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만화 카페에서
오랫동안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있게 되면, 소망이 점차 소박해지는 모양이다. 아내는 애가 둘이 된 이후에, 잠시 여유가 생길 때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만화 카페에 가서 2-3시간 실컷 만화를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요즘의 만화 카페는 대단한 서비스를 자랑한다. 깨끗한 환경에서 방에서처럼 누워서도 만화를 볼 수 있고, 만화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거나 라면을 먹을 수 있다. 만화 카페의 라면의 맛은 웬만한 식당의 라면을 능가한다. 오죽하면 라면 맛집을 검색하면 만화 카페 이름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겠는가.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는 나의 방학 때 첫째를 장모님에게 잠시 맡겨두고 두세 번 만화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둘째가 나오고 장모님도 일이 바쁘셔서 쉬는 날이 거의 없게 되자 만화 카페에 대한 소망은 점차 로망으로 바뀌었다.
이번 겨울에도 그곳을 방문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었으나, 기회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내가 방학이라도 학교에 가는 날이 더 많은 처지이기도 했고, 장모님이 일을 쉬시는 날을 맞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결정적인 기회 한 번은 찾아오듯, 우리에게도 모든 타이밍이 맞아 떨어진 하루가 찾아왔고 우린 둘째를 맡겨 놓고 2시간 동안 만화 카페 나들이를 갈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작은 홀에 들어섰다. 아르바이트생은 커피 머신 앞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알바생은 이제 막 참치가 든 라면 냄비를 계산대 옆 주문대 위에 올려놓았다. 거뭇한 수염 자국이 선명한 덩치 큰 사내가 라면 냄비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자기 자리로 갔다. 홀의 테이블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만화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만화책만 지운다면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한 학습의 현장에 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다들, 나 집중하고 있으니 날 건들지 마시오! 하는 보이지 않는 푯말을 세워둔 것 같았다.
우린 앉아서만 머물 수 있는 한 평 정도의 작은 방에 자리를 잡았다. 읽는 속도가 빠른 아내는 열댓 권 정도의 순정만화를 뽑아오고, 난 최근 영화화된 <신과 함께> 시리즈를 서너 권 가져왔다. 이곳의 대표 메뉴인 ‘치즈 짜장 라면’과 ‘참치라면’도 하나씩 시켰고, 탄산음료와 봉지 과자도 구비했다. 이제 환상적인 두 시간을 보낼 준비가 되었다. 우린 등에 쿠션을 받치고 벽에 기댄다.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한다.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있던 만화방은 상가 건물의 지하층에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면 손때 묻은 만화책이 내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서늘한 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삼촌이 보던 무협 만화를 읽고는, ‘천제황’이라는 중국인의 이름 같은 필명을 가진 만화 작가의 무협 만화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만화방을 들락거렸다. 수중에 돈이 생기면 만화방으로 달려가 만화를 빌려보았다. (한 권 빌리는데 50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아직도 천제황 만화에 등장한 주인공들 이름을 기억한다. 백유향과 천태랑이다. 27년전에 읽은 만화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직 기억나다니! 이 불가사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최근에 나온 그의 만화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읽었을 때까진, 천제황의 만화에 등장하는 선한 주인공은 ‘백유향’이었고, 그 반대편에 선 악한은 ‘천태랑’이었다. 만화마다 표현된 그 생김새도 똑같았다. 백유향은 락커를 연상시키는 정리가 덜 된 긴 머리를 질끈 묶었고, 천태랑은 뒷머리를 땋고 나왔다. 똑같은 이름과 모습을 지닌 주인공이 전혀 다른 개인 스토리를 갖고 다른 만화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만화에서 또 만나니 반갑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백유향과 천태랑이 엮어가는 이야기 구조도 거의 비슷했다. 선한 백유향이 불의의 맞서서 무공을 발휘하고, 숙명의 적이자 필생의 라이벌인 악한 천태랑과 최후의 대결을 하는 식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구조이지, 스토리가 같다는 건 아니다. 절대 무공의 백유향은 언제나 최후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절세미인을 차지한다. 백유향과 천태랑, 그리고 여주인공은 정말 잘생기고 예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더 짜릿함을 느꼈던 지점이 정의가 실현되었을 때였는지, 절세미인을 얻게 되는 때였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짜릿함을 느끼기 위해 1편부터 열 몇 권에 이르는 책을 읽어나갔다. 동전이 생길 때마다 내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방에서 카페로
예전의 만화방 같으면 지금 아내와 함께 가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만화방’이 ‘만화 카페’로 바뀌면서, 침침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이미지에서, 밝고 깔끔한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그 덕에 이삼십 대 남자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았던 것에서, 다양한 연령층이 이용하는 공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만화방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방’들도 ‘카페’로 정체성을 바꾸고 있다. 게임방이었던 곳이 게임카페로 간판을 바꾸어,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직접 가져다주는 시스템으로 바뀌고, 심지어 실내 낚시터가 낚시 카페로 전환하여 젊은 층을 유혹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아무래도, ‘방’이라는 장소가 가진 폐쇄적이고 사적 공간의 이미지를 ‘카페’가 지닌 개방적이고 서비스가 있는 이미지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이다. 이 시도는 먹혀들어, 젊은 층은 별 거부감 없이 여러 카페들을 드나든다.
새로 생겨나는 많은 서비스업이 이 ‘카페’라는 이름을 달고 영업을 시작한다. 손톱을 손질해주는 곳은 네일 카페, 타로점을 봐주는 곳은 타로 카페다. 애견 카페, 고양이 카페는 진작 생겼다. ‘카페’는 서비스업의 트렌드가 되었다.
