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두 종류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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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최근 한 미국 범죄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다.

한 바람둥이 남자의 전 부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남자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을 털어놓고 있다.
"그냥 냅다 총으로 쏘아버리고, 도둑으로 착각했다고 주장할까 생각했어."
"내 경우는, 그냥 죽는 건 그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해서, 가스라이팅으로 자살하게 만들고 싶었어."

'가스라이팅'이란 쉽게 말해서 정신적 학대를 뜻하는데, 아마도 극단적으로 행할 경우 상대를 자살로 이끄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 용어를 검색해보면, 대략 아래와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

가스라이팅: 가스등이라는 1938년작 연극에서 유래한 용어로, 상황을 조작하여 상대의 마음에 스스로 의심을 들게 만드는 학대 행위를 가리킨다. 극중 남편은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고는, 부인이 어두워졌다고 얘기하면 정신이 이상한 것으로 몰아간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가스등'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아니며, 따라서 가스라이팅 행위에 대한 적절한 예시를 들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실제로 '가스등'에 등장한 가스라이팅 행위는 어떤 것이었을까.

'가스등'은 1940년에 영국에서, 그리고 연이어서 1944년 미국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된 작품이다. 연극으로서도 엄청나게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더 친숙할 수 있는 영화 '가스등'에 잠시 주목하기로 한다.

무려 1940년대에 나온 영화에 대해서도 스포일러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글이 영화 자체의 리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다.

가스등(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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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폴은 귀중한 루비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고모를 살해하지만, 결국 루비는 찾지 못하고 도피한다. 세월이 흘러 그는 부유한 벨라와 결혼하는데 성공하여, 비어있는 고모의 아파트를 사들인다. 그의 목적은 어디엔가 숨겨져 있을 루비를 찾는 것이다. 애초에 돈이 목적인 결혼이었기 때문에, 벨라를 정신병원에 감금시키려고 한다. 그는 부인을 대놓고 무시하고, 쌀쌀맞게 대한다.

벨라는 성숙하고 차분한 성격의 여성이다. 감정 표현을 크게 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당대 영국인의 전형에 맞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애정 표현이 아닌, 존중이다.

그런데 폴은 매번 작은 물건들을 감추고,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따라서 벨라는 건망증에 시달리는 여자, 나아가 좀도둑질을 하는 여자가 되어 버린다.

교회에 나가거나 자선 활동을 하고, 이웃에 사는 부인들을 초대하거나 방문하는 것은 그녀가 안주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의무이자 권리이지만, 폴은 벨라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벨라의 활동을 금지한다. 그녀는 집안에 갇혀 있다시피 한 처지를 비관한다. 그녀는 자신의 사회적인 역할을 빼앗긴 상태이다.

벨라에 대한 가스라이팅은 바로 당당한 안주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좀도둑질을 했다는 (조작된) 사실에 가장 경악한다. 또한 자신이 비이성적이고 건망증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한 은퇴한 수사관의 등장으로 인해 사건은 종결된다. 수사관은 벨라에게 남편 폴의 과거를 모두 알리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폴을 검거한다. 벨라의 침착하고 영리한 면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때 벨라는 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 정신을 죽였어."

가스등(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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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그레고리는 스토킹하던 가수 앨리스를 살해하지만, 그녀의 보석을 찾는데는 실패하고 도망친다. 그 사건으로 인해 앨리스의 조카딸 폴라는 유학길에 오르는데, 갓 성인이 되자마자 접근해온 그레고리와 결혼하게 된다. 그레고리는 폴라를 설득하여, 앨리스를 살해했던 그 집을 신혼집으로 꾸민다. 그는 틈틈이 다락을 뒤져보면서, 폴라가 눈치채기 전에 정신병원에 감금시키려는 계획을 짠다. 그는 주로 부인을 어린아이처럼 다룬다.

폴라는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나, 훨씬 연상인 그레고리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레고리와 결혼한 상태이다. 그녀는 자신이 상속한 집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 남편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레고리는 아주 다정하고, 그녀는 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한다.

그레고리는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 사소한 물건을 감추거나 하는 식으로 폴라의 정신건강에 대한 의심을 심는다. 그레고리의 행위 자체는 1940년 영화의 폴과 동일하다. 그러나 태도는 훨씬 더 잘 포장되어 있다. 그는 시종일관 폴라의 정신건강을 걱정하고, 보호하는 식의 말과 행동을 한다.

