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더 레인(Before The Rain)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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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포 더 레인(Before The Rain)’ ”

  • ‘익숙한 역사’에 ‘낯선 말과 얼굴과 사진으로 질문하다’...
  • 그리고 그 ‘질문’에 ‘길’을 잃다...

표면에 드러난 내용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표층 아래의 심층의 언어들을 해석하기가 난감한 영화들이 있다. 마케도니아 출신 ‘밀코 만체프스키’ 감독의 <비포 더 레인 (Pred Dozhdot, Before The Rain, 1995)>이 그런 영화다.

<비포 더 레인>은 참으로 아름다운 영화다. 그러나 진득한 슬픔을 담고 있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서로의 훌륭한 조력자일 수 있다. 또한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함은 내포된 복잡함으로 인도하는 등대일 수 있다. 기막힌 마케도니아의 수려한 풍광과 공간이 시종 펼쳐진다. 그렇지만 그 공간에는 잔혹한 인종, 종교 갈등과 폭력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보편적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을 그리고 있지만 파괴된 인간성의 잔해는 처참하다.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내장된 지향은 ‘反역사’적 담론으로 ‘역사’의 전복을 꾀한다. 오히려 ‘역설’들로 가득 찬 게 우리네의 ‘삶’과 ‘역사’의 모습들일 수 있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되고, 시간은 ‘선형’과 ‘비선형’으로 중복되고 양분된다. 어떤 면에서는 동양적 불가의 ‘인연’을 강조하는 연기론(緣起論)이나 윤회(輪廻)사상이 맥락을 지배하고 있는 듯 보이다가 어느새 ‘런던’으로 상징되는 서구 이성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표층의 단순한 서사구조는 상징과 은유 속에서 무수한 의미를 품고 있다. 더구나 각각의 ‘말(word)’, ‘얼굴(face)’, ‘사진(picture)’라는 세 개의 챕터까지 나뉘어져 있어 왜 각각의 챕터가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연상하고 추적하기도 대략 난감이다.

솔직히 난 대단히 인상 깊었던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그건 내 능력의 한계임과 동시에 애초 감독이 나는 그저 던져줄 테니 정의하고 이해하는 건 ‘니들 각자 알아서 해’라는 ‘불친절함’에 기인한다.

줄거리는 단순하고 통속적인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파탄이 난 비극의 ‘로맨스’같다.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적 모습을 취재하여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마케도니아 출신 사진작가 ‘알렉산더’는 동료이자 유부녀인 ‘앤’과는 연인관계다. 그는 내전의 참상에 지친 나머지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16년 만에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의 고향 마케도니아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와 이슬람을 믿는 ‘알바니아’계간의 일촉즉발의 위기와 긴장이 감돌고 있다. 결국 영화 촬영이후 일이지만 ‘코소보 내전’으로 비화했다.

세르비아계인 그는 옛 연인이지만 이슬람계인 ‘하나’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알렉산더가 모른 채 그들의 딸인 ‘자미라’를 낳아 키웠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사촌인 ‘보얀’이 총격으로 살해됐고,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은 ‘자미라’를 의심하고 그녀를 잡아들인다. 하나는 알렉산더를 찾아와 자미라가 딸임 밝히고 그녀의 구출을 부탁한다. 알렉산더는 자미라를 민병대에게서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미라에게 쏜 총탄을 대신 맞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런던에서 그를 찾아온 ‘앤’이 허망하게 지켜본다.

알렉산더의 죽음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자미라는 계속 쫓기며 정교회 수도원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곳에는 묵언수행중인 알렉산더의 조카 ‘키릴’이 있다. 키릴을 자미라는 숨겨줬고, 비슷한 또래인 키릴과 자미라는 서로에 대해 호감을 느낀다. 그녀를 숨겨준다. 그러나 민병대가 수도원까지 수색하는 사태에 이르자, 묵언수행을 파기하게 되었고 신부들도 자미라의 존재를 알게 된다. 신부들은 키릴과 자미라를 민병대의 감시하의 수도원에서 내보냈고,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이미 죽은 지 모르는 삼촌 알렉산더가 살고 있는 런던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들은 자미라를 추적하던 자미라의 할아버지 일행에게 붙잡힌다. 그들은 자미라만 붙잡아 두고 키릴은 풀어준다. 하지만 자미라는 키릴에게 달려가고 자미라의 오빠의 총이 불을 뿜는다. 그렇게 키릴의 품에서 자미라는 죽어간다.

단순한 스토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라는 첫 챕터가 ‘키릴’과 ‘자미라’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인 ‘Before The Rain’도 수도원 노신부가 ‘비가 올 것 같아’라는 말에서 연유한다. 비가 와 해갈이 된다는 건 일반적으로 ‘갈등’의 해소를 의미할 수 있지만, 비는 때로는 청량함보다 혼탁한 혼돈일 수도 있다. 자미라는 동족의 총에 오히려 죽었고, 갈등을 해소되지 않고 증폭되었을 뿐이다. 이상한 건 런던에 있는 ‘앤’이 살펴보던 사진에 자미라의 죽음에 망연자실 울부짖고 있는 키릴의 사진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알렉산더가 살아있을 때다.

