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38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수란은 그날 내내 잠만 잤다. 잠이 회복에 특효약인 것처럼. 나와 재호와 자혜는 해가 지도록 산자락 밑 계곡에 앉아 흐르는 계곡 물에 돌멩이를 던지며 구름이 계곡을 타고 오르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했다. 먼저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묵계인 양, 우리들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각자 자신들의 생각에 깊이 잠겨 땅거미가 질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분명 세 사람이 앉아 있고, 세 사람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우울과 절망과 이별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두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세 사람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 세 사람은 어쩔 수 없는 타인이었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중심이 된 고뇌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도피라는 명제를 끌어안고 있다면, 자혜는 사랑이라는 환상을 끌어안고 있고, 재호는 생존이라는 화두를 쥐고 있었다. 모두 자기의 것이 제일 고통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고통을 통해 남의 고통을 간접 체험할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영원한 타인인 것이다.

그런 타인들이 개울물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가상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 공감대 위로 끝내 올 것 같지 않던 밤이 찾아오자, 세 사람의 타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동시에 그 공감대를 허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로 돌아갔다. 절은 결코 가상의 공감대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제 각자의 길을 갈 시간인 것이다.

수란은 자혜의 블라우스와 치마를 걸치고 재호의 파카까지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란은 엷게 화장까지 해서 조금 전의 수척한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은 마치 철지나 피어난 한 송이 들국화처럼 아름다웠다.

자혜는 자기가 걸고 있는 목걸이를 풀어 내 목에 걸어주었다. 그 목걸이는 금으로 만든 것으로 잔잔한 물결 위에 한 마리 인어가 헤엄치는 모습이 새겨진 것이었다. 자혜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으로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다. 나는 자혜의 손에 내가 아끼던 라이터를 쥐어주었다.

재호와 자혜에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수란에게 이끌려 산을 내려왔다.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내려 다시 전철로 갈아탔다. 전철은 창자 속 같은 땅 속을 덜컥대며 달렸고, 전철이 덜컥거릴 때마다 영혼의 꺼풀이 하나둘씩 벗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신문을 한 부 사서 수란과 같이 읽었다. 이미 CIA요원인 마이클 로빈 테러사건은 신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지나치게 사회여론화 되는 것을 막으려고 정부에서 언론 통제를 가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철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산자락 근처까지 왔다. 거기서부터 산등성이까지는 걸어 올라야 했다. 거기에 분국으로 사용하는 별장이 있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플래시를 비추며 쉽게 올라갈 수 있었는데, 건전지가 떨어졌는지 플래시가 꺼지고 나니 그야말로 야간 산악 행군이었다. 달도 뜨지 않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우리는 더듬거리며 걸어 올랐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무턱대고 올라가기만 했다. 커다란 바윗돌을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묵묵히 등정을 계속했다. 구르는 돌에 미끄러지고 삐죽이 솟아 나온 돌부리에 채이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며 산을 헤맸다.

수란은 다리에 힘이 없는지 자꾸만 넘어졌고, 나도 덩달아 수란의 손을 쥐고 뒹굴어야 했다.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는지 확신도 없었다. 우리는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렸다. 결국 수란은 기진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못 걷겠어요. 여기서 죽고 싶어요. 차라리 저를 총으로 쏘아주세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아직 같은 포승에 묶여 있는 죄수였고, 나로서는 단 한 사람의 동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배낭은 앞쪽으로 메고 수란을 등에 없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등이 무척 넓어요…….”

수란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더니, 내 등에 머리를 묻었다. 완전히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수란을 업고 산길을 더듬더듬 올라갔다. 산을 오르며 언젠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이어 머릿속에 잊고 있었던 한 가지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렸다.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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