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history>민주주의 투사 김영삼 1부-2 민주주의 투사 김영삼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Kr-history>민주주의 투사 김영삼 1부-2 민주주의 투사 김영삼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박정희의 유신에 대항해 시작된 민주주의 투쟁

<40대기수론을 내세운 신민당 대통령후보시절 DJ와 YS>
1971년 YS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후보 경선에 뛰어 들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40대 대선 후보가 YS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YS가 주장한 '40대 기수론'에 부합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는 바로 김대중이었습니다. 같은 40대 였던 김대중에게 표가 옮겨 가면서 YS는 김대중에 패배하게 됩니다. 그렇게 김대중의 선거를 지원하면서 1975년 대선을 준비하려고 하는 YS에게 기회는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바로 박정희의 유신헌번 개정으로 대선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유신이 선포되자 계속되는 박정희의 살해위험에 망명을 택한 김대중과 달리 YS는 귀국을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당연히 큰 제제를 받게 됩니다. 이후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다시 한번 그의 성격대로 "한국에는 통지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라며 박정희의 유신정부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1974년 그간 보여준 그의 행보에 맞게 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선명야당을 주장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1975년 5월 21일 박정희와 함께한 영수회담에서 그는 박정희에게 크게 속고 맙니다.
영수회담에서 김영삼은 박정희에게 "민주주의 합시다. 대통령 직접 선거 합시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눈물을 흘리며 김영삼에게 "집사람은 총 맞아 죽고, 이런곳에서 오래 할 생각이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라고 대답합니다. 박정희의 눈물을 본김영삼은 온건투쟁으로 선회하지만 이회담이후 얼마 되지 않아 YS 긴급조치로 구속이 되고 야당에 깡패를 보내고 김영삼을 따르는 야당 정치인들은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배신당한 YS는 더욱 강력하게 박정권 타고와 민주주의 회복에 열을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YS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보여 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입니다.
1979년 8월 9일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발표에 노조는 인정 할수가 없었습니다. 사장은 그 동안 노동자들의 힘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이득을 해외로 이미 빼돌린 상황이었고 노동자들만 직장을 잃어 버리게 되버린것입니다. 노조의 여공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만들기 위해서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합니다. 신민당을 이같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 주었고 신민당사에서 농성이 시작됩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는 여공들을 위로하며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우리 신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들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며 노동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경찰들이나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따귀를 치며 신민당사에 오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8월 11일 이순구 서울시 경무국장이 신민당 당사에 전화를 걸어서 YS와 통화를 요구하지만 YS는 건방지다며 전화조차도 받지 않고 진압작전을 지휘하던 마포경찰서장의 따귀를 치며 여공들을 다 죽이려고 하나며 호통을 칩니다.
하지만 이러한 YS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이러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받아 드려지지 않고 되려 경찰은 1000명의 정사복 경찰을 동원해 당사 정문을 부수고 난입합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의 폭력에 대항할 수 있었을까요? 여공들은 경찰들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제압당해 강제연행 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행히도 22살 노조 상임집행위원 김경숙은 진압과정에서 추락해 사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게 국회의원, 기자, 신민당원들, 모두 폭행을 다했고 YS조차 회의실에서 멱살을 잡힌체 끌려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 사건을 통해 YS는 자신을 위협하는 정적으로 인정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져 있는 김대중과 처럼 더이상의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YS는 1979년 9월 뉴욕타임지와의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대통령을 제어해줄 것” 즉, 미국에서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하기를 바랍니다. 박정희는 정권은 더 이상 YS를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10월4일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YS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했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이같은 박정희 정권의 조치는 박정희의 끝을 이루는 사건에 기폭제가 됩니다.
YS의 제명은 당연히 총재의 재명을 인정 하지 못하는 신민당 국회의원들의 반발을 가져 왔고 10월 12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은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러자 10월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을 발표하면서 10월16일부터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는 다음날인 17일 부산시민 전체로 번졌고 18일엔 마산으로 19일엔 창원으로 번져나갔고 이로 인해 YS의 고향에서 10월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생각 하면 보수의 강력한 지지층인 부산, 마산즉 경남 지역에서 벌어졌을 일이라고는 상상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마민주항쟁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처럼 YS 박정희 정권에서 많은 탄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거 가지고 있는 곤조는 그런 탄압을 이겨내고 나중에 전두환 정권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정두환 정권에 대항합니다.
그럼 내일 3부에서 이어서 포스팅 하겠습니다~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부도 보고 왔습니다.
3부가 기대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마 훗날 재평가 되는 대통령은 김영삼이 될 거 같아요^^
넵 저도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저평가 받고 있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은 imf 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그렇긴 하지만 그 이전까지 진행한 일을 보면 확실한 자신의 청사진을 가지고 대통령에 올라간 사람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 기대해 봅니다.
YS가 가지고 있는 행동력은 확실히 보통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재미있네요. 모르는 내용을 아는 재미가 있습니다.
다음편 기대합니다!
ㅎㅎ넵~!! 감사합니다
3부가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ㅎㅎ
왜 민주주의를 가장 발전시킨 대통령으로 불리우는지 알겠네요
2018년에는 두루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