폴라가 원하는 것은 연애 시절 그녀가 느꼈던 사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레고리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어디든 같이 외출하고 싶어한다. 그레고리는 폴라의 상태를 걱정한다는 핑계로, 그녀를 데리고 나가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것은 그 자체로 처벌이다. 그레고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어서, 일부러 예쁘게 차려 입으라고 한 뒤에 소지품을 감추고는, 외출을 취소하기도 한다.

또한 그레고리는 버릇없는 어린 하녀를 고용해서 폴라에게 대들게 하고는 교묘하게 하녀의 편을 든다. 그렇다고 해서 폴라가 명확하게 따질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폴라는 남편의 사랑이 변했다고는 느끼지만, 남편에게 조리 있게 따지기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표면적으로 그레고리는 계속 폴라를 위하는 말과 행동만을 하고 있고, 그녀의 느낌은 단지 느낌일 뿐이니까.

결국 첫눈에 폴라에게 관심을 가진 어느 젊은 형사에 의해 사건은 마무리 된다. 정체가 탄로난 남편에게 폴라는 말한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나는 당신을 돕고 지켜주었을 거야. 나를 미친 여자로 만들지 않았다면."

그레고리 역시, 보석에 대한 탐욕만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진심으로 다가갔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남긴다.

폴라와 형사의 새로운 로맨스의 가능성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폴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충분히 해피 엔딩이다.

가스등-가스라이팅

집안의 가스등이 가끔 꺼진 이유는, 남편이 산책을 나간다고 거짓말하고는 숨겨진 보석을 찾기 위해 다락의 비밀 공간을 뒤졌기 때문이다. 당시 집안 구조로 인해, 다락에서 가스등을 켜면 아래층에서는 등이 어두워졌다. 만약 부인이 가스등이 어두워지는 이유를 캐고 들 경우 남편 입장에서 피곤해지기 때문에, 그것도 부인의 착각으로 몰아간 것이다.

물건을 숨기고는 피해자에게 어디 두었냐고 다그치는 것, 기억을 왜 못하냐고 면박 주는 것 등은 그 자체로는 사소한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압박하는 식으로 상황을 숨막히게 만든 후에, 그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결점을 만들어내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결점이든 아니든 간에 타격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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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감사...맞팔할게요ㅎ

흥미로운 개념이군요. 배경 설명도 꼼꼼하게 해 주시고...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사람 바보 만들기'에서 좀 더 많이 나간 셈이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네, 저렇게 범죄의 동기가 없더라도...상대를 놓치지 않으려는 통제광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행위 중 하나가 아닐까 하네요. 보팅 감사해요!

짱짱맨 태그 사용에 감사드립니다^^
존버앤캘리 이번편은 왠지 찡함..^^
https://steemit.com/kr/@mmcartoon-kr/20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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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짱짱맨!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려요..행복한 휴일 보내세요..

감사해요. 예쁜 식물들 보러 가겠습니다.

읽고 보니..
저 가스라이팅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다.
뭐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괜히 또 열 받네요.ㅋㅋㅋ

ㅎㅎ맞아요 원작에선 남편이 범인이지만 신체적으로 약자인 여성도 굉장히 잘할 수 있는게 가스라이팅이죠!

가스라이팅이 뭔가 했었는데 이런 영화들이 있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넵.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글 너무 좋네요! 저랑 취향이 많이 겹치는 분 같아요 관심있게 글 지켜볼게요

ㅎㅎ그런가요? 감사!

김작가님이 언급하셔서 검색해서 읽어보았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병들게 하다니 정말 끔찍하네요. 가스라이팅은 아니었지만 왜 기억을 못하냐고 다그치고 몰아부치던 일이 생각나면서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집니다 ㅜㅜ 글 정말 감사합니다.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가입인사 빼고 제 첫 글이네요. 김작가님이 언급하신건 못 봤네요! 자세힌 알 수 없지만 사실 거의 누구나 누군가에게 그래본 경험이 있을거에요. 적어도 상황 날조는 아니고 걱정이 토대가 되었을테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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