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 실패하다. 몸은 정직하다.

in #kr6 years ago (edited)

“지리산, 빈자리 있어요?” 망설이다, 금요일 저녁 7시가 넘어 산악회에 전화를 했다.
뒤쪽 딱 한자리 남았단다. 음, 그 자리는 의자가 뒤로 제껴지지 않아 불편한데..., 잠깐 망설이다, “갈께요”라고 말했다.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별로 챙길 건 없다.
생수 2개를 냉동고에 넣어 급속 냉동을 한다. 달걀 2개를 삶는다. 집에 굴러다니는 미니 초코렛 너댓개를 배낭에 넣는다.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 반팔 티셔츠, 수건을 하나씩 구겨 넣는다. 헨드랜턴과 손전등을 켜 본다. 작동한다. 여분의 배터리를 하나 챙겨 넣는다.

편의점에서 랏떼 커피 2개와 김밥집에서 김밥 2줄을 사, 충분히 얼지 않은 생수와 함께 비닐에 넣는다.
이 김밥은 내일 아침 식사다. 날이 더울 땐 김밥을 믿으면 안된다. 충분히 언 생수와 함께 비닐에 넣으면, 얼음이 된 생수가 냉장고 역할을 해 김밥을 오래 버티게 해준다.

장거리 등산은 대부분 금요일 밤에 출발한다. 토요일 새벽부터 하루종일 등산한 뒤,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일요일 하루 쉬고, 월요일 출근하기 위해서다.

밤 11쯤 산악회 버스를 탔다. 연휴 첫날이라 한밤중인데도, 차가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뒷자리 불편한 의자에서 어떻게든 새우잠을 청하는 나를 괴롭힌다. 멀미가 날 것 같다.

잠이 들 지 못한 채 슬슬 걱정이 된다. 장거리 등산을 안한 지 꽤 오래 된다. 올봄 주말마다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려, 등산을 거의 못했다. 몸이 준비가 안됐지만, 모처럼 미세먼지가 없는 주말이라, 언제 이런 날씨가 또 오겠나 싶어 무리하게 나섰다.
물론 마음 한켠엔 2년전 ‘전성기’ 때를 기억하면서, ‘그 때의 반만 돼도 될 거야’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있긴 했다.

밤 1시30분경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보통 이때 입맛은 없지만, 비빔밥 같은 것을 먹어둬야 한다. 잘 넘어가지 않지만, 된장국 같은 국물과 함께 대충, 꿀꺽 삼켜놓아야 한다. 배고픈 상태에서 등산을 시작하면, 초반에 퍼져버린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못먹겠다. 멀미를 좀 하는 것 같다. 찬바람만 잠깐 쐬고, 그냥 차에 탄다.

차는 계속 밀려, 성삼재에 내리니, 밤인지, 새벽인지, 3시22분이다. 평소보다 늦다. 보통 3시엔 내려 준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등산화 끈 매고, 헤드렌턴 켜고, 스틱을 편다. 그리고 사진을 한장 찍는다. 헐, 이 바쁜데, 사진이라니. 스티밋이 뭐라고,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 하지만 웃을 시간도 없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3시25분, 헤드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칠흙같은 지리산의 어두움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3년전 등산을 하기 전, 야간등반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미쳤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해보니, 좋아서 미치겠더라. 지리산이나 설약산에서 새벽 3시쯤 하늘을 봐라. 별 무리들이, 사진처럼, 시처럼, 영화처럼 내 머리위로 쏟아진다. 그 별빛에 얻어맞으면, 사람이 맛이 간다. 그 다음주 토요일 또 그 별빛을 보러 간다. 내 말이 진짠지, 아닌지, 직접 한번 가봐라.

노고단을 향해 불과 5분을 걸었는데, 허벅지가 땡긴다. 그동안 등산을 자주 안한 것이 티가 확 난다. 5분을 더 걷는 동안, 난 어디서 탈출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헐, 10분만에 탈출로를 떠올리다니.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던데...

골프를 처음 배울 때, 많이 듣던 이야기가 있다.
(골프연습을) 하루를 쉬면, 자기가 안다. 이틀을 쉬면, 캐디가 안다. 3일을 쉬면, 갤러리가 안다.
연습을 하루라도 게을리하면 실력이 눈에 띄게 준다는 뜻이다. 골프엔 소질도 없고(사실은 골프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재미가 없으니 연습장도 거의 안갔고, 갈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만년 백돌이였고, 별로 재미를 못느꼈다.