‘카페’는 역시 커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럽에 커피가 보급되면서 술 없이도 사교 활동이 가능하게 되자, 커피를 마시고 교류할 수 있는 카페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카페는 새로운 정보를 나누고, 다른 예술가들과사교 활동을 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은밀한 사생활의 ‘방’에서, 교류와 개방의 ‘카페’로의 전환은, 우리 사회가 움직이는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간, 모텔이나 호텔도 ‘침대 카페’나 ‘수면 카페’로 전환되고, 주유소, 경찰서, 학교마저도 카페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미래에 우리들은 온통 카페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집’의 개념도 사라지고, ‘거주 카페’에서 살게 될지도.
여전한 만족감
나와 아내는 들어온 지 2시간 반이 돼서야 만화 카페를 나섰다. 둘째 아이가 잠이 들었다는 기쁜 전갈을 받고서 30분을 더 머문 것이다. 아내는 라면을 입에 문채 만화책 속에서 멋진 남자와의 로맨스를 즐겼고, 난 입가에 짜장을 묻히고 저승 구경을 다녀왔다. 우리 둘 다에게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더 자주 올 수 있겠지? 하는 말을 나누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만화 카페가 망하지 않고 살아남길 바란다. 방에서 카페로 변신하여 살아남았듯이, 시대에 맞게 옷을 바꾸어 입고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길 바란다.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Cheer Up!
예전의 만화방은 지금의 만화카페랑은 완전히 천지차이더라구요!
저도 종종 만화카페에 가서 몇시간 보내기도 했었는데 ㅎㅎ
게다가 요즘은 전국 체인점도 생겨서 마일리지 적립도 되고.. 정말 별천지가 따로 없습니다 :)
이제는 퀴퀴한 만화방이 별로 안남았어요. 만화카페는 편리함이나 접근성에서 성과를 이루어 냈죠. 놀긴 딱입니다^^
학생 때, 만화책 쌓아놓고 하루 종일 보던 추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기회가 되면 저도 만화 카페 들러서 만화책 실컷 보고 오고 싶어지네요~ㅋ
네 오랜만에 해보면 예전 즐거움이 새록새록 피어납니다ㅎㅎ
프리랜서일을 계속 집에서만 하는게 좀 답답하기도 해서 근처에 혼자 쓸만한 오피스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월 이용료를 내고 사용할수 있는 카페+오피스가 엘에이 지역에 꽤 많더라구요. 예전에는 사무실이라고 하면 칸막이가 있고 답답한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말이죠. 주로 소규모 업체나 프리랜서들이 많이 이용하던데, 커피와 차를 마음껏 마실수 있고 다른 업체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도 하고 오픈된 분위기라서 꽤 좋아보였습니다. 이렇게 업무 공간도 카페화가 되는군요 ㅎㅎ
네 그렇네요. 카페라는 테마가 접근하기 쉬우면서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력도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여러 서비스와 접목될 것 같습니다.
프리랜서로 그런 곳에서 일하시면 참 즐거울 거 같습니다. 혼자 쓰는 사무실보다 훨씬 얻는 유익이 많을것 같아요^^
carrotcake님 업무공간 잘 구하시길 바랍니다 ㅎ
헉~ 저도 사실 그런 곳에서 한 번쯤 작업해보고 싶었는데~~^^
저도요 ㅋㅋㅋ 그런데 비싸기도 하고 집에서 너무 멀어서 그냥 어떤지 알아만보고 ㅠ_ㅠ 아직 집에서 작업합니다 ㅇ>-< 수입이 더 늘면 꼭 사용해볼겁니다ㅋㅋㅋ
만화카페 정말 한번도 안가봤는데 재밌나봐요 ㅎ
네 만화를 좋아하신다면 정말 좋은 곳이죠^^
저도 가끔씩 만화카페에서 시간 보내는 걸 즐기고 있습니다. 음료와 음식이 모두 잘 구비되어 있는 데에다가 시설도 깔끔해 데이트 코스로도 좋고, 혼자 즐기기에도 좋습니다. 작은 방이 마련된 곳도 있는데 이런 곳에서 종일권을 끊고 뒹굴다보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만화카페에서 먹는 라면이 참 꿀맛이죠. ㅎㅎ
정말 여가와 휴식을 보내기 딱 좋죠ㅎㅎ
아무런 일과 책임이 없는 날 종일권을 끊고 제대로 뒹굴어보는 바람이 있습니다ㅋ
라면 면발, 그 맛 예술입니다. 직원이 어디서 연수라도 받나봐요ㅎ
미소를 머금으면서 읽게되는 글이네요 :> 만화카페 이야기가 너무 로맨틱해요 :)
하하 그런가요. 이제 맘대로 못가는 로망이 되어서 그런가보네요ㅎ
아직 글이 채 식기도 전에 따끈하게 읽는 글이라 반갑습니다. 대구는 아직 만화방과 만화까페가 공존하네요. 폐인스럽고 구질구질한 느낌이 땡길때는 밤11시부터 아침8시까지 단돈 7~9천원으로 머물 수 있는 만화방을 찾곤합니다. 퇴근이 조금 이른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날은 까페를 향하고요.
대구는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군요ㅎ 만화방은 밤새 정액 요금이 매력적이죠. 타지역 가서 숙소를
구하기 어려울때 거기서 자기도 했습니다.
카페를 자주 가시는군요. 부럽고 좋은 일과입니다ㅎㅎ
만화카페 안간지도 참 오래되었는데
가서 편안한 시간 좀 보내고 왔으면 하네요.ㅎ
네 추운 겨울에 다른데 갈 거 없이 그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꼭 홍보이사같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