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랑새 16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2 years ago

만약 빛과 그늘이 있다면 어디에 설 거냐고 물으면 다들 빛 쪽으로 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혼자 꿋꿋하게 그늘에 있는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너무 좋았는데, 이미 난 그 아이의 형과 사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형이 물불 안 가리는 대단한 야심가여서 나보다 더 좋은 집안의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나를 패대기치듯 버려버렸다.

“지혜 씨! 만약 집에서 나가면 나, 글 안 쓸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냥 우리 집에 있어주면 안 돼?”

그런 나를 늘 그늘 속에 있던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가 눈물로 받아주었다. 너무 말라서 자는 게 죽은 것처럼 보였던 그 아이는 소설을 쓰고 있었고, 나는 그 아이보다 그 아이가 쓴 이야기에 더 매료되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소설에 넣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너무 좋았다.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것을 살아 있는 언어로 재탄생시키고 수려한 문장으로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 신기함을 못 이겨 그 아이의 방을 수시로 찾곤 했다.

그런데 늘 그림자처럼 어둠속에서 살았던 한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미림이라는 여자아이 때문에 울었는데, 그 울음이 내 울음보다 시려서 나는 무조건 그 아이의 편이 되기로 했다. 그 울음의 진폭이 어찌나 크고 넓던지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아이의 울음이 세상을 다 잃은 남자의 절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그를 생각하면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독서량으로 만들어진 그의 세상에선 그가 유일한 왕이자 백성이었기다. 하지만 빛의 세상으로 나와서 한없이 어리둥절할 때 그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 바로 미림이었기에 미림이 그에겐 처음이자 모든 것이었다.

어둡고 음습한 세상에서 그가 최초로 느낀 빛이 미림이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살짝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그가 그만의 세상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었기에 내가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그 대신에 그의 소설을 한 대목을 이렇게 내가 이을 수 있는 것이다.

느닷없는 이야기지만 경민 씨의 소설에 왜 내가 불쑥 끼어들어 소설을 연장시키고 있느냐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그가 내게 슬며시 펜을 쥐어준 건 그가 쓰지 못할 이야기를 나에게 쓰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그의 형이 자신을 정계로 이끌 실력 있는 집안의 여자와 만나면서 나는 작은 방을 얻어 그의 집을 나가려고 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나를 딸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시던 아버님이 아들이 바람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쓰러지셨고, 어머니마저 병간호를 하시다 지쳐 누우셨다.

마음은 이미 떠났고, 또 떠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떠날 수가 없었다. 그 분들을 너무 좋아했지만, 그렇다가 내가 이 집을 떠나지 못할 까닭은 없었다. 하지만 내 발목을 단단하게 붙드는 무언가가 있어 돌아보니, 경민 씨가 숨죽여 우는 소리가 단단한 빗장이 되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방에서 숨죽여 울고 있었는데,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 귀에 그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있었다.

그의 누나에게 짝사랑하던 역마살을 뺏긴 미림이 그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유학을 핑계로 파리로 떠나버렸던 것이고, 나도 떠날 요량이었다.

그는 그 시점에 첫 장편소설을 출간했고, 문단의 호평을 얻어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여러 출판사로부터 출판의뢰가 빗발쳤고, 라디오와 TV 고양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그는 정점을 치닫고 있었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지혜 씨가 다 맡아주셔야 해요.”

갑자기 자신의 통장을 내게 맡기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정도로 한가한 시간이 없었다. 번갈아 가면서 앓아눕는 두 노인네를 돌보느라, 나 또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 몰랐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그의 형은 한 번도 집을 들리지 않았다. 인편을 통해 과일이나 고기들을 보내주긴 했었다. 내게 미안하다는 말이나 집을 나가라는 따위의 말조차도 전해주지 않았지만, 결코 슬프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의 방을 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고, 그의 방에 있는 책들이나 그가 쓰고 있는 소설들을 내가 제일 먼저 읽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의 형이자 나의 첫사랑의 존재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이미 형수와 시동생이 아닌, 우리 두 사람이 마치 연인처럼 술 한 병을 앞에 놓고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너무 좋았고 마냥 행복했다.

그런 그가 지금 내 무릎을 베고 말한다.

‘난 지혜의 무너진 어깨를 보는 순간, 내가 미림이 아닌 지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미림에게 느꼈던 것은 그냥 단순한 욕정이었던 걸까? 그렇게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가지기 힘들 걸 갖고 싶어서 떼를 쓰고 안달을 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기 이전에 운명처럼 다가와 있는 거라, 다들 선물이라고 말을 하는 거더라. 아마 지혜가 형 때문에 집을 나가려고 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혜를 붙잡고 늘어졌을 거야.’

그도 나도 술을 잘 못하지만, 그의 방에서 한 병의 술과 술잔을 놓고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너무 좋았고, 나도 모르게 그가 소년이 아닌 한 사람의 남자로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그를 키운 것도 아닌데, 누나나 엄마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의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아이처럼 내 가슴을 만지며 또 말한다. 그는 우리 아들 청조보다 더 내 젖가슴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내 아이다.

“그게 사랑인 거야. 나도 지혜도 오랜 시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거지. 한때는 형수가 될 뻔 한 여자와 시동생이 될 뻔 한 남자가 만나서 사랑한다고, 그걸 불륜이라고 떠벌일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불륜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남들 눈치보고 살지는 않을 거야! 그것으로 된 거야. 세상의 비난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