그런데 등산을 해보니, 저 말이 확 와닿는다. 몸은 매우 정직하다.
등산을 자주 하지 않으면, 머릿속은 다람쥐같은 내 모습이 떠오르지만, 실제 나의 몸은 펭귄이 된다.
지금 내가 그렇다. 그래도 관록으로 계속 걷는다. 2.7키로 거리의 노고단 산장에 도착하니, 3시55분. 30분 걸렸다. 예년과 다름없다. 그런데 숨이 약간 가파진다. 성삼재에서 겨우 노고단까지 걷고 호흡이 가파 지다니... 우선 바람을 피해 취사장으로 들어가 김밥 한줄을 먹는다.

5분 뒤 정확히 새벽 4시, 노고단을 떠나 지리산 주능선을 타기 시작한다. 천왕봉까지는 25.7키로.
그런데,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갑자기 헤드렌턴이 껴졌다 꺼졌다 한다. 접촉불량인가 보다. 김밥 먹을 때가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었는데. 난감하다. 우선 비상 손전등을 꺼낸다. 훨씬 밝지만, 매우 불편하다.
야간 산행엔 스틱이 발이요, 손이다. 양손에 손전등 대신 스틱을 들어야 한다. 바닥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스틱이 없으면, 부상을 입기 쉽다.

천천히 간다. 마침 뒤에 등산객이 몇 명 온다. 얼른 중간에 끼어 든다. 그들의 헤드렌턴 불빛에 의존해 걷는다. 다소 어둡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손전등 들지 않고 스틱을 사용하는 게 낫다.

그런데, 내가 그들을 따라 가지를 못한다. 이럴 수가. 불과 2년만에. 심지어 여자 등산객도 따라 가지 못한다. 켜졌다, 꺼졌다를 되풀이하는 헤드렌턴을 계속 만지며, 속도가 점점 늦어진다. 그러는 사이 임걸령 샘에 도착한다. 시원한 물 한모금 먹고 보니, 어스름 여명이 밝아온다. 많이 늦다. 이 정도 여명은 삼도봉에서 느껴야 하는데...이젠 헤드렌턴이 필요 없다. 열심히 걷는다. 삼도봉에 도착하니 날이 완전히 밝았다. 사진도 한 장 찍는다.

다시 부지런히 걸어 연하천에 도착했다. 시간이 7시30분이다. 지금까지 와 본 것 중 가장 늦은 시간이다. 보통 6시30분 전후에 도착했다. 지리산 산장 중 나는 연하천이 제일 좋다. 늘 신새벽에 도착하니, 사람도 거의 없고, 새소리만 나를 반겨 주었다. 상큼하고 이름도 예쁘다. 그런데 오늘은 거의 1시간을 늦은 것 같다. 이미 사람이 꽉 차 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남은 김밥 한줄을 더 먹는다.

컨디션이 좋을 땐, 연하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스피드를 내곤 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대략 2시간쯤 걸은 뒤 몸에 열이 살짝 올라, 이때부터 등력이 최고가 되고, 기분도 매우 좋게 된다. 마치 마약을 먹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몸에서 무슨 호르몬 같은 것이 나와 그렇다는데, 뭔진 모르겠고 하여튼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이때부터 한 2-3시간은 다람쥐처럼 몸이 가뿐해 진다. 지리산으로 치면, 연하천부터 대략 세석 부근까지 속도를 엄청 낸다. 이 구간이 등산하기도 가장 편한 구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몸이 가장 좋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영 기분이 오르질 않는다.

어쨌든 갈 때까지 가보자. 벽소령을 가니, 대피소가 공사중이다. 그대로 통과한다. 좀 더 가면 선비샘이 나올테니, 거기서 물 한모금하고 간식도 좀 먹을 참이다. 그런데, 선비샘까지 가지도 못하고 영신봉에서 주저앉아 간식과 물을 마신다. 확실히 몸 상태가 예년과 다르다. 좀 더 걸으니 선비샘이 나온다. 물을 받고, 다시 간식을 좀 더 먹는다.

세석평전을 지난다. 이곳은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곳인데, 아직 철쭉, 진달래가 피지 않았다. 5월말 정도는 돼야 할 것 같다. 지금은 별로 이쁘지 않다.
장터목에 도착하니 오후 1시10분이다. 정말 늦었다. 이 시간이면 천왕봉에 이미 올라서야 할 시간이다. 2-3년 전 보다 1시간30분은 늦었다.
시간이 애매하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1.7키로. 그런데 이 구간은 지리산 등반의 하이라이트답게 매우 가파르고, 힘들다. 성삼재부터 이미 26-7키로 정도 걸은 상태이기 때문에 상당히 지친 상태다. 그래서 거리는 짧지만, 1시간은 잡아야 한다.
지금 체력으로는 1시간 더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러면 중산리까지 내려가는데 3시간 정도 잡아야 하니까, 5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못타게 된다. 약 30분 정도 부족하다.

