌륭한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데,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아깝지 않겠어?”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희진이의 마음은 확고해보였다. 그때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면 이럴까, 싶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제안에, 희진이는…….

“희진아, 네가 달리기 대표로 나가면, 선생님이 스티커 50개 줄게.”
“네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죠? 네 할게요! 야호 신난다!”

 이런 거였어. 그럼 이게 열한 살이지! 희진이는 메달을 따는 것보다 내게 받는 스티커 약속에 더 기뻐했다. 희진이는 벌써 메달을 딴 듯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내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상 받으면 뭐해 주실 거예요?”
“음, 스티커 50개 더 줄게. 50개에 50개 더해서 100개! 콜?”
“콜! 진짜죠? 무르기 없기예요!”

 그때부터 희진이는 육상부에 합류해서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달리기 연습을 하고 들어왔다. 희진이는 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우리의 협상 조건을 확인했다. 선생님, 잊지 않으셨죠? 스티커예요. 흐흐. 그래그래. 그건 걱정 말고 열심히 연습이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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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가 있던 날, 담당 선생님과 육상부 아이들은 아침 일찍 대회 장소로 이동하고, 난 토요일 아침에 있던 탁구 교실 지도를 마치고 그곳으로 갔다. 마침 희진이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예선은 조2위로 통과하였다. 이제 4개조가 경기를 펼치는 본선이었다. 역시 희진이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스타트 라인에 같이 선 다른 아이들은 꼬맹이들로 보였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일제히 달려 나갔다. 희진이도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출발선에서 5미터 정도 나갔을 때, 순간적으로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희진이가 한 번 휘청했다. 발이 엉키기 직전에 다시 자세를 잡고 달렸다. 희진이는 8명 중에 세 번째로 들어왔다. 준결승 진출 여부는 기록을 비교해서 정해진다. 희진이는 아쉽게도 순위 안에 들지 못했다. 희진이의 도전은 그걸로 마무리되었다.

 시합이 끝난 희진이가 멀리서 날 보더니 커다란 팔다리를 흔들며 나를 향해 뛰어 왔다. 난 희진이가 실망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를 잠시 생각하고 희진이를 보았더니, 희진이의 표정은 기쁨이 넘쳤다.

“선생님! 저 가을에도 또 나갈래요!”
“어?”
“선생님, 여기 간식 진짜 많아요. 소풍 온 거 같아요. 이제 경기 끝났으니까 더 실컷 먹을 수 있어요.”
“어, 어 그래. 육상부 선생님이 간식 많이 준비해 온 모양이네. 달리기는 어땠어? 할 만 했어?”
“하하. 처음에 저 옆에 선 애가 절 보고 엄청 기죽은 표정을 짓더라구요. 근데 걔가 저보다 더 빨랐어요. 키도 작은데 진짜 빨라요.”
“다음에도 또 하고 싶어?”
“네 또 오고 싶어요.” 희진이는 실눈을 뜨고 내 눈을 응시하더니 말한다. “그리고 선생님, 잊지 않으셨죠?”
“그래 그럼, 잊고 싶어도 네가 잊을 수 없게 만들었잖아. 100개 줄게 100개!”
“와 진짜요? 하하하.”

 희진이는 누가 뭐래도, 열한 살이다. 가장 열한 살 다운 열한 살 말이다. 우리 반에 엉뚱한 말과 동네 아줌마를 연상시키는 행동으로 자주 웃음을 안겨줬던 희진이가 6월에 전학을 갔다. 우리 모두는 희진이와의 이별을 다들 아쉬워했다. 희진이는 가는 순간까지도 씩씩하게, 아이들에게 잔소리 한 바탕 늘어놓고 떠났다. 그 잔소리들이 우리 마음에 박혀서 진동한다.

 개학한 오늘 우리 반에 새로운 학생 하나가 전학을 왔다. 교무실에서 연락을 받고,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한 남학생이 말한다. 희진이 아냐? 희진이가 다시 온 거 아닐까? 다들 깔깔거리고 웃는다. 나도 빵 터졌다. 학기의 끝이 보이는 이 시점에도, 우리의 마음에는 희진이가 남아 있다.

