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THE DAY 18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어느새 넬사는 옷을 완전히 바꿔 입고 가발까지 쓴 채 화장실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분장을 다 한 것인지 넬사는 30대 초반의 여자로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자들을 유심히 살피던 정보요원들도 넬사가 변장한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소매치기다!”

그때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고, 여자의 핸드백을 든 남자 하나가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었다. 정보요원들이 잠깐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사이, 넬사는 살며시 다가와 자연스럽게 자신의 팔짱을 끼는 중년의 남자와 자연스럽게 동행이 되어 걸었다.

지켜보던 정보요원을 감쪽같이 따돌린 넬사와 사내는 재빠르게 공항출입구를 빠져나와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내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넬사는 사내의 팔에 거의 매달려가는 꼴이었다.

때마침 천천히 움직이는 차 한 대가 넬사 앞에 멈추어 섰다. 흰색의 레저용 승합차였다.

“이 차를 타세요.”

동행한 사내는 넬사에게 그렇게 말한 뒤, 슬금슬금 넬사로부터 멀어졌다. 사내는 승합차를 뒤 따라오던 검정색 승용차에 잽싸게 올라타고 멍하니 서 있는 넬사를 지나쳐 빠르게 사라졌다.

넬사는 자기 앞에 멈춰 선 차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창문이 짙게 선팅이 되어 있어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창문이 조금 내려오며 차에 앉아 있는 아버지 윤재룡 박사의 모습이 보였다.

“넬사야! 아빠다. 어서 타라!”

안에서 윤재룡 박사가 다급한 손짓으로 넬사를 재촉했다. 안에서 뒷문이 열리자, 넬사는 반갑게 차에 올라탔고, 넬사를 태운 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뒷좌석에 앉은 윤재룡과 넬사 부녀는 오랜만에 만나 짙은 감회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손을 맞잡은 부녀는 반가움에 연신 웃었다.

“내 딸 넬사! 정말 많이 컸구나. 중학교 때 너를 마지막으로 보고, 오늘이 처음이구나!”

“어쩜 아빤 그대로세요.”

“아니다. 나도 이제 많이 늙었다. 우리 넬사는 정말 예쁘게 컸구나. 너무 보고 싶었다.”

“저도요. 아빠!”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 너를 찾게 돼서 정말 미안하구나. 때때로 인연이란 기쁨에 상응하는 슬픔도 따르는 법이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다. 사람의 삶엔 슬픔과 기쁨이 늘 함께 공존한다는 뜻이야. 어쨌든 우리 넬사를 다시 보게 되니 정말 좋구나.”

“아빠! 저도 기뻐요. 그동안 아빠가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원망도 다 잊어버렸어요.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셨고,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에요?”

“넬사! 아버지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제가 다 말해 드리지요.”

조수석에 앉은 청년이 불쑥 부녀간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청년은 전방을 주시한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다.

“그런데 누구?”

넬사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의 뒤통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아버지 윤재룡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짧게 깍은 뒷머리가 지나치게 가지런한데다가 그에게서 지금껏 맡아보지 못한 묘한 향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호기심을 일으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청년은 관찰하듯 넬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청년의 눈은 넬사의 눈에 깊이 고정되었다. 그는 토종 한국인이 아니었다. 동남아 계통의 사람 같기도 했고, 어쩌면 혼혈인 것도 같았다.

백옥 같이 하얀 얼굴과 깊은 눈매, 미소를 짓는 듯 부드러운 입술의 청년을 본 넬사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태어나서 이런 달콤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넬사는 이 사람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의 캐릭터를 쏙 빼닮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티베트에서 온 파스파라고 한다. 파스파 윤. 바로 넬사, 너의 또 다른 분신이다. 너와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나의 아들이고, 너의 오빠이자 남동생인...”

윤재룡 박사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넬사에게 그렇게 파스파를 소개했다.

“네에? 아빠! 지금 뭐라고 하셨죠? 저 사람과 제가 한 날 한 시에 태어났다고요? 아버지의 아들이고, 오빠이자 남동생? 그럼 우리가 쌍둥이란 말인가요?”

넬사가 깜짝 놀라서 윤재룡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복잡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아버지의 말은 또 다른 충격으로 넬사에게 다가왔다. 넬사는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너무 놀라지 말거라. 나도 놀랐는데, 너라고 안 놀라고 배기겠니? 파스파가 나중에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줄 것이다.”

윤재룡은 그렇게 말하며, 넬사의 이마에 지그시 입을 맞추었다. 십 년 만에 딸에게 하는 아버지의 살가운 애정표시였다.

“아버지!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누가 우리 뒤를 미행하고 있거든요.”

파스파가 고개를 뒤로 돌리지도 않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 채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미행?”

윤재룡 박사가 고개를 뒤로 돌리고 뒷유리를 통해 후방을 살폈다. 하지만 유리는 짙게 선팅이 되어 있어 밖을 자세히 내다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모르는 척 하세요. 제가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발생시켜서 교통을 마비시켜 보겠습니다.”

“파스파! 여행하느라 많이 피곤할 텐데, 지금 할 수 있겠어?”

윤재룡은 파스파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어 파스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파스파의 얼굴은 석고상보다 더 하얗고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그 얼굴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맑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미행은 또 뭔가요?”

넬사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아빠 윤재룡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로서는 아무 생각 없이 아빠를 마중 나왔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려 버렸던 것이다.

친구 설란으로부터 갑자기 아빠가 귀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장실에서 만난 어떤 여자한테 느닷없이 변장까지 당하고 아빠를 만났는데, 이렇게 누군가에 쫓기기까지 하니,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얘야! 조금만 참아라. 여기를 벗어나서 안전한 곳으로 가면 다 이야기해주마.”

윤재룡은 그렇게 말하며 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으으으... 하아아아아!!!”

느닷없이 튀어나온 기합소리에 놀라 윤재룡과 넬사가 대화를 멈추고 파스파 쪽을 바라보니, 기묘한 괴성과 함께 그의 얼굴과 머리에서 가시처럼 날카롭고 밝은 빛이 길게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삽시간에 차 안에 가득 차 버렸고, 갑자기 강렬한 섬광을 터뜨리며 눈앞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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