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in #kr7 years ago (edited)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중학생 때 쯤이었지 않나 싶다. 그때 읽었던 제목은 상실의 시대...
그 때 당시를 생각해 보면...그저 한편의 좋은 야설(?)을 봤다라는 느낌??
기억나는 내용이라고는 나오코가 요양하는 곳 풀숲에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단 둘이 있었을 때의 부분뿐이었다.
이런 쪽으로는 아는 것도 별로 없던 나이에 이렇게 적나라한 표현과 단어들은 적잖게 충격적이었나보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하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땐 책을 그냥 보이는 대로 읽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르웨이의 숲.jpg

시간이 지난 후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읽은 이 책은
어릴 때 읽었던 그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관계, 인물의 상징성 등 많은 부분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책은 37살의 와타나베가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을 듣고 대학생때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이 된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멀어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다.

와타나베는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 가즈키의 자살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딱히 무언가가 되고 싶지도 않고 그냥그냥 하루하루를 태엽을 감으며 버티는 인물로 묘사가 된다.
그와 달리 주변인물들은 각자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만큼 상징성 또한 뚜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즈키와의 추억을 공유한 가즈키의 여자친구이자 첫사랑인 죽음의 상징성을 지닌 젖지 않는 여자 나오코
밝고 쾌할하며(속은 어떨지라도) 엉뚱한 삶과 충만한 리비도의..나오코와는 상반된 상징성을 지닌 미도리
책을 통해 알게된 대학교 형이자 본능에 충실하며 여러면에서 월등한 나가사와
와타나베의 룸메이트이자 나가사와는 상반된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돌격대

그 외에 과거의 상실을 벗어나면서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레이코,
잘못된 걸 알면서 그것을 애써 묵인하며 연애를 이어가는 두려움을 상징하는(한다고 생각되는) 나가사와의 여자친구 하쓰미

그들과의 만남으로 와타나베는 그들과 동화되어 가고 상실해 간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자살하거나 사라진다.
고등학교 때 가즈키, 갑자기 사라진 룸메이트 돌격대, 3년 후 쯤 자살한 하쓰미,
그리고 요양원에서 회복되는 듯 했으나 불현듯 자살한(사실 예고된) 나오코
(왜 그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자면 그들은 모두 자기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했던 인물들이다.
모임의 리더같았지만 항상 그러기 위해 억지노력을 해왔던 가즈키,
그러한 가즈키의 상실 후 죽음과 함께 있던 자기 자신을 고치고나 했던 나오코,
나가사와와의 이별 후 달라지고자 노력했던 하쓰미...
어쩌면 그들은 그러한 억지노력 끝내 지쳤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비록 책에선 섹스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인물관계를 그려나가지만
극단적인 모습만 배제한다면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가는 인물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시대적 배경은 다를지라도 결국 우리들의 예전, 그리고 현재와 다르지 않다. 계속 상실해 가는 것이...
하지만 비록 상실해 가는 현재를 살고 있을지라도
과거를 회상해보면 결코 상실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 같다.
(와타나베도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보다는 상실의 시대라는 그 제목이 마음에 훨씬 와닿는 제목이다.

다음백과에 수록된 작품 속 명문장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65200043)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죽음을(그리고 삶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간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야. 나는 곧 스무 살이고 나와 기즈키가 열여섯, 열일곱 살에 공유한 것의 어떤 부분은 벌써 사라져 버렸으며, 그것은 아무리 한탄한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거야. 더 이상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너라면 내가 느낀 것, 말하려는 것을 잘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마도 너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 봄날의 곰만큼 좋아. (...)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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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리비도란 단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한때 취해있었던 개념이었는데 말입니다.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위대한 개츠비 .. 모두 비슷한 정서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눈 앞에서 놓쳐버린 사랑? 열정의 허무함?
표현력이 좋지 않아 설명은 못하겠네요. 다만 왠지 소설 '이방인'이 떠오르게 되는 작품들인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이방인을 안읽었었네요 읽어야겠단 생각만 했던...;;;;
말씀하신 책들을 보니 뭔가 '허무함' 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긴 하네요
개츠비는 부를 가졌으나 사랑이 전부였던 인물인데 그 중요한 데이지의 '사랑'을 얻지 못한 '허무함'
노르웨이의 숲은 시간이 가져가버리는 '상실'에서 오는 '허무함'
그런 부분에서 오는 공감대때문에 좋은 책들이 사랑을 받는거 같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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