감독이 그걸 모를 일은 없고 다분히 의도적이다. 만체프스키 감독의 말하고자 바는 무엇이었을까. 시간은, 그리고 ‘역사’는 꼬여있다. ‘과거’가 ‘현재’가 되고 때론 ‘미래’가 될 수 있으며, 과거-현재-미래 조합은 위치를 바꾸며 무수한 경우의 수로 상정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역사의 동시성도 가능하다. ‘사진’이라는 챕터의 의미는 사진이라는 수단은 시공간과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단일한 시간, 역사의 ‘선형구조’의 파기는 마케도니아라는 시공간에서 벌어지고 비극을 극대화하여 전달하기 위한 구도일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충분히 성공했다.

그렇다면 ‘말’과 ‘얼굴’은? 말은 언어가 다르고 소통이 단절되는 걸 표상하는 것일까. 묵언수행을 하는 키릴을 설정하는 것도 그런 것일 수 있다. ‘얼굴’ 또한 얼굴을 마주하지만 직면하는 현실은 ‘다름’을 함축하는 것일까. ‘얼굴’은 런던에서의 ‘알렉산더’와 ‘앤’의 이야기다. 알렉산더와 앤은 사진작가와 에이전시의 관계를 넘어 연인사이다. 알렉산더는 보스니아 내전에서 그가 찍은 희생자들의 ‘얼굴’이 담긴 수많은 사진들로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연인 앤은 말했지만 유부녀다. 그녀는 현실의 삶에 묶여 고향으로 떠나는 알렉산더와 같이 떠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만 실제 서로 보는 지점은 다르다. 앤과 재결합을 애원하는 남편 ‘닉’과의 식당에서의 식사자리에서 동구출신으로 짐작되는 폭력배가 분풀이로 식당에 총을 난사했을 때 닉은 처참하게 사망했다. 닉의 ‘얼굴’은 총탄을 직통으로 맞아 뭉개졌다. 보스니아 내전 등 각종의 전쟁의 참상을 외면한 서구 ‘이성주의’의 종말을 선언한 것일까. 폭력은 어느 공간이나 잠재해있거나 범인이 동구권 출신임을 감안하여 폭력구조의 연쇄성과 파급력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비로소 앤은 알렉산더에게로 떠날 수 있었지만 그녀가 마주한 건 알렉산더의 장례식이었다.

감독이 제시한 키워드인 ‘말’과 ‘얼굴’을 단순히 ‘단절’이라고 지시하는 건 무엇인가 한참 모자라고 허전한 느낌이다. 또한 더욱 문제는 이 영화를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스토리텔링을 완성해야한다는 나의 강박관념이다. ‘역사적’이란 말은 당연히 과거-현재-미래로 단일하게 이어지는 ‘선형구조’다. 그러나 역사는 복합적이며 중층적이고 다의성을 내포하고, 과거-현재-미래의 단선구조는 전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확정된 인식의 기반으로 삼기에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 다만 ‘팩트주의’와 ‘진실주의’에 빠져 ‘상징’과 ‘은유’의 풍부함을 사장시키는 역사인식의 단일화의 폭력성에는 단연코 반대한다.

만체프스키 감독의 전체적인 의도는 폭력적 구조와 연쇄된 사슬, 그리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반복’과 ‘악순환’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충 그런 식으로 정리해버리면 무난하겠지만 ‘미세한 요소들’에 의해 발화된 충만한 느낌이 손상된다. 그것도 작가의 의도와 의지를 곡해하거나 삭제하는 것으로 영화와 작가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아니다.

마지막 장면은 이리저리 던져졌던 모든 의문과 질문에 이제는 그나마 친절함으로 함축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노신부는 키릴에게 “비가 올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원’은 둥글지 않으니까”라고 얘기한다. 마치 선문답이다. 이 말은 런던의 골목길 벽에 낙서로 써져있었다. “ ‘시간’은 절대 죽지 않는다. ‘원’은 둥글지 않다”라고.
그리고 그 뒤로는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 자미라의 모습이 보인다. 마침내 비는 쏟아지고 비를 맞고 있는 알렉산더의 주검이 오버랩 된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지만, ‘시간’은 죽지 않는다는 말은 모순적이다. 또한 ‘원’은 둥글지 않다는 말 또한 모순적이다. 그 의미 추적에 그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렸다.

멋진 수염과 강력한 눈빛의 주인공 알렉산더 역의 ‘라드 세르베드지야’는 낯이 매우 익다. 적어도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배우인 듯 싶지만 헐리웃영화에 진출해서는 <더블 타겟>이나 <테이큰2> 등에서는 주로 동구권 출신의 악당역만 맡았다. 이준기도 이연걸도 악당이었으니까.

1994년 ‘베니스 영화제’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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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쓴 사람인데요...남의 글을 함부로 무단으로 가져와 이렇게 전재해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삭제를 하지 않을시 고발조치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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