 주말이면 동생들을 돌본다던 희진이, 동생들이 물건을 정리 안한다며 내 앞에서 잔소리를 해대던 아이, 내가 실수라도 하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죠, 선생님! 하면서 내게도 잔소리를 하던 그 희진이의 웃음소리가 문득 그립다. 놀러와, 희진아. 스티커 100개 줄게.


*학기가 끝나가고, 이제 1년동안 함께 했던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이 되고 보니, 내가 참 좋은 아이들을 만나 한해를 보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문자로라도 붙잡아 두고 싶어집니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Edu essay]라고 분류합니다. 당분간 이런 이야기가 잦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Soulmate essayist by your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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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뵙습니다. [풀봇+댓글+리스팀] 3단 콤비 들어갑니다. 현재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부끄럽네요. ^^

와 이런 찬사를 받게 되다니! 영광이고, 무척 기쁩니다.ㅎㅎ 3단 콤비는 사랑이네요. 연어님 워낙 유명하셔서 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주 뵈어요.^^

선생님 글을 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가즈앗!!!

감사합니다. 조선생님~ 쭉 가겠습니다ㅋ

예전에 지하철 가판대에서 봤던 '좋은 생각' 이라는 책에 나오는 사연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

마음 포근해지는 그런 사연 말이죠?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따뜻한 이야기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잠시나마 따뜻하게 해드렸다니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아 정말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ㅎ
아이들은 아이들이라는 걸 깨닫게 하네요 ㅎㅎㅎ
선입견과 첫인상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그렇게 하더라구요
생긴게 저러니 성격은이렇겠지~
그 생각을 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고, 더 아이들 같은 아이가 있죠.ㅎ
첫인상과 후에 알게 된 마음의 갭이 너무 커서 더 아이답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 이야기는 언제나 눈길이 갑니다 ^^

동종업계 종사자이신,, 공통된 고민과 기억이 많을 것 같습니다.^^

따뜻한 글 잘 정말 잘 읽었습니다.

희진 학생을 생각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너무 잘 느껴졌어요.

한편의 수필을 읽은 기분이네요.

남들이 볼때는 분명 장점인 부분이 있기때문에 육상대회에 나가보자는 권유에 어릴적 받은 상처로 인해 거절했고

스티커 50개를 받을 수 있다는말에 열심히 연습을 한 희진이의 모습에 뿌듯하기 까지 하네요 :)

전학을 가서 다른 지역에 있기 때문에 소식은 잘 알 수 없겠지만 분명 잘 적응하고 지내고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고갑니다.

네 희진이는 분명 그곳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기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도시 옆의 대도시로 전학을 갔는데, 지난 가을 소풍때 우리 도시 바닷가로 소풍 온 희진이를 마주쳤습니다.ㅋㅋ 반 아이들 모두 놀라워했지요.

스티커에 넘어가다니ㅋㅋㅋ 역시 아이는 아이인가 봅니다 ㅎㅎ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글에서 들리는 듯한 따듯한 이야기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네요 :)

네 이런 거에 넘어가줘야, 가르칠 맛 나지요.^^ 미소를 드렸다니 기쁩니다.ㅎㅎ

선생님의 눈으로 본 아이들의 모습.. 잘 읽었어여 너무 재밌네요. 어디서나 진심은 통한다는거 희진이의 진심도 통했으니 전학간 학교에서도 잘 적응하고 살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마지막에 또 전학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희진이가 살짝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에듀에세이 자꾸 기다려집니다.
제 아이가 곧 입학을 하니까 더더 학교생활이 궁금한 것 같아요 소울메이트님처럼 아이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분이 우리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네 희진이의 진심을 늦게 알아본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요. 그래도 희진이가 있는 동안 참 즐거운 일이 많았습니다. 희진이도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겠지요.
이제 곧 학부모님이 되시는 군요! 교육계에 들어오시는 걸 환영합니다.ㅎㅎ 처음이라 궁금하실 게 많으실 거 같습니다. 학교에 조심스러운 점도 있을테구요. 제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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