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별을 쫓는 해바라기 8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강 형사가 뻔질나게 내가 하고 있는 주점에 드나들면서, 그 동안의 형의 행적이나 재우의 가려진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한 권의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강 형사의 입을 통해 형의 지난 세월을 다 엿볼 수 있었다.

"윤도와 재우는 산사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거야. 세상 전반의 이야기들을. 두 사람은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는 공통점이 있었지. 물론 서로의 시각 차이는 있었겠지만, 재우의 확고한 사상체계는 윤도에겐 선망의 대상으로 느껴졌겠고, 거의 일방적인 학습에 의해서 윤도는 변화되고, 세뇌되어 갔다고 봐야겠지. 정확하게 말하면 세뇌교육으로 여과되지 않고 윤도의 머릿속으로 그냥 흘러 들어간 거야.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을 거야."

나는 재우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창백한 낯빛에 지독한 근시, 촌스럽게 보이는 두터운 안경,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얼굴과 비쩍 마른 몸, 재우는 그처럼 얼핏 보기에 나약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겉모습 뒤에는 냉혹한 비판정신과 굽힐 줄 모르는 투쟁심, 탁월한 설득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이론가의 모습이 숨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남기와 나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재수하느라 손해 본 일 년의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미팅이라는 미팅은 전부 쫓아다녔고, 남의 학교축제, 특히 여자대학교의 축제는 모두 참석하였다. 그렇게 미친놈들처럼 술과 여자, 영화, 음악, 춤으로 한 학기를 다 마쳐가던 중, 남기가 이끄는 대로 어떤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언더서클, 즉 운동권의 한 모임이었다. 거기서 나는 처음 재우를 보았었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지만, 재우는 일찌감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사회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재우는 당시 구속된 회장을 대행하고 있는 실질적인 그 모임의 리더였다.

나와 남기는 몇 달 간의 들뜨고 허황된 생활을 정리하고, 재우가 지정해 주는 책을 밤을 새워 읽었고, 만나기만 하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토론에 빠져들었다. 독서, 토론, 비판. 나와 남기는 그 속에서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

그 당시에 재우는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친구였고, 영원히 같은 길을 가게 될 동료로 여겨졌다.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고, 보고 싶고 궁금해지던 그런 사이였다.

하지만 나와 재우 사이에 단절이라는 금을 그어놓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던 이론의 분열로부터였다.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격렬해지면서 경찰의 시위진압 방법도 강압적이고 잔혹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운동권의 분열이 일어났고, 재우와 나 사이도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전경들의 무자비한 진압방법에 맞서 무장을 해야 한다는 재우의 생각과 그렇다고 같이 폭력적으로 맞선다면 대중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고, 결국에는 여론에 밀려 오히려 세가 위축되고 말 거라는 나의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서클 동료들 사이에서도 서로간의 의견이 대립되었고, 모임 그 자체마저 유산될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

허약한 겉모습의 재우가 강경대응을 표방하고 나섰을 때만 해도, 동료들은 우선 방관자적인 태도였다. 오히려 검도 유단자인 내가 강경대응을 주장하고 나서리라고 생각했던 동료들은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서 있으니, 다소 어리둥절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의 대립으로 모임이 분열될 우려가 증대되어 감에 따라 이론과 설득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재우가 점점 그 지지를 높여갔고, 나는 상대적으로 심한 무력감과 회의를 느껴갔다.

우리끼리도 사분오열되어 통합적이고 집중된 행동을 할 수 없는데 무슨 재주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짙은 회의가 밀려들었다. 나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빈둥거리다가 휴학계를 내고 시골집으로 내려갔고, 곧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재우는 윤도와 헤어지면서 윤도를 노법사에게 연결시켜 주었다는군. 철저하게 익명으로 숨겨진 재야의 이론 선동가인 노법사와 윤도가 서로 의기투합했는지도 모르고, 윤도가 자진해서 그의 밑으로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서로 연계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인 것 같아. 이것은 단순한 살인사건의 차원이 아니야. 잘못하면 여러 명 죽어날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도 충분히 있어."

강 형사는 다분히 위험한 언동을 했다. 그쪽 사람들 중의 누군가의 귀에 그 같은 발언이 알려진다면 사상이 불순하다고 의심을 받거나 호되게 질책을 당할 그런 언행이었다.

"형이 왜 그런 일에 끼어드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군요. 어쩐지 형답지 않은 짓이고요."

"누가 알겠나? 윤도도 아직 피가 뜨거운 젊은이고, 아니면 재우나 노법사가 그것을 사주하고 있는지도..."

"노법사라는 사람은 아직 정확하게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요?"

"진짜 홍길동이 같은 자야. 본명도 나이도 알려지지 않고 있어. 홍길동이라면 얼굴이나 알 수가 있지만, 이 자는 도통 얼굴을 내밀지 않는단 말이야. 여기저기 잡지에 글을 투고하고 책을 내는 외에는 전혀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거든.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어. 책을 낸 출판사나 잡지사 관계자들마저도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니까, 말 다 했지."

내는 내가 왜 이렇게 형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껏 부단히 형과의 인연을 끊기 위해 노력해 왔고, 이제는 정말 형을 잊고 살 수가 있을 것 같은데, 강 형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강 형사가 나타나기 며칠 전에 사라졌던 난숙이 돌아오면서 형과 이상하게 엮이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형 문제만 해도 처음에는 단순한 살인사건이더니, 다시 사회문제와 정치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형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몇 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변화했다는 말인가? 이상한 사이비 종교의 교주라는 직함은 또 무엇인가?

"도대체 형이 교주로 있는 그 해바라기라는 곳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나는 전부터 묻고 싶었지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묻지 않았던 것을 결국 강 형사에게 묻고 말았다.

"그렇게 물으니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막연하지만, 해바라기라는 말이 우주를 뜻한다며? 즉, 우주가 바로 신이다. 범신론이라고 한다던가? 그 스피노자인가 뭔가 하는 사람 있잖아?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는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의 철학을 따른다고 하던데. 하여튼 좀 복잡해."

강 형사는 자신의 지식이 그것 밖에 안 되는 것이 억울하다는 듯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해바라기. 우주. 범신론. 형은 언제 이런 것을 다 학습했다는 말인가? 그 짧은 기간, 형이 이런 이론적 체계를 모두 갖추기는 무리였다. 누군가 이론적인 체계가 선 사람이 제대로 학습시켜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독학으로 깨우쳐 내기에는 힘겨울 것이다.

노법사, 그가?

"이거라도 읽어 보게. 나는 읽고 나니, 머리가 더 복잡해지더군. 뭐가 그리 복잡한지..."

강 형사가 소책자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시중에 나도는 종교 홍보물처럼 우주를 조잡스럽게 묘사한 겉표지에 '해바라기'라는 명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나는 그만 가 봐야지. 내가 이렇게 나서는 이유를 자네는 모르겠지? 자네 형만큼은 자네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아서야."

강 형사가 나간 뒤에, 나는 책자를 펼쳐 들었다.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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