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슈퍼스타라면 - 영화 <서칭포슈가맨> 리뷰

in #kr5 years ago

연말이라서 음악 영화가 생각나네요. 문득 <비긴어게인>을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그런데 비긴어게인이 아니라 다른 음악영화인 <서칭포슈가맨>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합니다. 이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알려진 대단한 위인보다 평범하게 산 듯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괜찮은 영향을 줬던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가 자기도 모르는 곳에서 슈퍼스타였고, 그걸 알고서 방문해 슈퍼스타 대접을 받다가 돌아와 다시 평범하게 살아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칭 포 슈가맨은 실화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평생 공사장의 인부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었는데요. 바로 '음악'입니다. 그는 고된 일을 마치면 노곤한 몸을 이끌고 '하수구(The sewer)'란 이름의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1960,70년대 멕시코 이민자 2세로 미국의 자동차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 살았던 그는 사회성이 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런 가사를 말이죠.

'이 도시의 시장은 범죄율을 숨기고, 정치인들은 권력을 남용하지. 그들은 세상이 안전하다고 거짓말하지만, 마피아들은 저 강의 오염처럼 점점 커지고 있어. 대중들은 분노하지만, 정작 투표일은 잊어버려. 넌 내게 말하지. 그게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 체제는 곧 무너져. 젊은이들의 노래로.' - The Establishment Blues 가사

이 가수는 실존인물인 식스토 로드리게즈(Sixto Rodriguez)입니다. 멕시코 이민가정의 6남매 중 6째라서 이름이 식스토(Sixto)였는데요. 우리말로 바꾸면 '여섯째'가 이름인 셈이죠. 로드리게즈는 술집에서 노래를 하다가 클라렌스 아반트(Clarens Avant)라는 서섹스 레코드(Succex Recod)의 소유주에게 눈에 띕니다.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과 작업을 한 유명 음반제작자인 그는 로드리게즈의 첫 음반을 함께 작업했죠. 결국 1970년 '냉엄한 사실(Cold Fact)'이란 이름으로 발매된 이 음반은 식스토 로드리게즈가 전곡을 작곡, 작사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말 그대로 냉엄했습니다. 노래는 훌륭했지만, 로드리게즈에겐 쇼맨십이 없었죠. 그는 공연을 하면서 청중들을 쳐다보기가 어색해 뒤를 보며 노래를 하기도 했습니다. 히스패닉계 이름인 '로드리게즈'라는 이름도 외면을 받는 데 한몫을 했죠. 존 레논, 밥 딜런, 사이먼 앤 가펑클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의 이름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심한 편이었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을 당한 시기가 불과 음반이 발매되기 2년 전입니다.

그래도 재능을 인정받은 로드리게즈는 이듬해인 1971년 '현실에서 오다(Coming from reality)'라는 이름의 2집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이 음반에 실린 '이유(Cause)'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크리스마스 2주 전에 난 실직했어. 난 하수구에 빠진 상태로 신께 신세타령을 했지. 그러자 교황은 그게 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샴페인과 같은 비가 쏟아지네.'


전주 부분이 약간 김민기씨 노래들과 비슷합니다. 이 노래는 거짓말처럼 현실이 됐습니다. 로드리게즈는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두고 소속사에게서 계약 해지를 통보 받죠. 그 통보와 함께 그의 음악인생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평생 공사장의 인부로 살아갔고, 그가 노래했던 술집의 이름처럼 하수구를 청소하고 폐가를 철거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품위있게 살았습니다. 자신이 몸으로 겪은 빈곤과 차별 등을 개선하기 위해 정치 집회에 참석해 목소리를 보탰고, 어려운 사람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했죠. 세상을 조금씩 바꾸기 위해 시의회 선거에도 여러차례 출마했지만, 낙선을 거듭했습니다. 그래도 세 딸들에겐 꿈을 심어줬습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등을 데리고 다니며 가난하지만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50대 중반이 훌쩍 넘은 그에게 거짓말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바로 그가 미국에선 30년 전의 음반 2장을 낸 무명가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강압적인 정치권력에 맞선 민중들에게 정신적 안식처였고 그 국가에선 비틀즈나 마이클잭슨과 맞먹는 슈퍼스타였다는 것이죠. 본인도 믿기 힘든 사실이었죠. 그는 1998년 남아공에 방문하고서 나온 신문기사의 제목처럼 'American Zero, But South African Hero(미국에선 별볼일 없지만, 남아공에선 영웅)'이었습니다.

