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3

in #kr6 years ago (edited)

미팅.

가슴 들뜨게 하는 단어였다.

"그 때도 미팅이라고 했어요?"

내가 물었더니 무슨 조선 시대 때 얘기 하고 있는 줄 아나?
그는 매우 자존심 다친 얼굴로 실룩 미소지었다. 미안하게도.

아무튼 그럼에도 남녀가 유별하게 따로 학교가 나누어져 있던 때,
2차의 성징이 막 교복을 뚫고 튀어나올 듯 맹렬하였을 고2..

여학생들과 미팅이라니..
들뜨고 설레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헤쳐모여 구령이라도 떨어진 듯
각자의 집으로 달려간 문영길과 한철규와 개밥통은
또한 각자 최선을 다하여 멋을 부린 사복 차림으로 다시 모였는데..

1979년도의 멋이라..

여러분은 어떤 모습들을 상상하시는지?

우선 나에게 70년대는
베트남전쟁, 히피, 반전, 통기타, 청바지, 10월 유신, 등등의 키워드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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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청년들로선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이거 실화다.

<머리카락이 귀를 덮고 뒤 머리카락이 여자의 단발머리 보다 길어 불쾌감을 주는 경우>
길 가던 남자청년들은 붙잡혀 머리가 깎이거나 구류를 살거나 벌금을 물어야 했고

<무릎 위 15cm이상 올라간 치마(미니스커트)나 바지(핫팬츠)>를 입은 여자청년들 역시
구류를 살거나 벌금을 물어야 했다는..

그런 시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가에 대해선 약간의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청년들로부터 발화하여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던 68혁명..록앤롤의 탄생.. 등등에 자극받은
미국의 청년들은 마침 미국정부가 주도하던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통해
기성문화에 저항하는 청년문화를 폭발 시켰는데..

(히피문화라고도 불렸다. 1969년에 개봉한 <이지라이더Easy Rider>라는 영화를 보시면 이해에 도움된다)

이게 한국에까지 영향을 준다..

청년문화..

당시 유신헌법을 기반으로 독재체제의 공고화를 꿈꾸던 박정희 정권은 이걸 매우 불온하게 본 것.
장발과 미니스커트, 핫팬츠는 히피문화의 발현이고 저항정신을 전염 시키는 것. 이라고 보았다는 것.
심지어 밤 12시 이후엔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통행금지>도 있었다니..

아무튼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문영길을 비롯한 세 명의 고2는 당대의 스타일로 멋을 부렸다는데
애석하게도 문영길씨는 '나팔바지' 말고는 다른 디테일을 기억해내지 못 했다.

나팔바지. 일명 판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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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이런 느낌?)

10.jpg

(이런?)

어쨌거나..

여학생들을 만나기로 한 빵집 앞에서 조우한 세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고 부푼 심장을 더욱 부풀리며 빵집으로 들어갔는데..

그런데......

"그렇잖아. 생각해봐. 국부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니들하고 놀러를 가니. 그래도 난 니들 기다릴까봐 나온 거야. 다른 애들은 안 나오겠대."

혼자 나온 여학생은 매우 비장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국부'라는 단어가 엄청나게 생소해서 문영길씨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 단어의 위력은 막강했는데

그 단어 하나로 그 여학생은 단숨에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역사의식적으로나
세 명의 남학생들을 압도하며 우위에 선 것이었다.

문영길은 이상하게도 죄를 지은 기분에 주눅이 들었다.

한철규 역시 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고,
개밥통도 주눅이 든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동네 앞을 흐르는 강 가로 나와서야 오늘 미팅이 박살났다는 실감이 났다.

철규가 바지 쟈크를 내리더니 오줌을 싸기 시작했고
개밥통과 문영길도 나란히 서서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오줌을 다 싼 철규가 한참 곧추를 만지작거리며 내려다 보더니 문영길에게 말했다.

"누가 멀리 쏘나 해보까?"

비릿하게 웃는 철규의 곧추 선 곧추를 본 문영길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다. 가소로운 놈.

"하.. 새끼. 겁대가리 없이."

개밥통도 끼어들었다.

"오케바리. 가진 돈 다 몰아주기."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었고
그러한 햇빛 때문에 강물의 색깔이 다채롭게 오묘했고
물새들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으며
억새풀이 만발한 강 가에
사복입은 고2 세 놈이 나란히 서서
박살난 미팅의 좌절감을 달래듯

자위를 했다는데

누가 멀리 나가나 시합을 했다는데

1979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는데.....

박통장3.jpg

아버지는 소주잔을 비우며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이 나오는 TV 뉴스를 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으며 쯧쯧 혀를 차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문영길이 안방 문을 열었을 때 풍경이 그러했다.

"밥 안 줘?"

머리만 들이밀고 문영길이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을 때
어머니가 다짜고짜 바가지를 집어 던졌고
우연히도 바가지는 영길의 이마를 강타하고 말았다.