죽을 힘을 다한다면 5시까지 중산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긴 한 데.... 한 5분쯤 고민하다 깨끗이 포기한다. 물러서는 것도 용기라는,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를 내 멋대로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종주 등반을 중간에서 포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을 오르지 않고, 곧바로 중산리로 내려간다. 이 길은 처음이다. 그래도 좋다. 시원한 계곡을 끼고 가는 길이다. 중산리에 내려오니 정확히 오후 4시다.
새벽 3시25분부터 오후 4시까지 12시간 35분을 걸었다. 천왕봉을 거쳐 내려오면 대략 34-5키로 정도인데, 천왕봉을 거치지 않았으니, 대략 32키로 정도 걸은 것 같다.
오늘은 올들어 첫 장거리 산행이니, 이 정도로 만족하자. 천왕봉을 못올라 아쉽지만, 일단 몸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다음주 다시 오면 된다.

버스 시간까지 1시간이나 남았다. 샤워도 하고, 비빔밤도 먹는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배는 고픈데,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먹걸리도 마시질 못하겠다. 오후 5시 중산리를 출발해 집에 도착하니 대략 10시 정도 된 것 같다. 피곤하고 약간 실망스런 하루였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뱃살이 1센치 정도는 준 것 같다. 기분이 좋다. 어제 처가 어르신들 모시고 고기와 술을 상당히 먹었는데도, 등산을 하기 전보다 뱃살이 준게 확실하다. 이번 주말 재도전이다.


Sponsored ( Powered by dclick )
DCLICK: An Incentivized Ad platform by Proof of Click - 스팀 기반 애드센스를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스티미언 여러분. 오늘 여러분께 스팀 블록체인 기반 광고 플랫폼 DCLICK을 소개...

logo

이 글은 스팀 기반 광고 플랫폼
dclick 에 의해 작성 되었습니다.

Sort:  

5월 다시 파이팅해요!
호출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실패라지만 성공인데요?!

계획한 만큼 못간 게 처음입니다. 올봄엔 정말 휴일마다 미세먼지가 너무 심했어요.
장거리 등산을 못했어요. 등산하는 몸은 정말 정직합니다. 절대 속일 수가 없어요.
근데, 믿음대로 뱃살은 살짝 빠진 게 느껴집니다 ^^

산은 해뜨는 새벽이 진짜 볼만한 것 같아요. 봉우리에서 구름이 아래에 까려 있으면 구름위에 떠있는 기분이고요.
산 정상에서의 새벽공기는 도시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상쾌함까지...

아, 느낌 아시네, 방가방가 ^^

고생하셨습니다.

언제 트레킹 하신 것 한번 올려주세요.

저도 지리산 등산하고 싶어요.. 먼저 몸을 만들어야 되네요.. 준비가 안되면 같이 간 동료들에게 민폐가 되겠죠!

그렇죠. 몸이 안되면, 지리산 절대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금정산 종주부터 하시는 게 좋아요.

넵.. 저는 가까운 백양산하고 대동쪽에 있는 백두산부터 먼저 올라가야겠어요!

대단하십니다. 전 지리산 꿈도 안꿉니다.ㅎㅎ

한번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ㅎㅎㅎ 따라 갔다가 뱃살 빠지면 바지 흘러내리겠네요.ㅎㅎ

아 요즘 이동국 광고가
원래 출처가 따로 있었네요!!

시바견과 함께 라면, 반달곰인들 두렵겠습니까>

카일의 보팅이벤트 당첨~^^

감사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늘 지리산 종주해보는 게 꿈이었는데, 야간 산행이라... 호기심과 흥미에 한 글자 한 글자 세심히 읽어봤습니다. 렌턴때문에 고생 많으셨겠어요. 등산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갑니다.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네요. 등산 관련해서는 @good21 님께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해서 리스팀할게요~

으앗, 감사합니다. 도움이 된다면, 경험담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습니다.

뱃살은 줄였고
미쳤다고 했던 행동을 직접 몸을 통해서 미쳐도 좋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중간에 달성하지 못하였다고 해도
충분히 좋은 성과였지 않을까 갠적으로 사료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신도자님. 신도자님 글을 보면, 인생을 정말 너무 진지하게 사시는 것 같아요. 조금 쉬시면서 하셔도 될 것 같아요.

Coin Marketplace

STEEM 0.20
TRX 0.14
JST 0.029
BTC 67333.38
ETH 3247.21
USDT 1.00
SBD 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