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28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바람은 계곡 아래로부터 불어왔다. 앞서가는 두 여자의 치맛자락은 춤추듯 하늘거렸고, 긴 머리카락이 가는 잎사귀처럼 바람에 흩날렸다.

새가 울었다. 형체도 없는 새가 목소리만 남은 채 운다는 전설처럼 날카로운 새 울음만 적막한 산을 타고 들려왔다.

우리들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소정은 추운지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내 웃옷을 벗어 소정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소정이 자혜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이거 내가 걸쳐도 될까……. 이 옷 때문에 자혜와 한바탕 하는 거 아녜요?“

소정이 나를 쳐다보며 캥거루가 권투하는 듯 한 흉내를 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씩 웃었다.

"얘, 말도 마. 이 사람하고는 싸움도 못해. 내가 싸움을 걸려고 하면 저렇게 바보처럼 웃어버리거든. 그러면 나는 그만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아. 정말 맥 빠진다니까."

자혜도 지지 않을 새라 한 마디 했다.

"꼭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같네.“

소정이 준비해 온 과자를 집어먹으며 깔깔댔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적막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계곡 위로 산산이 흩어졌다.

"맞는 말이야. 꼭 바보 온달 같다니까.“

자혜는 내 쪽으로 곱게 눈을 흘기며 소정의 말을 받았다. 자혜는 묘하게 눈을 흘기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 흘기는 각양각색의 모양을 보노라면, 아마 자혜는 눈 연기 하나만으로도 CF모델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보 온달이 아니고, 평강 공주에 대한 거야. 바보 온달은 착하고 좋은데, 평강 공주는 독종이라는 거지.“

소정이 능청스럽게 빗대며 자혜를 놀렸다.

"뭐야? 그럼 나보고 독하다는 얘기 아냐? 요 계집애가?“

자혜는 장난삼아 소정을 때리려는 시늉을 했고, 소정은 내 어깨를 잡으며 내 뒤로 숨었다.

나는 자혜와 소정의 아이 같은 행동을 보며 웃기만 했다.

산에서는 금방 어둠이 깃들었다. 대충 쓰레기들을 치우고 나니, 어둠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우리는 계곡을 내려와 가로수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로 돌아왔다. 차를 주차하고 그녀들 학교 근처의 학사주점으로 들어갔다. 자혜가 갑자기 파전이 먹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두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나는 늘 이런 분위기를 갈망해 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은은하지만 아늑한 분위기에 젖어 담소와 술이 있고, 따스한 인간의 정이 흐르는 그런 생활을 꿈꾸어 왔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볼 때, 그런 날들이 몇 날쯤 될까 생각하니, 깊은 수렁 속을 정신없이 헤매는 느낌이 들었다.

형은 지독한 노력파였다. 자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거실에 나왔다가 형의 방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면, 형은 언제나 붙박이 인형처럼 스탠드를 켠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형은 의자에 따스한 체온을 남겨놓은 채 학원으로 가고 없었다. 학원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도서관으로, 도서관에서 형의 커다란 책상으로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 같은 생활을 꾸준히 해내는 성실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도 얼굴을 볼 수 없을 만큼 사업에 바쁘셨고, 어머니 또한 여러 모임에 나가느라 분주하셨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형은 오직 자기 공부에 빠져 하나뿐인 동생과 얘기 한마디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그저 남들 보란 듯이 도복을 어깨에 걸치고 도장을 찾는 것이 강재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자신이 다소 과격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같이 대련하던 녀석의 이빨을 부러뜨려놓는다든지 심하게 관절을 꺾어놓기 일쑤였고, 그런 일련의 사건으로 사범님께 엄한 기합을 받기도 했지만, 도장은 빼먹지 않고 열심히 드나들었다. 때때로 시시껄렁한 녀석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애꿎은 애들을 때려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먼저 싸움을 걸거나 쓸 데 없이 힘을 과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집에 들어오면 얌전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형이 만들어놓은 조용하고도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덕에 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하지만 가끔씩 놀러가 본 친구들의 집에서 느낀 왁자지껄하면서도 가족적이고 사람 사는 것 같은 포근함은 어린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았다.

두 여자의 재잘거리는 입술과 깔깔대는 웃음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그녀들은 모를 것이다.

"웃지만 말고 뭐든지 얘기 좀 해봐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무뚝뚝해요?“

소정이 나를 흘겨보며 말한다. 여자의 눈빛은 강렬하다. 특히 여자가 무언가를 느끼거나 원할 때, 그 눈빛은 더욱 강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웃는 것이다. 바보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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