"아!"

순간 아찔 별이 튀는 느낌에 문을 부여 잡는데

"지금이 어느 땐 줄이나 알고 쏘대니는겨? 뭐?! 밥?! 배고픈 줄은 알어?! 공부 못 하거덩 속이라도 썩이지 말아야지. 이건 누굴 닮아서. 건넌방 은숙이 반에 반이라도 닮아 봐!"

따발총 처럼 날아오는 엄마의 말은 지금의 시국과 문영길의 본질과 옆 채에 사는 은숙이 까지
너무나도 광범위한 내용을 아우르고 있어서 어디서부터 항변을 시작해야 할 지 헷갈리는데다가
당장은 아픈 이마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영길은 계속 문을 부여잡고 있었고

"조용히 좀 해라."

아버지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마디만 점잖게 던졌을 뿐

"도대체 뭐가 될라고 그런 겨!"

카운터 펀치를 날리듯 엄마의 마지막 힐난이 날아왔을 때
아픈 이마를 손바닥으로 부벼대던 영길의 목구멍 아래에서
기운 찬 항변의 목소리가 솟구쳤다.
영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배우 될라고 그런다! 왜?!"

이쯤이면 엄마는 동작을 멈춘 채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고
아버지는 TV로 부터 시선을 돌려 영길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무어야?! 이노무 자식이!"

엄마는 출발신호를 들은 단거리 선수처럼 튀어나오려고 방바닥을 짚었고
막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한 영길은 번개처럼 방문을 닫았다.

좌우로 슬라이딩하는 여닫이 문이었다.
영길은 양손으로 좌우문짝의 홈을 꽉 잡고 버텼다.
엄마는 기운이 좀 쎈 편이었다.

그런데 조용했다.

양손으론 문짝을 잡고 두 발로는 마루짱을 단단히 받치고 선 자세가 스스로도 좀 우스워지고
일촉즉발의 팽팽했던 긴장도 느슨해지자
TV 뉴스 소리만 들려왔다.

아무래도 엄마는 영길의 꿈 보다는 박대통령의 장례식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문을 놓고 마루에 걸터 앉은 영길은 아주 약간 서러워졌다.

누구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은밀한 꿈을 토해냈는데..
엉겁결이긴 했지만..

시..

무시당한 기분을 곱씹고 앉은 문영길이었다.

그 때 대문에 기척이 있었다.

은숙이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은숙..

대문을 닫아 거는 이은숙의 교복 입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길은 얼른 운동화에 발을 집어 넣었고

은숙이 돌아설 때 운동화 뒤축을 채 끼우지 못 한 채로 걸어 나갔고

영길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가는 은숙이 스윽 지나칠 때

일부러 어깨를

툭-

부딪쳤다.

그리곤 아주 주관적으로다가 멋지게 돌아서며 영길이 말했다.

"벌써 세 번 째 어깨를 부딪치는군."

나름 연구하고 있었던 신성일의 동작이었다, 고 문영길씨는 회고 했으나..

이은숙은 흔들림 없이 아무도 없는 마당을 지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박살난 미팅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엉겁결에 내뱉고 무시당해버린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해
어깨를 부딪칠 때 은숙에게서 나던 비누냄새 때문일 수도 있다.

괜시리 가슴이 울렁거렸고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문영길은 시계를 보았다.
이은숙이 집에 들어간 지 삼 십 오분 쯤 되었다.

방에서 나온 문영길은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양말만 신은 채 집 뒤로 돌아갔다.

이은숙이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셋방은 부엌이 따로 달려 있었는데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문영길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부엌 문 앞으로 다가갔다.
콩닥콩닥 심장 소리가 들릴까봐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며
낡은 나무 문짝의 틈을 찾았고 눈을 갖다 댔다.

그 작은 틈 사이로
만화경의 접안구 같은 틈 사이로

이은숙의

하얀 등이...

보였다!

이은숙은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물 속에 앉아 몸을 씻고 있었는데

틈도 작고 각도 마저 안 맞아서 등의 오른쪽 4분의 1 정도만이 겨우 보이기는 했으나..

그 날..

작은 이은숙의 작은 등의 4분의 일은

'눈보다도 더 새하얳다.'

는 게 오늘 날 문영길씨의 기억이다.

눈보다 더 하얀 은숙의 등짝에 시선과 영혼을 붙잡혀
양말만 신은 채 낡은 부엌 문짝에 들러 붙어 있던 문영길은

이은숙이 자기 쪽으로 몸을 돌려주기 만을 고대하며
꼴깍 침을 삼키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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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 그려져 시나리오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합니다.
흥미진진하네요.

사소한 의견인데 최근 글을 올리실때 이전편 링크를 걸어주시면
편하게 감상이 가능할 듯 합니다.
확산도 더 잘될 듯 하고요. ^^

앞으로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

아 그렇군요.. 링크..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재미있네요.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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