발단은 이랬습니다. 1970년대 어떤 경로로 그의 음반 한장이 남아공에 들어오자 노래가 좋다는 입소문이 퍼졌고, 불법복제를 통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석호필 열풍과 비슷하네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하던 남아공 정부는 그의 노래를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했죠. 남아공 국가기록물 보관소에 가면 그의 LP 음반에서 문제가 되는 노래가 방송을 탈 수 없도록 고의로 훼손한 흔적이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70, 80년대 '판매금지'인 셈이죠. 그럼에도 그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더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당시 남아공 정부는 '아파르트헤이드(apartheid)'라는 유명한 인종차별 정책을 통해 서로 다른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했고, 유색인종들의 거주지를 특정 지역으로 제한했으며 공공시설물을 인종간 분리해 이용토록 했죠. 이에 대해 유엔(UN)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비판하자, 남아공 정부는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며 맞섰고, 내부의 반대 목소리를 폭력으로 탄압했죠. 남아공 정부는 외국 가수들이 방문공연도 금지했고, 이런 상황에서 남아공 사람들은 점점 더 로드리게즈의 노래에 빠져들었습니다. 그가 노래하는 사회의 냉엄한 현실들, 그리고 자유의 정신에 매료됐죠. 그의 노래는 남아공의 '아침이슬'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남아공에도 민주화가 되자 사람들은 로드리게즈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부터 궁금해했지만, 바깥 세상과 단절된 남아공 사람들은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없었죠. 공연 중에 무대에서 자살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있었구요. 남아공 사람들은 조금씩 그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고, 이 영화는 그의 흔적을 찾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장면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그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남아공에서 슈퍼스타였다는 것을 알고 1998년 그 국가를 방문합니다. 거기서 그는 공연을 했고, 공연장에는 사람들이 3만석을 가득 메웠죠. 당시 그는 57살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남아공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공연을 하러 다녔고 텔레비전과 신문에 수차례 등장합니다. 그런 일정을 소화한 후 그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갑니다. 다시 몸 쓰는 일을 하죠.

다시 그가 조명을 받은 계기는 이 영화입니다. 스웨덴의 한 신예 영화감독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눈여겨 보면서 시작되죠. 이 영화를 만든 말릭 벤젤룰 감독은 2006년 남아공을 방문해 로드리게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2008년부터 4년 동안 작업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감독은 남아공에서 로드리게즈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바로 영화화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한편으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감독의 걱정은 바로 '스토리가 너무 멋진데 노래가 그만큼 안 좋으면 어쩌지'였다네요. 하지만 감독의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괜찮았죠. 결국 로드리게즈의 삶과 음악을 다룬 영화는 미국의 최고 예술영화 축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중음악계는 잊혀졌던 그의 음반을 재발매했고, 주류 언론도 그의 삶을 재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여러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비슷한 사례가 꽤 있습니다. 그 중의 한명이 故 유재하씨입니다. 1987년 불과 26살의 나이에, 그것도 1집 음반을 내고 2달 만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故 유재하씨는 겨우 8곡의 노래를 세상에 남겼지만, 한국 대중음악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곡한곡이 너무 주옥같은 노래들이죠. 본인은 살아 생전에 주목 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그의 이름을 딴 음악경연대회가 만들어졌습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통해 데뷔한 뮤지션들만해도 조규찬, 유희열, 루시드폴, 심현보, 방시혁(방탄소년단을 만든 그), 김연우(본명인 김학철로 나왔었음), 정지찬과 나원주, 스윗소로우, 오지은, 정준일, 노리플라이 등이 있습니다. 유재하씨 말고도 가수 중에는 故 김광석씨도 로드리게즈와 맞먹는 인생역정이 있죠.

대중음악계가 아닌 곳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많습니다. 살아생전은 물론 죽어서도 유명하지 않았지만, 단 한권의 책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이 된 전태일과 전태일 평전의 익명 저자로 살다가 본인도 죽고 나서 실명이 드러난 조영래 변호사도 비슷한 사례입니다. 일제시대 조선의 혁명을 꿈꾸며 실천하는 지식인이었지만,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던 김산 역시 사후에 미국 작가인 님웨일즈에 의해 조명되고, 님웨일즈가 쓴 책 <아리랑>은 미국과 일본을 통해 나중에야 국내에서 번역돼 읽히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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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고마워요 브리님!

Nice read. I leave an upvote for this article thumb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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